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강. 형제들의 불신과 요셉의 울음 (창 50장 15-21절)
창 50:15-21절.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세기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요셉은 야곱의 약전에 기록이 되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열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역사 속에서 펼쳐질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라 함은 언약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후손은 조상들의 길을 걷게 되어 있습니다.
한 아담 안에서 나온 인간은 모두가 동일한 운명에 속하여 있듯이 언약의 후손들 역시 언약 조상의 운명에 속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이후의 성경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확대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출애굽기부터 요한계시록은 창세기의 사건들이 확대되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신 구속사를 역사 전반에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확대하여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구약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었고, 신약은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 신약을 조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부터 살아가는 구약 이스라엘은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해서 보게 되고, 신약의 교회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그리고 구약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이 시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언약이 이삭과 야곱을 거쳐 요셉으로 완성이 된 것을 구약 이스라엘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신약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교회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걷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거울로 주었다고 했습니다.
구약은 우리의 자화상인 겁니다.
그럼 오늘 살펴볼 요셉과 그 형제들 간에 일어난 이야기도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역사 전체로 본다고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예수님과 맺은 언약을 예표하는 것이 되겠지요.
아브라함 언약으로 낳아진 이삭은 예수님의 새 언약으로 낳아진 성도들을 예표함이 되구요.
이삭을 통해서 낳아진 야곱과 에서는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을 예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과 요셉은 우리 옛 사람과 새 사람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 모두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입체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입체적이라 함은 계시의 다양성이라는 뜻입니다.
이중 계시 삼중 계시가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사건과 인물 속에는 다양한 계시가 담겨 있어요.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이면서 우리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단편적으로 보지 말고 다중 계시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겁니다.
한 사람 속에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다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어느 사건을 보더라도 ‘넌 왜 그러느냐’고 손가락질하지 말고 우리 이야기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구약 이스라엘과 내가 하나가 되어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이야기들을 타자로 두지 말고 자기 자신으로 투영시켜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늘 간증하듯이 말하잖아요.
제가 과거 율법에 특심하였을 때는 구약 이스라엘을 보고 엄청 욕을 했어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시로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고 살았어요.
그럼에도 틈만 나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적하였어요.
법에 사로잡힌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겁니다.
어떻게 엄청난 은혜를 입고도 그렇게 배은망덕할 수가 있느냐,
너희는 지옥 가도 싸다 라고 했어요.
나를 하나님 편에 세워 놓고 판단하기에 바빴어요.
그땐 구약 이스라엘과 저는 남남이었어요.
그러니 정죄하기에 바빴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은혜를 입고 보니 구약 이스라엘이 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내가 구약 이스라엘과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옛날에는 저놈들은 죽어도 싸다고 했는데,,
‘이제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의 긍휼이 아니면 주 앞에 설 수가 없사오니,
그 은혜의 해를 종의 얼굴에 힘 있게 비추어 주옵소서’
‘주여, 구원해 주세요’ 라고 하고 있어요.
성경 속에 남이 보이면 정죄가 일어나지만,
성경 속에 내가 보이면 정죄는 사라지고 긍휼을 구하게 되어요.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고 하였어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긍휼의 자리에요.
그럼 정죄하고 비판하던 입은 닫히고 용서와 은혜와 긍휼과 감사의 말이 나와요.
은혜를 받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언어가 바꿔요.
그래서 말을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쌓은 악에서 악을 내고 쌓은 선에서 선을 내게 되어 있기 때문인 거예요.
구약과 신약은 우리의 신앙이야기에요.
우리도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어요.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에요.
구원은 이 두 과정을 거쳐 완성되어가요.
그런 의미로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창세기 50장은 야곱의 죽음과 요셉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죽음 가운데 요셉이 형제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안타까워서 우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왜 야곱과 요셉의 죽음 가운데 형제들의 불신 이야기를 삽입하고 있을까요.
오늘은 요셉이 형제들의 불신앙을 보고 우는 그 울음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셉은 야곱이 죽자 그 형제들과 모든 식솔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올라가 야곱의 시신을 열조가 있는 막벨라 굴에 안치한 후에 애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과거 자신들이 요셉에게 못된 짓을 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왠지 요셉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겁니다.
혹시나 요셉이 자신들의 과거 행적을 인하여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겁니다.
야곱이 살아 있을 때는 생각지 않았던 일들이 아버지가 죽고 나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헹제들이 요셉에게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자신들이 과거에 요셉에게 잘못한 일들은 다 용서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이 웁니다.
울음도 여러 종류입니다.
