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강.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행한 복과 저주의 의미(창 49장 1~28절)
창 49:1-33절.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13.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19.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20.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21.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24.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25.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27. 베냐민은 물어 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 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의 임종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하나 하나에게 후일에 당할 일들을 예언하면서 축복을 합니다.
어떤 자식은 복의 모습으로 축복하고,
어떤 자식에게는 저주의 모습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는 숨을 거두고 열조로 돌아갑니다.
오늘은 야곱이 자식들을 축복하는 내용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이는 세계가 있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나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걸 천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고, 땅은 보이는 세계입니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니,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상이고, 보이는 세계는 허상이 되는 것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가 원본이고, 보이는 이 세상 나라는 복사본이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육이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영이라고 합니다.
육은 영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영은 하늘로서 실상이고,
육은 땅으로서 허상인 것입니다.
이걸 성경에서 구약과 신약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은 보이는 세계이고,
신약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합니다.
구약은 육적 이야기이고,
신약은 영적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에서 언약하신 것을 보이는 이 세상에 펼쳐보이는 이야기입니다.
창세전에 하신 언약을 역사 속에서 드라마처럼 하나님이 연출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창세전 언약이라는 대하드라마입니다.
드라마에 주인공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드라마의 줄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는 말은 자기 백성들이 어디엔가 가두어져 있거나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고 마귀에게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야’라고도 하는데 이는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죄와 사망에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사망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로부터 찾아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라는 역사를 히스토리(History) 즉 그의 이야기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구속사라는 드라마가 되려면 적군과 아군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편에 있고,
마귀에게 속한 편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우들을 캐스팅하여서 두 진영에 속한 자들로 나누어서 드라마를 찍어가시는 것입니다.
드라마 속의 내용은 주인공과 그 반대편 두 편으로 나누어 전개됩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배우들이 있고 그 반대편에 있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이 둘이 팽팽하게 긴장감 있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드라마의 결말은 주인공이 승리하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러한 결과로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 속에 상선벌악 한다는 사상을 담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모든 인간들 속에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사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상선벌악이라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이 인간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세계를 상징하는 공산주의자들도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상선벌악의 사고로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 이야기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쉬운 말로 그림자는 리허설이고 실상은 본 공연입니다.
그럼 구약은 리허설이 되고 신약은 본 공연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들을 미리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속에는 이중 계시가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에 종과 아들이 있습니다.
어떤 잘못이 있으면 아들은 징계하여서 고치지만 사생아는 집에서 쫓아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아들의 징계 차원에서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종처럼 저주받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광야에서 백성들을 선동해서 모세를 반역한 고라 일당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고라 일당이 모세를 대적하자 땅을 벌리게 하여서 그들을 삼켜버립니다.
이는 지옥에 넣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실제로 지옥에 간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불평하는 자들은 죽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반역하는 것과 불평하는 것은 다릅니다.
반역하는 것은 마귀적인 것이지만 불평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짓는 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죽임당한 백성들 이야기는 죄에 대하여 우리 옛 사람이 죽임당하는 것을 보여주는 징계의 사건이 되지만, 고라 일당처럼 모세를 반역한 사건은 마귀가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야기로서 저주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유념해야 할 것은 구약에 일어난 일들을 투 트랙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실상과 허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은 사건 속에도 징계와 저주의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 장차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성경 전체를 축약하고 있습니다.
천지창조로 시작해서 요셉이 입관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요셉이 누구인가요?
요셉은 형제들과 다른 방식으로 태어납니다.
형제들은 부정모혈로 태어났지만 요셉은 합환채를 먹고 낳아진 자입니다.
이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부정모혈로 태어난 것은 육이지만 합환채를 먹고 태어난 것은 영입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아 버립니다.
실제로는 구덩에 던져서 죽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육으로 난 자가 영으로 난 자를 죽인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버림당한 자가 버린 자들을 용서하고 살려냅니다
성경은 육으로 난 자가 영으로 난 자를 죽이고,
반대로 영으로 난 자가 육으로 난 자를 살려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요셉이 자신을 버린 형제들을 기근으로부터 살려내고 입관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입관이란? 궤 속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그 궤는 법궤를 예표하고 법궤를 의인화하면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럼 요셉이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죽음을 안식하는 것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창세전이라는 태초에 계시던 하나님이 역사라는 천지 속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창세기 이후의 성경은 창세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창세기 이야기를 확대해서 세밀하게 펼쳐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모든 성경은 각 권마다 구속사를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연결되어 드라마처럼 연속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쉬운 말로 창세기 한 권만으로도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다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연속극처럼 연결이 되는 겁니다.
이게 성경의 신비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쓰셨고 편집을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죄 아래 가두어지는 언약이 있고 죄에서 건짐 받는 언약이 있습니다.
즉 버려지는 언약과 되찾음의 언약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죄 아래 가두어지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죄에서 검짐을 받는 언약입니다.
두 언약은 죄로 인하여 버려진 자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구약에서 언약의 후손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을 통하여서 보여주었어요.
요셉이 형제들의 주가 되고 만유의 주가 되는 꿈을 꿉니다.
이에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버려짐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마귀에게 미혹당하여 예수님을 죽인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근을 통해서 버림받은 요셉이 자신을 버린 형제들을 살려내게 하십니다.
이건 버림당한 자가 버린 자들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 이야기에요.
예수님도 자신을 죽인 유대인들을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는 버림당한 요셉이 자신을 버린 형제들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마감을 합니다.
버림당한 자가 버린 자를 용서함으로서 언약이 완성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이러한 그림을 야곱의 12 아들과 12 지파로 확대가 되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으로 확대하여서 그려나가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위하여 선택된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언약을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는 버리는 역할을 하는 자와 버림당하는 역할을 하는 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축복과 저주라는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복과 저주라는 두 가지 속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다가 복의 사람과 저주의 사람을 두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복과 저주라는 두 트랙으로 흘러온 역사입니다.
이 일을 위해 야곱의 12 아들이 동원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이 동원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자식들에게 후일에 당할 일을 예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야곱이 12 아들의 운명을 예언하면서 복 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로 나누어서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세요.
창 49:1-2절.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야곱이 자식들에게 후일에 당할 일을 말하고 있지요.
이건 예언입니다.
후일(베아하리트 하야밈)이란? “날들의 끝에”라는 뜻입니다.
이는 세상 마지막 때 나타날 일이라는 뜻입니다.
후일에 당할 일이란 곧 장차 일어나게 될 사건을 예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언은 점진적으로 진행이 되고 심층적으로 구체화 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후일에 일어날 일들이란 일차적으로는 야곱의 자식들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이면서 점진적으로는 구약의 종말과 신약의 종말까지도 중첩되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볼 것은 야곱이 자기 자식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을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야곱 개인의 자식들에 대한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유언은 아닌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누구를 잘살고 누구는 못살고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건 자식들 개인사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라는 드라마를 찍어가기 위하여 야곱의 12 아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서 각각에게 배역을 맡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말이 축복이지 내용을 보면 저주에 가까워요.
잘 보시면 어떤 자식에게는 축복을 하고 어떤 자식에게는 저주를 합니다.
