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칼럼

뱀이 여자를 미혹하는 방법

정낙원 2018. 1. 7. 13:33

뱀이 여자를 미혹하는 방법 (창 3:1-7)

 

창세전 언약을 보면 먼저 죄 아래 가두어지고 나중에 죄에서 건짐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원칙에 따라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이 모습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담의 창조 목적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에덴동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아담은 먼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와 함께 뱀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가 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면서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보내 줄 테이니 그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이란? 인간의 혈통으로 오지 않고 하나님의 씨로 오실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케 하여서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예수님은 뱀의 미혹으로부터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로부터 낳아지는 새로운 아담들도 뱀의 미혹으로부터 이겨내게 하십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마귀와의 전쟁입니다.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먼저 마귀의 술책과 무기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마귀의 술책과 무기를 알려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두 과실이 있습니다.

먹으면 죽는 과실과 먹으면 영생하는 과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는 먹으면 영생하고 선악과는 먹으면 죽는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생명과는 볼품이 없고 선악과는 인간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고 화려합니다.

 

뱀은 여자의 시선을 선악과로 향하게 하여서 생명과를 가리게 하였습니다.

여자는 선악과를 보는 순간 빠져들고 결국에는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여자는 뱀의 계략에 빠져들고 죽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에덴동산은 교회를 예표합니다.

교회 안에도 두 과실이 있습니다.

두 과실이 두 의(義)로 나타났습니다.

 

먹으면 죽는 선악과는 율법의 의이고,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과는 믿음으로 난 의입니다.

율법의 의는 인간의 의이고,

믿음으로 난 의는 예수그리그도의 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모두가 뱀의 미혹에 빠져서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서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하신 후에 자기 백성들 속에 성령으로 오셔서 예수그리스도의 의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뱀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생명과를 가리는 일을 하였듯이 지금도 마귀는 교회 안에서 율법의 의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율법 아래 예수의 생명이 없고 여자들은 여기에 미혹을 당합니다.

율법은 인간을 긍정해 주고 인간의 가치를 상승시켜 주고, 인간에게 자랑거리를 주고, 인간을 영광스럽게 해줍니다.

 

율법의 의는 인간을 높여주고 상좌에 앉게 하고 육신의 안락을 줍니다.

율법 신앙은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로울 만큼 탐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율법 신앙을 좋아하고 많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 속에는 인간을 긍정해 주는 것도 없고, 인간의 자랑거리도 없으며, 인간의 영광도 없습니다.

섬김과 베품과 나눔과 낮아짐만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율법의 의와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살아가는 삶에 가치에서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마귀가 예수를 찾아와서 세상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제시한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입니다.

이러한 것은 전부 세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내가 온 것은 인간에게 영광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삶에 목적을 이 세상 영광에 두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삶에 목적을 언약을 이루는데 두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입고 먹고 마실 세상 것을 구하지 말고, 하늘이 것인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입고 먹고 마실 것은 세상의 것이지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하늘에 것입니다.

 

구원이란? 세상으로부터 빠져 나옴입니다.


언약으로는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빠져 나옴이고,

의로는 율법의 의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음이고,

삶의 주소로는 애굽에서 광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물질적인 가치로 사는 곳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가치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곳입니다.

물질적 가치는 육신의 즐거움을 주지만 영적 가치는 영혼의 쉼을 주십니다.

 

마귀는 신앙의 명제를 믿음에서 행함으로 바꾸어서 미혹을 합니다.


무엇을 믿을까 에서 ~ 무엇을 행할 것인가 로 바꾸어 버립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는 생명과이고, 무엇을 행할 것인가는 선악과입니다.

마귀의 종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무엇을 행할 것인가에 눈길을 사로잡아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율법에 시선이 고정 되면 “무엇을 믿을까” 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 신앙의 본질이 믿음에서 행함으로 과녁이 옮겨지고 맙니다.

신앙의 본질은 무엇을 믿을까에 싸움이지 무엇을 행할까에 싸움이 아닙니다.

 

마귀는 말씀을 지키는 주체를 바꿔놓았습니다.


율법은 말씀을 지켜야 하는 주체가 인간이고,

은혜는 말씀을 지킨 주체가 예수님이십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는 말씀을 지키는 주체가 누구냐로 차이가 납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좋은 것이나 정답은 아닙니다.


좋은 것과 정답은 다릅니다.

