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칼럼

선악과가 몰고 온 다른 눈

정낙원 2018. 1. 14. 15:19

◆ 선악과가 몰고 온 다른 눈 ◆

 

에덴동산에는 성질이 전혀 다른 두 과실이 있습니다.

두 과실을 두 언약을 상징합니다.

두 언약은 옛 언약과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입니다.

  

두 언약은 두 의(義)로 나타납니다.

의도 사람을 살리는 의가 있고, 사람을 죽이는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살리는 의이고, 인간의 의는 죽이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이고, 인간의 의는 율법 지킴의 의입니다.

 

인간은 의를 담는 그릇입니다.

어떤 의를 담느냐에 따라서 살리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죽이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가지면 살리는 일을 하지만,

인간의 의를 가지고 있으면 죽이는 일을 하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은혜이고, 인간의 의는 법입니다.

은혜는 살리고, 법은 죽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사는 사람은 살리는 삶을 살고,

인간의 의로 살아가는 사람은 정죄하고 심판하며 죽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생명과 속에는 은혜가 담겨 있고, 선악과 속에는 법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은혜의 사람으로 강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법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아담은 자기의 생각과 법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조차 판단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뜻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물 속에는 생명과도 있고, 선악과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선악과도 아름답고, 생명과도 아름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이란? 하나님과 같은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발가벗음이 부끄러움으로 보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생각을 갖기 시작하자,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인간의 눈에는 악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기 방식으로 뜯어 고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발가벗은 몸에 치마를 해 입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고, 눈이 나쁘면 몸도 어둡습니다.

몸은 눈에 따라서 밝음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어둠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결국 어떤 눈이냐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지면 밝음으로 발가벗음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선악의 눈을 가지면 어둠으로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입니다.

 

자기 생각에 수치라고 여겨지면 가려야 합니다.

가리지 않으면 본인이 불편해서 못 견딥니다.

그 불편함을 자기 방식으로 해소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담이 치마를 만들어서 수치를 가리는 행위는 곧 인간들의 신앙생활과도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기 뜻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에덴동산 바깥에서는 가인의 제사로 나타났습니다.   

가인은 선악의 법아래서 난 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가인은 피 없는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피란? 나를 대신하여 죽어 주신 대속 제물의 희생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말합니다. 

가인은 자기 의로 나아갔고,

아벨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나아간 것입니다.  


제사의 옳고 그름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보다 제사를 받는 분에 의하여 결정이 됩니다.

가인은 제사를 받는 하나님의 의중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사를 드린 자기 가치를 더 중요시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처사에 반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일보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앎이 먼저라고 합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느냐는 중요치 않고 자신이 행한 일에 의미를 둡니다.

자기의 의미를 지키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긍휼에는 관심이 없고 제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빠진 제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가인처럼 하나님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고 묻습니다.

이는 어떤 눈으로 보느냐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느냐!

인간들의 눈으로 보느냐! 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럼 아담처럼 자기 방식으로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를 죄라고 합니다.

 

죄란? 하나님과 다른 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네편 내편 판가름으로 나타납니다.

 

선악과가 몰고 온 다른 눈은 심판하는 법의 눈입니다.

법 아래 있으면 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은혜 아래 있으면 긍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눈은 은혜와 사랑의 눈인데 선악과의 눈은 정죄하고 심판하는 눈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일보다 앎이 먼저입니다.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난다고 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를 소경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너희가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의 물음을 계속됩니다.

아담처럼 내가 수치를 가려야 한다고 보여지면 일평생 동안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걸 하나님 앞에 선으로 내어 놓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선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눈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이 구원을 받고 난 후 눈에 비늘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같은 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의 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떠 눈을 가지셨나요?

나는 지금 어떤 눈으로 보고 있나요?

그리고 무엇을 토하여 내고 있습니까?

 

은혜인가요?

법인가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나요?

정죄하고 죽이는 일을 하고 있나요?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알라고 하셨습니다.


열매는 나무의 본질입니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나요?

내가 토하여 내는 행함이 곧 내 신앙의 열매이며 내 신앙의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