복 다운 축복은 유다와 요셉만 받아요.
르우벤에게는 너는 성질만 급했지 지혜롭지 못해서 서모와 상간을 하여서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자라고 합니다.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이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라고 합니다.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혈기가 방자하여서 일하는 소의 발목의 힘줄을 끊는다고 합니다.
이건 형제들을 죽이는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단은 길의 뱀이고 첩경의 독사로서 말 탄 자들을 뒤로 넘어뜨리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은 물어 뜯는 이리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복이 아니고 저주입니다.
이걸 문자적으로 유다와 요셉은 축복을 받았고 나머지는 저주를 받았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야곱의 열두 아들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보여주는 그림을 그려가기 때문입니다.
28절을 봅시다.
28절.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 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다고 하지요.
문자적으로 보면 르우벤이나 레위와 시므온 그리고 단과 베냐민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들을 축복하였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보여주는 드라마에 배우로 캐스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배역만 다를 뿐 모두가 하나님이 연출하는 드라마에 캐스팅된 배우들이기 때문에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은 복의 민족이예요.
복의 민족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복이에요.
그 속에서 비록 저주의 모습이 담겨 있더라도 복인 겁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열두 아들을 가지고 장차 이 땅에서 펼쳐질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감독이 되어서 야곱의 열 두 아들에게 각각의 배역을 맡긴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역사에요.
이건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어 가실 것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이야기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하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드라마를 찍기 위해서 배우로 캐스팅이 된 것입니다.
제일 먼저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람을 캐스팅하였어요.
그리고 그 후손들을 가지고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구원받을 자와 버려짐을 당할 자를 보여주는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겁니다.
감독이 배우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맡긴 겁니다.
감독은 드라마의 시나리오을 받으면 먼저 각각의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들을 골라서 캐스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연과 조연 그리고 엑스트라를 섭외합니다.
심지어 길가에 걸어가는 나그네까지도 섭외를 해요.
당신은 주인공 편에 서 있는 역할 해 주시고,
당신은 주인공 편에 선 자들을 괴롭히는 악역을 해주세요 라고,
각각 역할을 맡긴 것입니다.
드라마 속에 있는 모든 배우들은 영광인 거예요.
다 끝나면 개런티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악역을 한 자에게도 개런티를 주고 주인공에게도 개런티를 준단 말이죠.
두 가지를 아셔야 해요.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전쟁은 마귀와의 전쟁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안에서 일어나는 각가지 사건들이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 안에서 일으키는 영적 전쟁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을 가지고 두 편으로 나누어서 벌리는 싸움 이야기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전쟁과 같은 것입니다.
이걸 군사 훈련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군사 훈련을 하는 것은 적군과 싸우기 위해서 훈련을 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아군과 적군으로 편을 나누겠지요.
같은 편인데 훈련을 위해서 아군과 적군으로 나눈 것입니다.
훈련이 끝나면 다시 원래대로 같은 편이 되는 겁니다.
북한군을 데리고 와서 훈련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나라 군대를 가지고 두 편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각기 다른 완장을 주면서 너는 아군이고 너는 적군이고 구분을 시키는 겁니다.
비록 훈련이지만 실전처럼 시키기 위해서 당근과 채찍을 보상으로 거는 겁니다.
이긴 자에게 든든히 먹이고 포상 휴가를 주고,
진 자에게는 연병장 열 바퀴 돌고 화장실 청소시키는 것으로 책벌합니다.
편이 나누어지면 모의 훈련을 합니다.
훈련이지만 실전처럼 해요.
그래야 실력을 향상시키는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훈련이지만 실전처럼 하라고 하지요.
그럼 실전인가요?
모의인가요?
모의에요.
그런데 실전처럼 해야 해요.
모의 훈련하는데 진짜 실탄을 주나요?
가짜 실탄을 주나요?
가짜 실탄을 주지요.
진짜 실탄을 주면 어떻게 되겠어요.
다 죽이겠지요.
다 죽이면 훈련이 아니고 실전이 되겠지요.
그래서 훈련 때는 진짜 실탄을 주지 않고 가짜 실탄을 주는 겁니다.
물감을 탄 비비탄을 줘요.
그건 뭐냐?
가짜 실탄이지만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실탄이에요.
훈련을 왜 하는가요?
장차 일어날 전쟁을 대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일어날 실제 전쟁을 위해서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열 두 아들을 편을 나누는 것입니다.
한쪽은 예수그리스도 편에 속하였고 다른 한 쪽은 마귀(적그리스도)편에 속하였어요.
서로 대립하는 구조로 나눈 것입니다.
인류 역사가 이렇게 시작이 되었어요.
최초로 나타난 것이 아담의 집안에 가인과 아벨로 나타났습니다.
가인은 마귀 편에 속하였고,
아벨은 예수그리스도 편에 속하였어요.
가인과 아벨은 실전이면서 예표인 겁니다.
이건 역사가 이렇게 진행이 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를 아브라함의 집안에 예표적으로 셋팅을 해 놓았어요.
이스마엘은 마귀 편에 속하였고
이삭은 예수그리스도 편에 속하였어요.
이삭의 집안에도 마찬가지에요.
에서는 마귀 편에 속하였고 야곱은 예수그리스도 편에 속하였어요.
야곱의 집안에서도 요셉과 그 형제들로 나누어졌어요.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되어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타났어요.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실제가 되어서 육적 이스라엘(표면적 유대인)과 영적 이스라엘(이면적 유대인)로 나누어졌어요.
이것이 온 세상에서는 기독교와 반기독교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장차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기 위하여 12 아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서 각각의 역할을 맡긴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온 세상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요.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역사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3-17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하지요.
그가 누구인가 하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만물을 그가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왜 창조했는가 하면 그를 위해서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을 위하여 만물을 만드신 겁니다.
예수님이 만물의 주인공이에요.
예수님을 약속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는 뜻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무리를 택하셨다고 해요.
이는 두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한 무리를 택하셨다는 말은 선택을 입은 자가 있고 선택을 입지 못한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를 펼쳐가기 위해서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시작부터 끝까지 두 편으로 나누어서 전쟁하는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시나리오와 같아요.
그런데 창세전 언약 속에는 이란성 쌍둥이 언약이 있어요.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이 있고 죄에서 건져내는 언약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 구약과 신약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영적으로 보면 구약은 망하는 역사이고, 신약은 흥하는 역사입니다.
망하는 역사를 옛 언약이라고 하고, 흥하는 역사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쌍둥이 언약입니다.
마치 에서와 야곱처럼 말이에요.
옛 언약을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이에요.
그런데 이 둘이 하나에요.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언약은 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죽이는 예수가 있고, 살리는 예수가 있습니다.
죄 아래 가두는 예수가 있고, 죄에서 건지는 예수가 있어요.
초림으로 오신 예수는 구약 교회를 멸망시키려고 오셨고,
재림으로 오시는 예수를 신약 교회를 구원 하시려고 오십니다.
구약 교회는 옛 언약에 속하였고,
신약 교회는 새 언약에 속하였습니다.
구약 교회는 율법에 속하였고, 신약 교회는 은혜에 속하였어요.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낮과 밤처럼 하나에요.