교인들이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은 좋은 것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정답은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구원은 새 언약으로 주어집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옛 언약에 속한 것이고,

주 예수를 믿는 것은 새 언약에 속한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 사이에서 맺어진 것이므로 인간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뱀은 예수그리스도가 이루신 것에 인간의 것을 섞으라고 합니다.

혼합은 타락이고 죄입니다.

 

구원이란? 혼합 속에서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인간의 의가 섞이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뱀의 목적은 인간들 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가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지키고 행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도적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어겼을 때 번민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미혹당하면 자기 행함으로 선과 악의 구조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말씀대로 살았을 때는 천국인데 말씀대로 살지 않았을 때는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인데 마귀는 자신의 행함에 가두어서 결코 정죄함에 이르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미혹당한 사람들은 한 평생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으려는 싸움을 하게 됩니다.

결국 행함이라는 선악과만 남고, 믿음이라는 생명과는 사라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우리가 범죄치 않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지를 아는 것을 바라십니다.

우리의 시선 끝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입니다.

이를 바울은 알고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삶의 주소를 선악과라는 동네에 붙잡아 두고자 함입니다.

선악과라는 동네에 주소를 두고 살면 생명과라는 동네엔 자연히 발길을 끊게 됩니다.

그래서 뱀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뱀은 우리가 율법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러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그러면 도적질해도 괜찮단 말인가?

살인해도 되고, 간음해도 된단 말인가? 라고 항변을 합니다.

이것은 이러한 일을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그 속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이 자리 잡고 있으면 행함이라는 명제에 가두어지고,

은혜가 자리 잡고 있으면 믿음이라는 명제로 살아가게 됩니다.

법 아래 있는 사람은 늘 자기 행위로 선과 악으로 구분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이 정한 선이 악을 이겼느냐 아니면 악이 선을 이겼느냐 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여전히 선악과 아래 머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은 선악과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싸움이 아닙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되느냐 바치면 안 되느냐의 싸움이 아닙니다.

윤리도덕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하느냐? 의 싸움도 아닙니다. 

이 모두는 선악의 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입니다.

신앙은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지 예수 밖에서 성자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지켜야 할까요? 라고 묻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눈길을 두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눈길을 자기에게 잡아 두게 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가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일컬어 거짓의 아비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인간이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에게 선악과로 생명과를 가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헛 싸움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게 뱀의 지혜입니다.

 

뱀은 항상 화려함으로 생명을 가리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화려함 속에 생명을 두지 않았습니다.

생명은 비천함 속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보면 눈으로 보는 관상수들은 모두가 보기에 좋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되는 유실수들은 볼품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많은 돈을 들여서 관상수를 사서 정원은 가꾸어도 돈을 들여 사과나무 배나무를 심지는 않습니다.

 

돈으로 무엇을 사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를 알 수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돈으로 관상수를 사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돈으로 유실수를 삽니다.

관상수는 눈을 즐겁게 하지만 유실수는 배를 부르게 합니다.


관상수는 세상 영광이고, 유실수는 하늘의 생명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관상수인 세상 영광만 쫓아가다가 유실수인 하늘의 생명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늘에 부자여야지 세상에 부자가 되면 안 됩니다.

세상 가치로 보면 관상수를 산 사람이 지혜로워 보이지만,

영적 가치로 보면 유실수를 산 사람이 지혜롭습니다.

기근이 닥치면 관상수를 심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드러나고 유실수를 심은 사람은 지혜로움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추수하기 전에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을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400년 동안 영적 암흑기가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도 말씀의 기근이 닥치는 영적 암흑기가 옵니다.

그 모습을 종말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시선을 자기에게 두고 있는 것이고 세상 가치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판단은 가련하고 곤고하고 소경이고 발가벗고 있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를 치장하는 관상수들만 가득하였지 정작 생명이 되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유실수는 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문 밖에 서 계시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경을 통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음을 압니다.

그리하여 예수만 높이고, 예수만 자랑하고, 예수 안에서 살아갑니다.

 

성도가 천국에 가면 하는 일은 세세토록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역사 속에서는 교회를 통하여서 미리 맛보기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치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가리는 마귀의 미혹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높여주는 달콤한 인본주의를 경계하십시오.

인간의 가치를 높여주는 그가 바로 뱀입니다.

마음을 찌르는 선지자의 말을 듣기를 즐겨하고 귀를 즐겁게 하는 제사장의 말을 경계하십시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종은 선지자이지 제사장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