주보 칼럼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 저주와 축복의 의미

정낙원 2015. 8. 3. 16:54

◆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 저주와 축복의 의미 ◆

 

창세전 언약 속에는 호도 속의 쌍둥이처럼 두 언약이 있습니다.

이게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두 언약 속에는 축복과 저주라는 하나님의 두 속성(續成)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면서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도 하고 저주도 하십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서로 상반된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서로를 드러내는 짝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역사 속에서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십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가지고 그려 내셨고,

신약에서는 교회로 그려 내십니다.

 

이것이 구약의 언약의 후손들 집안 속에 다 담겨져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 집안에서는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두 아들로 하여금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내는 두 언약을 상징합니다.

 

하갈은 옛 언약을 상징하고 사라는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은 율법 아래서 난 종을 예표하고

사라에게서 낳은 이삭은 새 언약으로 낳아진 천국 백성을 예표합니다.

 

이것이 이삭의 집안에서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아들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야곱 집안에서는 레아와 그 아들들 그리고 라헬과 그 아들들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국가적 이스라엘 민족에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타납니다.

신약에 와서는 교회 안에서는 에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에 사람과 땅에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은 죽을 때 아들들에게 후 일에 일어날 일들을 각각의 분량에 따라서 축복을 합니다.

 

1절, 너희의 후 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어떤 아들들에겐 저주를 예언하고,

어떤 아들들에겐 축복을 예언하였습니다.

 

장자의 계보(系譜)에 속한 유다와 요셉에게는 축복의 예언을 하고

나머지 아들들에게는 종들에게 하는 것과 같은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축복입니다.

 

28절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이들을 계수하고서는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야곱의 예언은 창세전 언약을 펼쳐가는데 있어 12 아들들에게 각각의 배역을 맡겨주신 것과 같습니다.

한 부류는 옛 언약을 보여주는 도구로 종의 모습으로 사용이 되어지고,

또 다른 부류는 새 언약을 보여주는 도구로 아들의 모습으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12 아들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를 찍는 것입니다.

마치 군사 훈련을 할 때 적군과 아군으로 나누어서 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들은 옛 언약인 저주의 모습을 보이는 악역을 맡기고,

어떤 자들은 새 언약인 축복의 모습을 보이는 선한 역을 맡긴 것입니다.

 

촬영을 다 하고 나서 각자의 몫의 개런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악인과 선인이 지파와 상관없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잔해하는 기계라고 저주 받은 레위 지파가 제사장 지파가 되는 일이 일어났으며,

길에 뱀이고 첩경의 독사라고 저주 받은 단 지파 속에서도 오홀리압과 삼손 같은 믿음에 사람도 나타나고, 반대로 축복받은 유다의 아들들 중에서 엘과 오난처럼 저주 받은 자들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야곱의 12 아들들로 언약을 펼쳐가는 것이 주제이지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저주를 받았느냐 라는 데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일컬어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각각의 분량대로 언약을 그려내는 역할극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세전 언약을 펼쳐 가는데 있어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사용하셨다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누가 구원을 받았고 누가 저주 받았느냐 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선악의 법으로 보아선 안됩니다.

 

구원은 어느 지파에 속하였느냐 라는 혈통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하여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속에서도 표면적 이스라엘이 있고 이면적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긍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속으로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혈통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앙은 육이라는 표면에 있지 않고 영이라는 이면에 있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12 아들이 신약으로 오면 교회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율법에 속한 자들과 은혜에 속한 자들아 서로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달란트 비유처럼 두 부류의 종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표면에 속한 자들이 있는데 이들을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들은 종처럼 자기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갑니다.

반면에 이면에 속한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들은 아들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는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악한 종처럼 주인이 없다고 하여서

게으름을 피우는 표면에 속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충성된 종들처럼 주인이 있든 없든 상관치 않고 성실히 일하는 이면에 속한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표면에 속한 자들은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사람들 눈을 의식하고 자기 영광을 위하여 일을 하고

이면에 속한 자들은 바나바처럼 주께 받은 은혜로 감사함으로 섬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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