둘 다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옛 사람과 새 사람 같아요.
우리도 쌍둥이에요.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이란성 쌍둥이에요.
서로의 본질이 달라서 맨날 싸워요.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구약 사람이고, 새 사람은 신약 사람이에요.
그런데 둘이 하나에요.
구약과 신약을 다르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하나예요.
하나인데 서로의 기능이 다를 뿐이에요.
서로 다른 기능으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겁니다.
구약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죽이는 그림이고,
신약은 생명과를 먹여서 살리는 그림이에요.
육체로 오신 예수는 선악과를 먹은 죄인을 죽이는 일을 하셨고,
부활 후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생명과를 먹여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리는 일을 하셨어요.
옛 사람을 죽이는 예수가 있고, 새 사람으로 살리는 예수가 있어요.
서로 짝이 되어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속성이 있어요.
사랑의 하나님도 되시고, 질투하는 하나님도 되세요.
축복하는 하나님이기도 하고, 징계하는 하나님이기도 하세요.
구원하는 하나님도 되시고, 저주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펼쳐가시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야곱처럼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가 있고,
에서처럼 미움받기로 작정 된 자도 있어요.
사랑받는 자에게 하나님은 사랑을 주시고,
저주받을 자에게는 하나님은 저주를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천국을 만드시기도 하셨지만 지옥도 만드셨습니다.
천국의 주인도 하나님이고 지옥의 주인도 하나님인 겁니다.
이 모습은 모든 국가에 셋팅이 되어 있어요.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이 공존해요.
그래서 나라마다 악인들을 가두는 교도소가 있는 겁니다.
교도소는 나라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장소로서 필요 악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요.
세상 통치자는 사회의 안녕을 위해서 공공의 절서를 헤치는 자들은 법으로 강제하여야 하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는 어떨까요?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나왔다고 하였지요.
즉 이 세상은 하늘의 것을 본 따서 만들어진 곳이에요.
하늘도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고 이 세상도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유의 주라고 하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을 보세요.
골 1:16-17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잘 보세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늘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나 땅에 보이는 것들 모두가 예수님의 통치 안에 있다고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뭐라고 하는가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지요.
천지란? 하늘과 땅이에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세요.
예수님이 육체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유대인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고 있어요.
표면적 유대인은 이면적 유대인을 보여주는 그림인 겁니다.
그런데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땅의 왕뿐만 아니라 하늘의 왕도 되신 겁니다.
이를 만왕의 왕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만유의 주라고도 하는 겁니다.
에스겔 28장을 봅시다.
겔 28:2/12-19절. “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체 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 ~ 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 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목도하는 모든 자 앞에서 너로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교만한 두로 왕을 타락한 천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두로 왕이 교만하여 자신을 신이라 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고 하지요.
그러자 하나님이 야 이놈아 너는 신이 아니고 피조물이야,
피조물 주제에 신 노릇을 하고자 하느냐,
그래서 하나님이 혼을 내는 겁니다.
이건 타락한 천사 이야기에요.
천사는 신이 아니고 피조물이에요.
우리하고 똑 같아요.
우리는 보이는 세계에 속한 육적 피조물이고,
천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영적 피조물인 겁니다.
13절을 보세요.
하늘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 있다고 하지요.
거기에 천사들이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 일부가 타락하였어요.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신들이 차지한 겁니다.
이걸 죄라고 해요.
타락한 놈들을 땅에 던졌다고 합니다.
이를 음부라고 하고 지옥이라고도 하는 겁니다.
지옥이란? 땅에 있는 감옥이란 뜻이에요.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를 사단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저주받은 세상 즉 지옥을 사단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을 이 세상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놈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그러잖아요.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자기 땅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내게 절을 하면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이는 이 세상은 사단에게 위임을 하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어요.
쉬운 말로 하나님이 사단을 죄인들을 가두는 교도소 소장으로 두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어요.
심판이란? 갈라내는 것을 말해요.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이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 마지막 때가 되면 바다에 던진 그물 속에 들어온 각종 고기들을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못된 고기는 버린다고 하시지요.
즉 좋은 고기는 천국으로 데리고 가고, 못된 고기는 지옥에 둔다는 뜻입니다.
지옥에 가는 자들을 못된 고기라고 하지요.
못된이란? ‘사프로스’ 라고 하는데 이는 ‘썩은’ ‘부패한’ ‘쓸모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건 죄인을 말해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뜻해요.
좋은 고기도 그물에 있고 못된 고기도 그물에 들어 있어요.
그물 속에는 하나님 백성도 있고 마귀 백성도 있는 겁니다.
이건 한 국가 안에 좌파도 있고 우파도 있는 것과 같아요.
이 세상에 모든 질서는 두 편으로 나누어져서 움직여지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 자체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펼치는 도구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심판 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 너희와 저희로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극과 극으로 성질이 달라요.
근데 이 둘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곳이에요.
하나님은 이 천지를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했던 일들을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게 확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가지고서 어떻게 일을 해 나가느냐?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와 저희를 갈라내는 일들을 구약의 야곱의 열 두 아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서 모의 훈련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야곱이 아들들에게 저주를 하였다고 해서 실제로 저주받은 것이라 생각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레위 지파를 예를 들어 봅시다.
5절~7절 보세요.
창 49:5-7절.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야곱이 레위에게는 저주를 하였어요.
이스라엘아 이 놈들은 잔해하는 기계이니 그들의 모의에 상관 말고 그들이 집회에 참예하지 말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이 놈들은 저주 받은 조폭 집단이니까 상종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하나님의 집을 맡아 관리하도록 하였어요.
하나님의 집은 천국을 말해요.
레위 지파를 제사장 지파로 삼았어요.
이건 복인가요?
저주인가요?
당연히 복이지요.
단 지파를 봅시다.
17절.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단은 길가의 독사 같아서 말의 뒤 꿈치를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한다고 하지요.
이 말은 성도들을 시험 들게 하여서 넘어뜨리는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단 지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좋은 일을 해요.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 성소 안에 쓰여지는 각종 보석들을 단 지파 사람들이 만들었어요.
단 지파인 오홀리압은 성령이 감동되어서 보석을 세공하는 일들을 하였어요.
성소의 보석은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12가지 보석으로 지어진 하늘 예루살렘 성으로 나타나요.
단 지파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냐?
삼손이에요.
삼손이 저주받았나요.
아니에요.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어요.
반대로 유다 지파는 복 받은 지파죠.
그런데 이들이 예수를 죽여요.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누구인가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손들이잖아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누구인가요?
유다 지파에요.
이들이 유대인들이에요.
그런데 이 놈들이 예수를 죽였어요.
그러니까 야곱이 12 아들을 축복한 것으로 누구는 저주받았고, 누구는 축복을 받았다 라고 단정을 지어서 말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파는 복을 받았고 저 지파는 저주를 받았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12지파를 둘로 나누어서 드라마를 찍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을 일컬어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기능을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을 입은 자들이에요.
하나님이 펼쳐가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에 캐스팅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인 겁니다.
선민사상에 젖어 있을 만하지요.
그런데 이들도 예수님이 오시고 나자 육으로 드러났어요.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해요.
