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칼럼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정낙원 2018. 1. 21. 16:34

◆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사랑 안에 있지 않고 법아래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벌거벗음이 수치라고 여기고 치마를 해 입고도 나무 뒤에 숨어버립니다.

이는 치마가 아담 속에 두려움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발가벗음을 수치로 보지 않았는데 아담은 왜 수치로 여길까요?

이는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아담의 눈에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그런데 선악과가 두려운 하나님으로 보이도록 아담의 눈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은 부모와 자식과 같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사랑의 관계로 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가 법의 관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지만 법은 모든 허물을 드러내게 합니다.

하나님은 벌거벗은 아담이 그냥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그대로 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도 하나님과 동일하게 벌거벗음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자신의 벌거벗음이 수치로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선악과의 눈으로 본 하나님은 심판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는 아담이 법아래 가두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법이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인식케 한 것입니다.

 자기 눈에 하나님이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보이면 숨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마치 어린아이가 잘못을 하고 난 후 부모를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안에 법이 두려움을 일으켜서 부모를 두려운 분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걸 죄라고 합니다.

 

선악과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율법 아래서 하나님을 보게 되면 심판하는 두려운 하나님으로 보이고,

은혜 아래서 하나님을 보게 되면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입니다.

아담은 율법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니까 치마를 해 입고도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 뒤에 숨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워서 숨어 있는 아담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왜 날 두려워하느냐?

무엇이 너로 하여금 나를 두렵게 만들었느냐고 묻습니다.

 

뱀이 선악과로 아담을 두려움의 자리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의 자리로 이끕니다.

그것이 율법 아래 머물게 함입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하나님은 상선벌악 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으로 보입니다.

그럼 인간들은 그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자기 행위로 아담처럼 치마를 해 입게 됩니다.

그것이 지금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은 헛된 일이라고 하면서 아담이 만든 치마를 벗겨버립니다.

그리고 가죽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이는 수치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가려주신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지 우리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라고 합니다.

우리의 방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율법이라는 동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마귀는 인간을 율법이라는 동네에 붙잡아두고자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관심사를 율법에 붙잡아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시선이 고정이 되면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럼 자기 힘으로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걸 불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수치는 내가 가려 줄 터이니 나오라고 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머물 자리는 은혜의 자리이지 법의 자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신앙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지만 율법 아래는 형벌만 있을 뿐입니다.

 

마귀는 아담을 네페쉬 하야에 머물게 하고자 합니다.

네페쉬 하야로 머물러 있는 한 아담은 선악과를 벗어 날수가 없습니다.

선악과에 눈이 고정이 되어 있으면 자연히 생명과는 가려지게 됩니다.

생명과로부터 눈이 멀어지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진 것은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자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죽은 자들의 임금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선악과로 생명과를 가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선악의 동네에 있으면 하나님은 두려운 분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분주히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치마를 해 입이도 두려움을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껏 두려움을 쫓아 낼 수도 없는 치마를 만드는 헛수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야 어찌 한 집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분가시켜 버린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살려면 먼저 선악과가 몰고 온 눈을 버려야 합니다.

아담의 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이라는 비늘이 떨어지면 그 때 에덴으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 눈에 율법의 비늘을 여자의 후손이 벗겨 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아담의 눈에 비늘을 벗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으면 그 첫째 현상이 눈에서 율법의 비늘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율법의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까 본래의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본래의 눈은 은혜의 눈입니다.

은혜의 눈으로 보니까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