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칼럼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아담 이야기

정낙원 2017. 12. 24. 13:43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아담 이야기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이면서 우리의 이야기이다.


아담이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 속에는 이중적 게시가 담겨져 있다.

예수님 이야기로 풀면 구원이야기가 되고,

우리 이야기로 풀면 타락하는 이야기가 된다.

 

성도는 존재론 적으로는 아들이 영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인 남자이지만,

영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수준론 적으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끊임없이 받아야 하는 여자 입장이다.

 

생명이란? 항상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면 영생하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속하여서 생명을 공급 받아야만 한다.

 

예수님은 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다.

가지인 성도가 나무인 예수로부터 떨어져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을 악이고 교만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먼저 스스로가 독립하여 살 수 있는 자라야 한다.

남자 구실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가정을 책임을 능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령인 아담은 스스로 살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부모 아래서 먼저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는 강건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 

부모 밑에서 건강한 생명으로 자란 아들은 부모를 떠남으로써 남자가 된다.

또한 남자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냄으로써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이유는 자신이 바로 부모가 되고자 함이다.   

성경의 역설은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자는 아들의 상태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아담의 생명을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부모를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 같이 되겠다는 것과,

생명을 버림 없이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것은 참람이며 곧 불경이다.

 

육신적인 결혼 생활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떠남으로 남자가 부모를 떠남이 된다.

어머니는 자식을 자기로부터 떠나게 함으로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게 되는 것이 된다.

 

생명과를 먹지 못한 아담은 아직까지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여자이다.

그렇다면 아담은 하나님으로 생명을 받아야 하는 여자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씨를 받아서 남자가 되어야 한다.


아담이 동일한 “네페쉬 하야” 인 여자에게 빠져들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아담이 정말 온전한 남자였다면 선악과를 먹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온전한 남자는 절대로 선악과를 먹지 않는다.

 

아담이 여자에게 빠진 것은 여자가 곧 자기의 자랑이고 분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아내를 사랑한 것 때문에 망하고 말았다.

아내를 사랑하느라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일을 놓치고 말았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는 교인들이 아담처럼 행하는 자들이 있다.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가야 할 자들이 교회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게을리 하고 있다. 


일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을 놓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예수님과 하나 되어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삶에 의미이며 가치의 전부이어야 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일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예수)를 믿는 것과,

그를 전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복음 전하는 일을 하나님의 일로 보지 않았다.

하나님에게 있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다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의 한 부분일 뿐이다.

예수를 믿으면 저절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한 사람들이 누리는 복이지 결코 일일 수는 없다.

성도가 행하는 일들은 예수가 믿어지는 것의 기쁨의 산물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결코 의무가 아니며 고통이 아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발정기가 일어나서 짝짓기를 한다는 것은 장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가 예수를 믿는 일을 충실히 하면 믿음이 그 안에서 갖가지 봉사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에 장성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어떻게 하면 부모를 떠날 수 있는 건장한 남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남자의 씨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야 하고,

둘째로, 그 다음은 생명의 양식을 먹어 강건한 남자로 자라가야 한다.

 

씨와 양식은 동일한 무게로 중요하다.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이는 엄마 젖을 먹고 자라는 것이 최고의 일인 것과 같다.

 

말씀을 먹고 소화하여 강건한 자로 자라가야 한다.

강건하면 봉사의 일은 자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믿음도 없는 사람이 분위기에 휩쓸려 헌금을 냈다가 아까워서 후회하는 것과 같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헌금을 안 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헌금을 해서 망했다.

 

봉사와 충성도 믿음도 없는 사람이 누가 시킨다고 해서 하게 되면 후회하게 된다. 

교회에 오기 싫은 것을 목사가 강요해서 오게 되면 교회에 와 주었다는 것 때문에 망하게 된다.

 

왜? 교회에 와야 하고!

왜? 봉사를 하여야 하고!

왜? 헌금을 하여야 하고!

왜? 성도를 섬겨야 하는지를 알기까지 자라가야 한다.


무엇이든지 소화할 수 있는 자로 강건하게 자라가야 한다.