하나님 나라는 영으로 낳아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영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이라야 천국에 가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이방인과 비교하면 구약 이스라엘은 선민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유대인 속에서 예수 안 믿는 자들은 모두가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육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예수 중심으로 둘로 갈라서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원하고 심판하는 일들을 구약의 이스라엘을 가지고 리허설을 한 것입니다.
구약은 신약을 연습하는 거에요.
모의 훈련을 한 겁니다.
구약은 훈련이고 신약은 실전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아브라함을 선택했어요.
아브라함 언약 속에는 창세전 언약의 씨눈처럼 담겨 있어요.
언약을 어디서 맺나요?
가나안이지요.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오지요.
그리고 할례를 시키고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줍니다.
그리고 이삭을 낳습니다.
아브람으로 낳은 아들이 있고,
아브라함으로 낳은 아들이 있어요.
옛 사람 아브람은 애굽 여인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어요.
이건 육으로서 종을 상징해요.
새 사람 아브라함은 정실부인인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낳았어요.
이건 영으로서 아들을 상징해요.
창세전 언약은 쌍둥이라고 했지요.
그 속에 죄 아래 가두어지는 언약이 있고 죄에서 건짐받는 언약이 있다고 했잖아요.
죄 아래 가두어지는 언약은 옛 언약으로 종의 언약이고,
죄에서 건짐받은 언약은 새 언약으로서 아들의 언약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아브라함의 두 아내를 두 언약이라고 하였어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22-31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아브라함에게 두 아내가 있습니다.
본 처인 사라와 애굽의 종인 하갈이 있습니다.
두 아내를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갈은 옛 언약인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라 하고,
사라는 새 언약인 하늘 예루살렘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갈에게서 낳아진 이스마엘은 율법으로 낳아진 아들이므로 집에서 쫓겨나는 종이고,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은 은혜로 낳아진 자이므로 유업을 이을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아내라고 하지요.
이건 종은 천국을 유업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아들에게만 주어져요.
이러한 구조는 아브라함 후손 대대로 이어져가요.
이삭의 집안도 마찬가지에요.
이삭에게도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이 있어요.
둘이 극명하게 달라요
에서는 옛 언약을 보여주고,
야곱은 새 언약을 보여주어요.
에서는 혼자 힘으로도 잘해요.
이건 자기 의로 살아가는 옛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의 모습이에요.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옛 언약이에요.
새 언약은 뭔가요?
엄마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종용한 자로서 혼자 힘으로 살아가지 못해요.
엄마가 곁에서 늘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게 새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의 모습이에요.
야곱의 집안도 마찬가지로 셋팅이 되어 있어요.
레아의 후손과 라헬의 후손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은 원래 동생인 라헬을 사랑했어요.
라헬을 얻기로 계약을 하고 7년 종살이를 하였어요.
7년이 되어서 결혼을 했는데 라반이 라헬을 안 주고 언니인 레아를 준 겁니다.
야곱이 왜 라헬을 안 주고 레아를 주느냐고 따지자 이 동네 법이 동생이 언니 먼저 시집가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율법이 먼저 주어지고 은혜가 나중에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 법칙과 같아요.
언니 레아는 율법을 상징하고 동생 라헬은 은혜를 상징해요.
암튼 야곱은 자신의 원함과 상관없이 그 동네 법도에 의해 언니인 레아를 먼저 얻습니다.
그리고 1주일 후에 라헬을 줍니다.
일주일 만에 두 아내를 얻은 것입니다.
이건 창조 7일 만에 두 언약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은 역사 전체를 의미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레아는 7년 종살이하고 난 후에 얻은 아내가 되고,
라헬은 먼저 얻고 나서 종살이를 한 것입니다.
이건 구약과 신약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구약은 레아처럼 종살이 하고서 구원을 받는 것이고,
신약은 라헬처럼 구원을 받고 난 후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레아의 아들이 라헬의 아들을 죽이지요.
형제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리잖아요.
이건 육적 아들인 유대인들이 영적 아들인 예수님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기근이 닥치자 버려진 아들이 자신을 버린 아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에요.
신약에 오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버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레아의 후손처럼 예수님을 죽여 버리지요.
예수님은 라헬의 후손인 요셉처럼 버려졌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자신을 죽인 유대인들을 용서하고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되어서 또 갈라져요.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갈라져요.
북쪽 이스라엘은 늘 남쪽 유다를 괴롭혀요.
북쪽 이스라엘을 보면 선한 왕이 하나도 없어요.
전부 악한 왕들 뿐이에요.
이건 육을 상징해요.
하나님 앞에 육은 전부 악한 것이에요.
북 이스라엘은 종의 모습이고,
남 유다는 아들의 모습이에요.
예수님께서 남쪽 유다 지파로 오셔서 북쪽 이스라엘을 살려내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북쪽 이스라엘 땅에서 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을 어디서 하나요?
남쪽 유다에서 했지요.
베들레헴이 남쪽 유다 지역이잖아요.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고 갈릴리에서 살았어요.
출산할 때가 가까워지자 온 세계에 호적하는 영이 내립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하러 고향으로 가다가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낳았어요.
이건 하나님이 예수를 남쪽 유다에 태어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남쪽 유다가 언약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북쪽 이스라엘은 이방인 취급을 하였어요.
왜냐하면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을 당하고 난 후 앗수르의 혼혈 정책에 의하여 아브라함 혈통의 정통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암튼 예수님은 태어난 것은 남쪽 유다에서 태어나고 자리기는 북쪽 이스라엘에서 자랐어요.
애굽으로 피신 갖다가 돌아와서 북쪽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살았어요.
예수님의 사생에는 북쪽이고 공생애는 남쪽에서 한 겁니다.
공생애는 남쪽 유다에서 시작합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잖아요.
요단강이 남쪽 유다 지역이에요.
그런데 공생애 사역은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주로 하였어요.
예루살렘은 이 따금씩 올라갔어요.
남쪽 유다 사람들은 북쪽 이스라엘을 버려진 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이 갈라질 때 여로보암이 10지파를 데리고 북쪽을 차지하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남쪽 유다에서 출생하신 예수님이 버려진 자들이 살아가는 땅에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하늘나라에 계신 예수님이 죄악된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을 예표하는 그림인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북쪽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환영하는데 남쪽 유다에서는 반발을 했어요.
이것은 이방인은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그림을 그리실까요?
이는 창세전 언약이 먼저 주어지는 옛 언약은 타락하고 나중에 주어지는 새 언약으로 구원이 주어지기 떄문입니다.
이 그림이 약속을 먼저 받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였는데,
약속을 나중에 받은 이방인들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으로 나타난 겁니다.
성경은 하늘에 계시던 예수님이 이 세상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에요.
구약은 예수님 오시기 전이에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었어요.
그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세요.
그 온 세상을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속에 담아 놓은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는 구원받을 자와 버려짐을 당할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그림자로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지고 모의 훈련을 하신 겁니다.
모의 훈련은 실전을 대비해서 하는 훈련이잖아요.
실전은 언제부터인가요?
예수님이 오시면 실전이 되는 거예요.
신약은 실전이므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실제로 복을 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로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신약을 구약처럼 생각하면 안 돼요.
