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칼럼

남자와 여자

정낙원 2017. 12. 3. 13:05

◆ 남자와 여자 ◆

 

하나님은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도움을 입어야만 살 수 있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이를 천지창조를 통하여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늘은 주는 위치에 있고,

땅은 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땅은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이를 남자와 여자로 보면 하늘은 남자이고 땅은 여자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남성 명사로 쓰고 땅을 여성 명사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가지고 예수님과 성도들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 속에서 여자가 나왔듯이 예수님 속에서 성도들이 나왔습니다.

기능적으로 볼 때는 아담은 남자이고 하와는 여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남자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 나라에서 오신 분이 주어야 합니다.

 

남자는 생명을 주는 자이고 여자는 생명을 받는 자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의미는 돕는 자와 도움을 입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조물인 아담은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는 여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늘의 생명을 받으면 남자가 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남자이고 자기 백성은 여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설정해 둔 것입니다.

 

막 창조가 된 아담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남자가 아닙니다.

여전히 하와가 같은 “네페쉬 하야” 로서의 생령입니다.

 

아담이 남자 구실을 하려면 여자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아담은 먼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별로서는 아담과 하와는 남자와 여자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둘 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여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고자 하신 것도 아담을 남자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생령인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존재가 되려면 영생하는 분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은 하늘에서 오신 남자여야만 합니다.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에게 빠질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줄 진짜 남자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시고자 하신 돕는 배필은 하나님 나라에서 온 남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줄 남자가 오기까지 여자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남자의 구실이 있고,

여자의 구실이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생명을 줄 수 있을 때 남자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여자에게 생명을 주려면 먼저 자기가 생명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때까지 생령인 아담은 남자 구실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스스로 남자의 위치에 서서 여자를 다스린 것이 타락의 원인이었습니다.

죄가 뭐냐?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급선무는 아내를 맞이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를 떠나는 것은 더 더욱 더 아닙니다.

자신이 먼저 하늘에서 온 남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남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자에게 생명을 주고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령인 아담으로서는 여자를 지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는 아담 보다 월등한 지혜로운 뱀이 있기 때문입니다.

뱀을 이기려면 뱀 보다 더 똑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뱀을 아담 보다 더 똑똑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뱀을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아담의 몸에서 나온 여자는 뱀의 미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여자를 지켜내지 못하였습니다.

남자도 아닌 것이 남자 구실을 하다가 결국에는 둘 다 뱀의 미혹에 넘어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선생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의 훈도라고 했습니다.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이 소경이라는 뜻입니다.

 

타락이란? 남자도 아닌 것이 남자 구실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에덴동산에서와 같이 아담의 타락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자도 아닌 것들이 남자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가르치는 자리에서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복음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복음은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복음을 받기 전에는 복음을 전하고자 하면 안 됩니다.

그럼 아담처럼 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이 올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은 아담에게 주고자 하신 보혜사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복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이 과정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고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전하기 전에 예수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기 전에 십자가가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움이란? 자기 주제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도움을 받을 존재인지 아니면 도와줄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들어야 할 자인지 복음을 전할 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언약을 말하기 전에 옛 언약이 무엇인지 새 언약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일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남에게 전도하기 전에 내가 먼저 예수가 누구이며 십자가 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쭙잖게 말씀 몇 자락 들은 걸 가지고 남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아담처럼 망하게 됩니다.

 

이 시대 교회의 타락은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고 있어서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해서 망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알자 힘쎄 여호와를 알자고 외쳤습니다.

이는 여호와를 모르면서 여호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사보다 먼저 긍휼을 배우라고 합니다.

제사를 왜 지내는지도 모르면서 제사를 지내면 그 제사 지냄 때문에 망합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교회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정작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을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교회 일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일을 게을리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에게 갖다 바쳐야 하는 자인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입어야 하는 자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길 자인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할 자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는데 마르다처럼 섬기고자 하면 안 됩니다.

그 섬김이 기각 당할 때 가인처럼 분노가 가득해서 하나님을 죽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앎이 먼저이고 일은 나중인 것입니다.

일은 앎의 결과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잠시라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고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각종 일들이 은혜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발 잘난 척 나대지 마십시오.

선생 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저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예수님 입술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자 하십시오.

누굴 가르치려고 나대는 순간 아담처럼 망하고 맙니다.

 

초등학생이 나 장가가겠다고 하면 우짭니까?

남자 구실도 못하면서 여자를 데리고 오면 어찌합니까?

씨알이 영글 때까지 제발 잠잠히 부모님 아래서 정성한 자로 자라가십시오.

남자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자인지를 배우십시오.

 

그럼 자연히 여자도 생기고 장가도 가고 아버지 집을 떠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남자 되기는 쉬워도 남자로 살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섣불리 나 장가 갈래 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 남자 장가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줍잖게 남을 가르치려 하지 말란 말입니다.

항아리 아구까지 가득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아구까지 다 차면 저절로 철철 넘쳐흘러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바울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집에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합니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목사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이는 복음을 모르면 잠잠하라는 말입니다.

목사는 남자 여자 성별로 따지지 않습니다.

여자라도 복음 알면 남자 목사이고, 남자라도 복음 모르면 여자 목사입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이 복음을 모르고 아내가 복음을 알면 아내가 남자이고 남편은 여자입니다.

그럼 남편은 아내 말을 들어야 합니다.

반대로 남편이 복음을 알고 아내가 모르면 남편이 남자이고 아내는 여자입니다.

그럼 아내는 남편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게 순리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복음을 알고 성도가 복음을 모르면 목사는 남자이고 성도는 여자입니다.

이럴 때는 성도는 목사에게 순종하여야 합니다.


반대로 성도가 복음을 알고 목사가 복음을 모르면 성도가 남자이고 목사는 여자입니다.

이럴 때는 목사가 성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질서입니다.

 

목사와 성도는 직분의 차이이지 높고 낮음이 아닙니다.

목사가 복음을 모르면 성도에게 배우는 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그건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복음을 배우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가정이든 교회이든 역리로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남자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 안다고 하는 사람이 복음 모르는 사람에게 이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나 집안이 뱀의 권세아래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편의 말이 추상같다 할지라도 신앙에 방해 되는 말을 하면 거부하여야 합니다.

흔히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남편의 말에 순종한다고 하는데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가정은 여호와께서 세워야 평안하지 뱀이 세우면 늘 전쟁입니다.

 

괜한 자존심이 서로를 망하게 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목사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목사 된 것이 저주이고,

장로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장로 된 것이 저주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고 교회를 세습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 뻔 했도다!

차라리 못 본다고 하면 좋았는데 본다고 하니 그저 죄가 있느니라!

 

신앙은 성도로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게 해 주시는 그 은혜에 감읍하면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날마다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그 천국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르치려 하면 지옥이고 배우려고 하면 천국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평안 하십니까?

예수 믿는 것이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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