기쁠 때 우는 울음이 있고,
슬플 때 우는 울음이 있고,
아파서 우는 울음도 있고,
안타까워서 우는 울음도 있습니다.
요셉이 ‘울었더라’를 ‘바카’라고 하는데 이는 ‘비탄에 빠져 애통해하는 것’을 말해요.
이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우는 울음인 것입니다.
왜 창세기의 마지막을 이러한 이야기로 마감할까요.
이건 종말에 일어나게 될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을 예수님의 구속사로 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야곱은 초림의 예수님을 상징하고
요셉은 재림의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초림의 예수님과 재림의 예수님 사이에 신약의 교회 시대가 있습니다.
이건 야곱의 죽고 난 후 그 후손들이 애굽에서 크게 번성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그 정한 때가 되어서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이때 요셉의 시신을 앞세우고 나옵니다.
이건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 교회 시대로 보세요.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 후 신약 교회 시대가 열립니다.
그리고 정한 때가 되면 재림하십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십니다.
이건 온 세상을 기근으로부터 구하고 온 세상의 주가 된 요셉의 실상인 것입니다.
50장의 그림을 잘 보세요.
야곱의 장례후 형제들의 불신 사건이 일어나고 요셉이 죽습니다.
요셉의 시신을 입관합니다.
입관된 요셉은 그 형제들과 애굽에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430년 후에 출애굽을 할 때 요셉의 시신을 앞세우고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다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모세를 통해서 일어나고,
광야 40년을 거쳐 가나안 입성은 여호수아를 앞세우고 들어갑니다.
이는 창세기에서는 야곱과 요셉으로 밑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그림이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모세와 여호수아로 나타난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계시의 책입니다.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그림입니다.
마치 책의 목차와 같습니다.
책을 보면 목차가 제일 앞에 나옵니다.
이 책의 내용은 목차에 따라 전개가 됩니다.
창세기가 그러합니다.
출애굽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언약의 후손들이 애굽이라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것을 삶으로 풀어 내게 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옛 언약이라는 그림으로 보여주셨고,
신약은 교회를 통해서 새 언약이라는 그림으로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그림이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다 그려지면 예수님이 재림을 하셔서 언약의 후손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출애굽을 시키게 됩니다.
이 그림을 창세기에 씨눈처럼 그려 놓으신 것입니다.
이들을 히브리서 11장에서 앞서간 증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요셉)처럼 간섭해 가십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창세기를 재 해석하여서 풀어놓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이후 야곱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살아갑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약 430년의 공백기가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야곱의 후손들은 크게 번성을 합니다.
그리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으로 인하여 엄청난 고난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모세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야곱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구원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건 마치 말라기 선지자 이후 예수님 초림까지 400년 암흑기와도 같습니다.
암흑기 동안 유대인들은 많은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거치면서 많은 고난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의 백성들이 구원받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러면 구약의 출애굽기 이후 말라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이루어지는 교회 이야기를 예표하고 있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가지고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그림자라고 하고 신약을 실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신약은 실상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이고 구약은 허상으로 보이는 세계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 의미에서 신약이 구약보다 앞서 있음이 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모세보다 앞서 계심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그림자이고 예수님은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는 실상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구약 이스라엘 이야기가 신약의 우리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의 마지막을 형제들의 불신으로 인한 요셉의 울음은 역사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를 보고 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 교회를 보고 탄식하고 우셨던 초림의 예수님의 울음이 종말 때 신약교회의 타락을 보고 우시는 재림의 예수님의 울음과 같은 것입니다.
전도서 1장을 봅시다.
전 1:1-11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인간이 역사 속에서 겪어야 하는 모든 것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인생의 쓴맛과 단맛인 희노애락을 다 겪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이 과정을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결국 역사는 낮과 밤처럼 순환하면서 진행이 되는데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자 하는 그림이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 속에서 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의 말대로 구약 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이 신약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은 이미 구약 교회에서 보았던 모습입니다.
구약 교회의 모습은 이미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을 통해서 보아온 그림인 것입니다.
또한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를 통해서 보았던 그림인 것입니다.
역사는 돌고 돌아 그 자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죄가 동일하고 죄인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있던 뱀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 시대 인간이나 이 시대 인간이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시대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이 행하였던 그 행사 머리를 이 시대 교회들이 그대로 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방법도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서 구원해주었듯이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옷을 입혀 주어서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도 은혜이고 지금도 은혜입니다.
구약도 믿음이고 지금도 믿음입니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 증거하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듯이 지금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언약이고,
오직 믿음이고,
오직 은혜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 남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창세기는 언약의 후손들이 역사 속에서 겪어가는 축소판입니다.