구약은 모의 훈련이기 때문에 같은 편을 가지고 적군과 아군을 나누어서 보여준 것이지만,
신약은 실전이기 때문에 실제로 적군과 아군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오셔서 실제로 너희와 저희로 갈라내셨어요.
너희는 예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자들이고 저희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은 자는 영적 이스라엘이 되고 선택을 입지 못한 자들은 육적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택을 입지 못한 자들이 선택을 입은 자들을 핍박을 해요.
즉 육적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겁니다.
이것은 구약 속에 수많은 모의 훈련으로 그려진 그림이에요.
예수님께서 선택한 자들은 누구인가요?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마지막 때 살려내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아버지께서 내게로 이끌지 아니하면 내게 올 자가 없다고 하였어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건 창세전에 예정을 하신 겁니다.
창세전에 이미 너희와 저희로 예정을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 라는 이름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일을 하세요.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 는 뜻입니다.
자기 백성이라 함은 자기 백성 아닌 자들도 있다는 뜻이에요.
모든 인간이라고 한다면 굳이 자기 백성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어요.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에는 예수에게 속한 자와 속하지 않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로 믿어지게 하셨어요.
이들을 일컬어 창세전에 영생주시기로 작정을 하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 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백퍼센트 하나님이 하세요.
인간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래서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구약 마당에서는 이스라엘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것은 조상에 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셨습니다.
네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이리로 올라와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어요.
하나님이 이 언약을 가나안에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천국을 상징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가서 아브라함과 약속한 기간 동안 종살이하다가 약속하신 그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건 우리가 창세전에 하나님 나라에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로 이 세상에 보내심을 입은 것과 같아요.
우리는 죄악된 세상 속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지게 하여서 창세전의 그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다시 모의 훈련과 실전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구약은 훈련이고 신약은 실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약이 더 무서운 것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너희들이 말로는 인자를 거부해도 용서를 받지만,
성령을 거역하면 용서 받지 못한다고 하셨어요.
이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도 두 예수가 있잖아요.
육체로 오신 예수가 있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가 있잖아요.
육체로 오신 예수는 영접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성령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요.
구약은 육이고 신약은 영이에요.
육체로 오신 예수는 구약이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신약이에요.
구약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는 성령이 와서 믿어지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도 두 사역이 있어요.
겉에서 일하시는 성령이 있고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이 있어요.
구약은 성령이 겉에서 일을 하셨어요.
그러나 신약의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일을 하세요.
제자들이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자 다 도망을 갔어요.
이건 육의 시대를 보여주는 그림이에요.
성령이 임하고 난 후 예수가 믿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건 제자들의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하니까 모두가 예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끝까지 구원을 이루어가지만,
스스로 믿겠다고 하는 자들은 씨뿌리는 비유의 밭들처럼 시험이 들거나 이생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과 일락으로 인하여 중간에 다 떨어져 나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난 믿음과 아래서 난 믿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환란에 넣는 것입니다.
이걸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하고는 물 가운데로 지나게 하고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환란이 닥치면 믿는 척 하는 자들은 다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편안할 때는 몰라요.
다 믿음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러나 시험이 오고 환란이 닥치면 그 본질이 드러나요.
이게 구약에서 가나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12지파의 족장들 모습으로 보여주었어요.
10지파 족장들은 환경을 보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어요.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았던 여호수와와 갈렙만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광야에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과 자기 의지와 각오로 믿는 것으로 나타나요.
우리는 구약이라는 그림 언어를 가지고 신약의 실상을 보는 겁니다.
하나님은 신약에 관심이 있어요.
왜냐하면 신약이 영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혈통으로 받나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나요?
믿음으로 받지요?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줄 때에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나요?
속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자랑하지 말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여기 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 만들수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
혈통으로는 구원받는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9-13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이 참 빛으로 오셨는데 아무도 영접하지 않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육으로는 안 되고 영으로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는 자들만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혈통이라야 구원을 받았어요.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이라야 구원을 받았어요.
구약의 아브라함은 신약의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구원은 예표적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 구원은 구약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 믿음으로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예수 믿음으로만 구원을 하세요.
그런데 구약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잖아요.
구약은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니까요.
구약은 그림자고 신약은 실상이라고 하였지요.
구약 마당에 예수님의 그림자로 아브라함을 세우신 것입니다.
구약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구원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죽으면 열조로 돌아간다고 한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열조는 아브라함 품이에요.
아브라함이 후손들을 품에 안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무덤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때를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예표적인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야 실제로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럼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의 구원이 실제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일어났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자 무덤이 열리고 자던 자들이 일어나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을 하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성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의 언약의 후손들이 있는 무덤에 죄사함의 피를 뿌린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자들의 죄가 사해진 것입니다.
사망은 죄 없는 자를 가둘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피가 뿌려지면 죄사함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사망을 잡은 자는 예수님의 피가 뿌려진 자들을 내어 주어야 하는 겁니다.
죄없는 자는 죽음에 가둘 수 없고 살려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죽을 때 무덤이 열리고 자던 자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구약은 예표라고 했어요.
구약의 이스라엘 속에서도 표면적 이스라엘이 있고 이면적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그것을 약속으로 난 자와 육으로 난 자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이중 계시가 담겨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께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가 있는 겁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처럼 두 세력으로 배치해 두어서 싸우도록 해 놓은 것입니다.
이건 원수 간의 신앙의 전쟁을 예표하고 있어요.
둘째는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을 담아 놓았어요.
육으로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가 있어요.
마치 요셉과 그 형제들처럼 말이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가지고 인류 전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과 마귀의 백성을 설명하고,
둘째는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을 설명하고 있어요.
어떤 그림은 하나님의 백성과 마귀의 백성 간의 전쟁을 말해주고 있고,
어떤 그림은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간의 갈등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을 잘 보세야 해요.
이스라엘은 인류 대표로 뽑힌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서도 하나님께 속한 자와 속하지 않은 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가지고 구원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로 접근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전체의 구속사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개개인의 구속사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라고 하면 당연히 너희와 저희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안에서도 육으로 난 자가 있고 약속(영)으로 난 자가 있는 겁니다.
육으로 난 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로 나타날 것이고,
약속(영)으로 난 자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쪽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 아 이렇게 하면 망하고 저렇게 하면 살아난다는 것을 시청각 교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멸망 당한 사건을 가지고 경고하고 있어요.
광야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우리에게 거울로 주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거울로 주었다는 말은 보고 배우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지금 어디에다 하고 있나요.
고린도 교회에다 하고 있어요.
고전 10장을 봅시다.
고전 10:1-12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광야에 나온 자들은 모두가 모세에게 속하여서 나왔어요.
신령한 식물도 먹고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나오는 음료도 마셨어요.
그런데 그들 속에 어떤 이들이 악을 즐기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잘 보시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나오지요.
저희가 있고 어떤 이들이 있어요.
이는 백성 중에서 거역하는 자들이 섞여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섞여 사는 무리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들을 본 받지 말라고 하지요.
광야에 나왔다고 해서 다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있고 택하지 않은 백성이 있다고 합니다.