섬김을 받아야 할 때는 섬김 받는 것이 신앙이다.

반면에 섬겨야 할 때는 섬기는 것이 신앙이다.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섬기겠다고 하는 것도 참람이고,

반대로 섬겨야 하는 자가 빈둥거리면서 노는 것도 참람이다.

 

바울처럼 우상의 제물을 먹든 안 먹든 자유 할 수 있는 강건한 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가(可)하나 모든 것이 유익(有益)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할 때 자유를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남에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게 된다.

 

아담이 여자를 다스릴 수 있으려면 생명에 관한 문제에는 냉정하여야 한다.

여자가 그 어떤 무기를 들고 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냉정해야 한다.

 

바울처럼 강건한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성숙한 남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냉정함이다.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는 당신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일에 대하여는 지극히 냉정하신 분이다.

그래서 신앙은 여자처럼 인정에 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울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하나 되는 것을 그리스도와 교회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엡 5:30-32=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한 몸이란? 주신 자가 취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도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지 성도가 하는 일이 아니다.     

 

지체는 몸에 붙어서 몸이 공급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여자라면 남자의 사랑을 받아 그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본분인 것이다.

 

아담이 여자의 말을 들은 것은 인정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눈물에 현혹되지 않으신다.

 

교회가 오늘날처럼 타락하게 된 것은 목사들이 교인들 편을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여자(성도)들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있다.

 

복음을 모르는 목사는 여자이지 남자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여자인 성도들의 말이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남자답게 강건해져 가는 것”과,

“남자답게 사는 것”은 다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같이 살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죄 아래서 난 자들은 그리스도처럼 살 수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야만 살아 갈 수 있는 여자이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 없이는 살수 없는 여자라는 것을 아는 자가 강건한 남자이다.


강건한 남자는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는다.   

신앙은 내가 예수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천사처럼 변화되는 것도 아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예수라는 신랑과 한 몸이 되어 사는 것이다.

 

예수는 어저께 한 번 믿었으니 오늘은 안 믿어도 되는 그런 분이 아니다.

죄 아래서 난 몸을 가지고 사는 한 예수는 우리에게 믿어야할 구주이지 본 받을 스승이 아니다.

 

믿음 이외에 그 어떤 달콤한 말은 다 마귀의 말이다.

예수를 떠나서 독단적으로 살라는 것은 마귀의 감언이설이다.

 

생명은 생명과(예수 믿음) 속에만 있지, 선악과(성도의 행함) 속에는 없다.

선악과를 아무리 많이 먹었다 할지라도 살 수는 없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 온 “산 떡(양식, 밥)”이라고 하셨는가?

이는 예수는 날마다 먹어야 살 수 있는 밥이기 때문이다.   

 

밥은 한 끼 먹어서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은 날마다 끼니마다 밥을 먹어야지만 살 수가 있다.

 

단번에 받은 죄사함도 있지만, 날마다 받아야 할 죄사함도 있다

예수는 한 번만 믿으면 끝이 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그를 믿음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산 자에게 가장 큰 일은 양식을 잘 챙겨 먹는 것이다.

먹는 것이 귀찮다고 하면 그는 중병에 걸린 증거이다.

 

어저께 믿음이 좋았으니 내일도 좋을 것이란 법이 없다.

믿음은 날마다 예수의 힘으로 사는 것이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예수를 잘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라는 하늘에서 온 양식을 잘 먹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광야 길에 만나를 일 년치를 한꺼번에 주시지 않고 매일매일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꺼번에 왕창 받아 쌓아두고서 곶감 빼먹듯이 하는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날마다 때를 따라 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고 말씀 듣기를 사모 하여야 한다.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한 몸을 이루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시다.

그러니 복음 쬐금 아는 것으로 아담처럼 자기가 예수님처럼 부모를 떠나 살려고 하지 말라.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고백한 것이다.

두려워서가 아니고 자기 주제를 분명히 알기 때문에 지극히 정상적으로 나타나는 고백이다.

 

바울이 남자답게 강건 하라는 말은 예수님처럼 독립하여 살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잠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가 남자답게 강건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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