택하지 않은 백성들은 거역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거예요.
왜 이런 말을 고린도 교회에 할까요?
너희들 속에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망한 자들과 같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는 다 구원받은 백성들만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바울은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귀의 백성들과 섞여 있다고 하는 겁니다.
마치 밭에 곡식 속에 가라지들이 있는 것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지요.
밭에 곡식을 뿌렸는데 밤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농부들이 와서 그러잖아요?
주인님 주인님 가라지들이 있는데 뽑을까요?
그러니까 주인이 뭐라고 하나요.
뽑지 말라고 하지요.
둘 다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하지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온 세상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가 하면 마귀의 백성들도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경영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을 섞어 놓은 것입니다.
이건 마치 목자가 양을 치는데 염소를 그 가운데 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는 뜻이에요.
육에 속한 자도 있고 영에 속한 자도 있는 겁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육신의 소욕을 드러내면서 거역하는 일들을 계속 일으키고,
영에 속한 자들은 성령의 소욕을 쫓아가면서 순종하는 모습으로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이 둘은 서로에게 고발자인 겁니다.
왜 동일한 환경 속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있나요?
믿는 자는 믿음을 받았기 때문에 환경과 상관없이 믿는 것이고,
믿지 못하는 자는 믿음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환경에 넘어지는 겁니다.
영으로 난 자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육으로 난 자는 믿는 척 하다가 넘어지는 겁니다.
이게 씨 뿌리는 비유에요.
결실하는 밭과 결실치 못하는 밭이 있어요.
결실치 못하는 밭에 심겨진 씨들은 처음에는 다 믿는 척 하였어요.
그러다가 시험이나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이나 일락에 막혀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중간에 다 죽어요.
그런데 결실하는 밭은 끝까지 견뎌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내요.
두 가지 밭이 있습니다.
농부가 관리하는 밭이 있고 관리하지 않는 밭이 있어요.
농부는 자기 밭에 씨를 뿌렸어요.
씨를 뿌리다가 그 중에 일부가 바람에 흩날려서 길가로 떨어지고 돌 짝에 떨어지고 가시 밭에 떨어진 겁니다.
농부가 관리하는 자기 밭에 뿌려진 씨들을 돌보지만 관리하지 않는 곳에 떨어진 씨들은 돌보지 않아요.
그래서 농부가 관리하는 밭은 끝까지 결실을 하지만 관리하지 않는 밭은 자라다가 중간에 이러저러한 사건으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따르는 자들이 있고,
어떤 이들은 스스로 따르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중간에 떨어져 나간 자들이 있고 끝까지 따른 자들이 있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 안에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고 온 자들도 있고 스스로 온 자들도 있어요.
이건 모든 세대 모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에요.
우리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에요.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교회 안에서 광야의 멸망 사건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겁니다.
광야 사건은 우리에게 거울이에요.
교회 안에 왔다고 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마귀가 바보 아니에요.
마귀가 일하는 곳은 교회이지 세상이 아니에요.
세상은 이미 마귀의 수중에 들어갔어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마귀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 교회에요.
그래서 마귀는 교회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교회 안에다가 짝퉁 들을 심어놓아서 흔들어대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들이 우굴거리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세상에서 일하지 않아요.
교회 안에서 일해요.
이 놈들이 광야에서 멸망 당한 자들의 행사 머리를 그대로 하는 겁니다.
우상숭배식으로 예수를 믿고 세상과 짝하여 간음하고 원망 불평하면서 교인들을 선동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겁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세요.
교회 안에 사단의 회가 있잖아요.
하나님의 가짜를 통해서 진짜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어요.
육에 속한 자는 육적 가치를 쫓아가고,
영에 속한 자는 영적 가치를 쫓아가요.
이건 억지로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러워요.
육과 영은 살아가는 가치가 달라요.
육에 속한 자는 땅에 소망을 두고 예수를 믿고
영에 속한 자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예수를 믿어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도 있어요.
달란트 비유를 보세요.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의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어요.
똑같은 종들이면 똑같은 모습이 나타나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지요.
주인이 있을 땐 누가 충성된 종이고 누가 악한 종인지 나타나지 않아요.
주인이 집을 비워 보면 나타나는 겁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나눠주고 집을 비우니까 각자의 모습이 드러나는 겁니다.
열심히 일하는 종과 게으름을 피우는 종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어떤 종은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여일하게 일을 하고,
어떤 종은 주인이 있으면 하는 척하고 주인이 없으면 안 하는 겁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심판하지요.
달란트를 남긴 종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케 하고,
달란트를 남기지 않은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합니다.
이건 영생과 영벌의 심판인 겁니다.
이건 교회 안의 이야기에요.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종들이 있어요.
자원해서 섬기는 종들이 있는가 하면 시켜야지만 하는 종들이 있어요.
그 속에 예수라는 주인이 있는 종들은 누가 보나 안 보나 여일하게 해요.
그러나 그 속에 예수라는 주인이 없는 종들은 사람들 눈치를 보고 하는 겁니다.
교회 안에도 영적인 신자가 있고 육적인 신자가 있어요
바나바 같은 성도가 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교인이 있어요.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로 섬겼지만,
아나니아 삽비라는 사람의 영광을 위하여 섬겼어요.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뭐라고 하던가요.
왜 성령을 속였느냐고 하지요.
달란트 비유로 말하면 바나바는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여일하게 충성하는 종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주인이 있으면 하는 척하고 주인이 안 보이면 농땡이 치는 종이에요.
교회 안에는 바나바도 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있어요.
어떤 이는 바나바처럼 섬기고,
어떤 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섬겨요.
옛날에 양을 치던 목동이 목사가 되어서 쓴 책을 보았는데,,,
예화로 인용합니다.
낮에 양들을 방목하면서 키운다고 해요.
이 때 꼭 염소도 함께 섞어 놓는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양은 감각이 둔하고 염소는 엄청 예민하다고 합니다.
이리가 나타나면 양들은 둔해서 모르는데 염소는 기가 막히게 안다고 해요.
이리가 나타나면 염소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이 때 양들도 알고 뛴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들이 얼마나 이기주의인지 모른대요.
남들이 편한 꼴을 못 본다고 해요.
예를 들어 날씨가 더우면 흩어져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양들은 흩어져 혼자 있으면 시원하니까 혼자 있는 저 놈도 나처럼 시원하겠구나 하고서는 함께 붙어 있는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저 놈 혼자 시원하게 둘 수가 없으니 같이 붙어서 덮게 만든다는 겁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염소를 풀어서 떨어지게 한다고 해요.
염소가 뿔로 박으면 양들이 아파서 뿔뿔이 흩어진다는 겁니다.
염소가 양들을 붙어있지 못하고 떨어지게 하여서 시원하게 있도록 만드는 겁니다.
추우면 또 반대로 한다고 해요.
추우면 붙어있으면 따뜻하잖아요.
그런데 추우면 붙어있지 않고 떨어져 있다고 해요.
이럴 땐 염소가 한군데로 모으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을 키우는 데는 반드시 염소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게 양 키우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교회 안에 성도들 이야기에요.
우리가 양처럼 민한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 안에 마귀를 두어서 염소처럼 사용하시는 겁니다.
모세가 광야 40년간 양을 쳤지요.
이건 양을 친 게 아니라 하나님 백성 양육하는 걸 모의 훈련으로 배운 겁니다.
왜냐하면 양과 백성들이 성질머리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양을 가지고 모의 훈련을 한 겁니다.
모의 훈련을 마치고 나니까 하나님이 실전을 시킨 겁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40년 동안 인도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40년은 양을 가지고 모의 훈련을 하였고,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지고 실전을 한 것입니다.
모세가 양들을 가지고 훈련한 것은 구약을 상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지고 한 것은 신약을 상징하고 있는 겁니다.
구약은 짐승으로 훈련을 하였고,
신약은 사람으로 실전을 치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은 야곱의 열두 아들을 가지고 모의 훈련을 하셨고,
신약에서는 교회를 통해서 실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마당에서는 야곱의 아들들을 가지고 두 편으로 나누어서 모의 훈련을 하셨지만,
신약에서는 교회 안에서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로 나누어서 실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은 실전이에요.
교회 안에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가 있어요.
육적 신자와 영적 신자가 있어요.
교회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웠다고 하지요.
12 사도 중에는 가짜도 있어요.
마귀의 자식이 있었어요.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마귀의 자식인줄 알고 제자로 세웠어요.
왜냐하면 마귀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교회 안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가룟유다처럼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로 따르는 자들이 있어요.
세상의 유익을 얻고자 따르는 무리들이 있는 겁니다.
이들에게 예수는 우상이에요.
자신을 위하여 예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모의 훈련이 아니고 실전이에요.
모의 훈련은 이기고 지느냐의 싸움이지만,
실전은 죽느냐 사느냐의 전쟁이란 말입니다.
전쟁은 대충대충 하는 게 없어요.
죽기 살기로 해야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니에요.
시간 나면 하는 게 아니고 시간을 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취미생활은 부업이지만 신앙생활은 본업인 것입니다.
본업은 시간 내서 하는 것이고,
취미생활은 시간 나면 하는 것입니다.
농담으로 듣지 마세요.
사도 바울이 구약의 실패담을 말세를 만난 우리들에게 경계로 기록했다고 하지요.
경계란? 농담이 아니고 실제라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가 있어요.
실전처럼 목숨 걸고 하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취미생활로 대충 대충하는 자들이 있는 겁니다.
실제로 살아가는 자는 값을 주고 포도주를 사는 자들이고,
취미생활로 하는 자들은 포도주를 사지 않아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는 바라는 것을 실상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믿음 속에 실상을 담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자들은 실상을 삶으로 그려내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으로 실상을 살았어요.
그것이 언약 때문에 인생이 차압당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말씀이 이끌려서 버려짐을 당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고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산 것입니다.
지금은 짝퉁 시대에요.
거짓이 창궐하는 가짜들의 전성시대에요.
그러다 보니 가짜 교회와 가짜 신자들이 많은 겁니다.
너도 나도 가짜이다 보니 무감각한 겁니다.
한국 교회도 좌파 사상을 가진 교회가 80% 라고 해요.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복음을 알면 좌파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버젓이 스스로 좌파라고 하고 있어요.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나요.
거짓은 다수이고 참은 소수이고 거짓이 참으로 둔갑을 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영적 상태가 예수님의 초림 때와 같아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와 같아요.
말로는 복음 복음하고 천국 천국 하는데,
실제는 반복음적으로 행하고 반천국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시대 교인들은 중풍병자와 같이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요.
신앙생활은 신앙을 삶으로 풀어내는 것이에요.
신앙이란? 믿고 바라는 것이고,
생활이란? 살아가는 삶을 말해요.
야고보서 식으로 말하면 믿음과 행함인 겁니다.
신앙을 믿음이라고 하면 생활은 행함이에요.
믿음과 행함은 함께 일을 해요.
믿음 따로 행함 따로가 아니에요.
믿음이 생명이라고 하면 행함은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던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시지요.
한마디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서 사랑하라는 겁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니고 하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영지주의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영지주의란? 이원론 신앙을 말해요.
가장 쉬운 예로 주일에 교회에 오지 않고 놀러다니는 겁니다.
입으로는 교회를 말하는데 몸뚱이는 세상에서 일락을 즐기고 있는 겁니다.
경건이란? 입으로 말하는게 아니에요.
삶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지주의 이원론 신앙을 누가 많이 가지고 있는가 하면 성경을 지식적으로 아는 자들이에요.
신앙생활은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말씀을 삶으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사신 분이 아니에요.
우리도 말씀을 육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피로 값주고 샀잖아요.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우리 몸을 어떻게 사용하시겠어요.
예수님의 것으로 사용하실 것이 아니에요.
그럼 우리 몸에서 누구의 모습이 드러날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억지로 하라는게 아니고 자연스러운 겁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고 살리려는 것이에요.
돌이키라는 겁니다.
언제 복음을 너희들 색욕 거리로 준 적이 있느냐?
아니라는 거예요.
바울은 지금 아파하는 겁니다.
이건 아니잖아 라고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복음 아는 것으로 자기 사욕을 쫓는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말쟁이들만 되었어요.
목사님들을 만나면 이런 말을 많이 들어요.
어느 목사님을 추종하는 자들이 자기 목사가 죽고 나자 각 교회로 흩어져서 분란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이 교회는 복음이 있네 없네 하면서 말이에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겁니다.
지난 번에 어떤 분이 블로그에다가 다닐 교회가 없습니다 라고 댓글을 해서 제가 답변을 그렇게 했어요.
진짜 복음을 안다고 하면 그 교회가 복음이 있네 없네 따지지 말고 받은 은혜로 섬기라고 했어요.
복음을 안다면 그 교회 가서 죽으라고 했어요.
복음 아는 당신이 섬기면 다른 분들이 보고서 복음에 도전받을 것이 아니냐,
저 분이 아는 복음은 어떤 것이길래 아무 말없이 섬길 수가 있을까 두려워 할 것이 아니냐,
예수님께서는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그 심정을 아시란 말이죠.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은 가서 선생 노릇하고 잘난 척 하라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가서 죽으라는 거예요.
섬기라는 거예요.
봉사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하긴 싫고 잘난 척 하고 싶고 그걸 누가 좋아하겠어요?
복음은 여러분의 게으름을 합리화 시켜 주지 않아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받음을 진심으로 알 것 같으면 복음을 자기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이용하지 않아요.
농담으로 듣지 마세요.
신앙이란? 받은 은혜를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 하나님이 안식했다고 하지요
천지창조 이야기는 우리 구원이야기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심 속에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함이 들어가 있어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천지창조를 구원으로 이루어가세요.
그래서 갈라내는 구원과 채우는 구원이 있는 겁니다.
죄와 사망에서 갈라내고 의와 생명으로 채우는 일을 하세요.
땅에 속한 것은 제하고 하늘에 속한 것들을 새기는 일들을 하시는 겁니다.
아담의 형상은 찍어내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세요.
우리 안에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창조해 가시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어야 안식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안식을 주시는 겁니다.
안식은 옛 사람이 죽어야 누릴 수가 있는 겁니다.
옛 사람은 말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 옛 사람이 펄펄 살아서 뛰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건 두 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어요.
그가 들은 말씀이 아랫 지식으로 알아진 것이거나,
아니면 말씀을 들은 그 사람이 죽은 사람이거나 둘 중의 하나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어요.
이 말은 성경은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해석이 불가하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이 되는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 안에서 일을 하세요.
그러나 아래 지식으로 알아진 말씀은 죽은 것으로서 운동하지 않아요.
그리고 성령의 감동의 말씀은 산 자 안에서 역사하지 죽은 자에게는 역사하지 않아요.
마치 죽은 나무에 물을 주어도 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죽은 자는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운동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말씀 안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일만 저지르는 자들은 귀신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고,
마귀는 말씀을 가지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신앙을 돌아보세요.
나는 어떤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는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일하고 있는지,
아니면 마귀가 일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어요.
여기서 능력이란? 생명의 역사를 말해요.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의 향기를 토하게 되고,
마귀를 안고 사는 자는 마귀의 냄새를 풍기게 되어 있어요.
야곱의 열 두 아들 속에 나는 어디에 속하였나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캐스팅이 되었는가요?
아니면 교회를 허무는 일에 캐스팅이 되었나요?
하나님의 집에는 여러 그릇들이 있어요.
금 그릇도 있고 은 그릇도 있고 나무 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어요.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어요.
이건 야곱의 아들들이 받은 축복과 같아요.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깨끗하게 하면 주인이 사용을 하세요.
주인은 그릇을 따지지 않고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세요.
교회 안에 직분은 그릇과 같은 겁니다.
달란트를 한 개 받았느냐 두 개 받았으냐 다섯 개 받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그걸 어떻게 쓰고 있느냐가 중요해요.
주인이 와서 묻는 것은 얼마를 남겼느냐를 보지 않아요.
땅에 묻어두지 않고 사용하면 잘하였다고 칭찬을 하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하세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당부를 드립니다.
신앙생활은 실전이지 모의 훈련이 아니에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실제에요.
천국은 실제하는 곳이지 가상의 세계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실제에요.
실제로 죽었고,
실제로 살아나셨고,
실제로 승천하셨고,
실제로 다시 오세요.
그럼 우리의 신앙도 실제여야 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천국을 현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의 모형으로 교회를 주셨잖아요.
구약에는 하늘에 있는 식양을 따라서 성막을 주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어요.
신약에는 예수의 피 값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의 법칙인 은혜로 섬기도록 하셨어요.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주의 날로 모이는 것이에요.
주의 날이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로서 이는 예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안식하신 날이에요.
여호와의 안식일로 모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안식일은 역사 바깥의 날이에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주의 날에 모여서 장차 오는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이들처럼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하였어요.
교회의 모임을 우습게 여기지 마세요.
현재 천국을 누리지 못하면 미래 천국도 없어요.
제발 농담으로 여기지 마세요.
예수 믿는 것도 실제이고
우리가 천국 가는 것도 실제이고
신앙생활도 실제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
고린도 교회 안에 모든 사람들이 다 잘했으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고린도 교회 안에도 스스로 다된 줄 알고 교만을 떠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나 복음 아는데 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이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야기를 폼으로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지금 이 시대도 일어나고 있으니 경계로 보라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은 두 가지예요.
율법적으로 의를 이루어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이 욕되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 새 사람으로 부르심을 입었는데 이방인같이 사는 것이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법 아래서 은혜 안으로 옮겨지는 구원이 있고,
은혜 안에 옮겨져서 옛 사람과 싸우는 구원이 있는 겁니다.
죄와 사망에서 의와 생명으로 옮겨주는 구원은 예수님 홀로 하셨지만,
의와 생명의 나라에서 의롭다여기심을 입은 자로서 살아가는 구원은 우리가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옛 사람과 싸우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옛 사람과 싸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신 것을 지키게 하려고 오신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날마다 우리 안에서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에요.
성령의 소욕이 이기면 이 몸으로 의의 병기로 사용이 되어지고,
육체의 소욕이 이기면 이 몸으로 불의의 병기로 사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머리로 믿는 것만이 아니고 몸과 마음이 같이 가는 거예요.
내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가는 것이고 몸이 가는 곳에 마음도 있는 거예요.
누군가를 사랑해 보세요.
마음만 가나요?
아니에요.
몸이 같이 가요.
젊은이들 사랑하는 거 보세요
하루 종일 같이 있다가도 집에 오면 전화를 하잖아요.
밤새도록 전화하고 가서 이튿날 가서 또 만나잖아요.
그게 사랑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열정들이 다 사라져버렸어요.
그래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는 겁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하잖아요.
왜 이렇게 입으로만 예수 믿는 자가 되었는지 살펴보라는 겁니다.
무슨 말씀을 어떻게 들었길래 이 모양이 되었는지,
귀신의 가르침을 복음이라고 들었는지 의심해 보라는 겁니다.
귀신의 복음이 아니고서는 죽은 신앙이 나타나지 않아요.
참 복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드러 나게 되어 있어요.
내 신앙이 언제부터 영지주의 신앙이 되었는지 잘 살펴보세요.
제발 자신에게 냉정하세요.
신앙에는 제일 무서운게 나르시즘과 매너리즘이에요.
선 줄로 생각하는 거에요.
군인들이 작전에 실패하는 건 용서해도 보초에 실패하는 건 용서 못한다고 해요.
작전은 잘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경계를 게을리 하는 것은 용납을 못해요.
온전한 신앙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에요.
그 사람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짓을 하면서 사랑한다고 하면 안 되잖아요.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잖아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하고자 하고 싫어하는 것은 멀리하고자 하잖아요.
그게 사랑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하고자 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은 멀리하고자 하는 것이에요.
비록 온전치 못하지만 몸과 마음은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광야에서 한 발짝이라고 가나안으로 향해야지 애굽으로 향하면 안 되잖아요.
말씀을 농담으로 듣지 마세요.
새기고 또 새기고 하셔야 해요.
그래서 내가 믿는 믿음이 진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인지 아니면 지식적으로 알아진 귀신의 믿음인지 달아 보셔야 해요.
말씀이 머릿 속에 있으면 안 되고 가슴 속에서 달음질하고 꿈틀거려야 하는 겁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야 해요.
예수의 심장이 뛰어야 하는 겁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고 뛰며 성전 안으로 쑥 들어가 소리 높여 찬송을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면 강도를 만나 옷 벗김을 당하고 죽게 되어 있어요.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 산 위에 있고,
여리고는 지중해 수면 아래인 해저 250미터 바다 아래 있어요.
예루살렘은 천국이고 여리고는 지옥이에요.
기름으로 치료를 받으면 가슴이 뜨거워지면 해저에서 해발 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온기가 하늘로 올라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가슴이 뜨거워져서 걷고 뛰는 신앙을 회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무지랭이 같은 자를 하나님 나라에 일꾼을 삼아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구경꾼이 아니라 선수로 차출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심을 입었으니 후보로 있지 말고 주전으로 뛸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서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신앙생활을 모의 훈련으로 하지 말고 실전이 되게 하여서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신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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