출애굽기부터 창세기를 확대하여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러면 창세기는 장차 일어나게 될 계시의 책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약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마지막은 세상 마지막 때를 보여주고 있어요.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요셉이 형제들의 불신을 보고 우는 울음 속에는 예수님의 울음도 담겨 있음이 됩니다.
그리고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교회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세요.
요한계시록에는 신약 시대의 교회사를 일곱교회로 보여주고 있어요.
에베소 교회로 시작해서 라오디게아 교회로 끝이 납니다.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를 상징하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직전의 종말 교회를 상징하고 있어요.
지금 이 시대가 라오디게아 교회에요.
라오디게아 꼬라지를 봅시다.
요한계시록 3장을 봅시다.
계 3:14-22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 것으로 가득했어요.
그래서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진단은 냉혹합니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발가벗고 있다고 합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서 입에서 토하여 내고 싶다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문밖으로 쫓아내고 있습니다.
이건 이 시대 교회 모습입니다.
이 시대는 예수가 필요 없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 교회 꼬라지들을 보세요.
예수님 초림 때 구약 교회와 똑 같아요.
예수님이 구약 교회를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였고 매매하고 장사하는 소굴이라고 했어요.
이 시대 목사들이 강도짓을 하고 있고 교인들의 신앙은 장사하러 오고 있어요.
교회가 세속화되어서 세상 것으로 가득해요.
목사나 교인들이 신앙은 외식으로 가득해요.
예수님이 탄식을 하고 계세요.
왜냐하면 교회가 요셉의 형제들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구약 교회를 보고 우신 사건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 번째 울음을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11장을 봅시다.
요 11:20-35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문병을 가지 않습니다.
이틀을 유하다가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깨우러 가자고 합니다.
도착하니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지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마르다가 듣고 쫓아가서 마중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보자 대뜸 예수님이 여기 계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 썩인 말을 하는 겁니다.
이에 예수님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그건 먼 훗 날에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냐,
그 때 살아나는 것 하고 지금 죽은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라고 합니다.
그 때 집에 있던 마리아도 예수님 앞으로 쫓아 나옵니다.
그러면서 울면서 예수님이 안 계셔서 오라비가 죽었다고 원통해하는 겁니다.
마리아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유대인들도 함께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우십니다.
이건 유대인들의 신앙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현재성을 부정하는 행위에요.
먼 훗날에 일어나는 것은 알지만 지금은 죽은 하나님인 겁니다.
이 모습에 예수님이 속이 상한 겁니다.
그래서 애통해하시며 우신 겁니다.
두 번째 울음을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19장을 봅시다.
눅 19:28-44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어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이 모습은 스가랴에 예언이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의 왕은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했어요.
이건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백성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라고 찬송하면서 환영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왜 이런 참람한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느냐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들이 안 하면 여기 있는 돌들이 소리를 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장차 일어날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의 모습을 보시고 우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평화를 주러 왔는데 너희 눈에는 숨기워졌다고 합니다.
이건 안타까움의 눈물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이 사실을 성경 박사라고 하는 자들이 안 믿는 겁니다.
성경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하고,
성경을 믿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가르치는 것은 지식이지만 믿는 것은 신앙이에요.
성경 아는 것하고 예수 믿는 것은 달라요.
성경을 아는 것은 선생 노릇을 하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이 시대 교인들은 성경을 믿는데 목사들은 안 믿어요.
그러니 교회를 세상 가치로 세워가는 세속주의 목회를 하는 겁니다.
초림 때 유대인들에게 나타났던 외식 신앙이 지금 이 시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재개발하려고 오셨어요.
옛 것을 헐어버리고 새 것으로 지으려고 오셨어요.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고 영으로 지은 성전을 짓고
육적 이스라엘을 폐하고 영적 이스라엘을 세우세요.
예수님이 지으실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있는 겁니다.
그게 다윗의 나라에요.
예수님은 다윗 언약을 완성하러 오셨는데,
유대인은 다윗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동상이몽인 겁니다.
그래서 우는 겁니다.
이건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반복하여 또 나타 나요.
지금도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고 믿고 있어요.
이건 세대주의 종말론을 가지고 있는 자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세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재림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진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재림할 때 이방인 교회는 휴거가 되어서 공중에서 7년 동안 혼인 잔치를 하고,
그 사이 이 땅에서 유대인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요.
7년이 지나면 예수님이 감람산으로 내려와서 저 이스라엘 땅에 천년왕국을 세운다고 해요.
예수님은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는데 세대주의자들은 초림 때 유대인들과 같이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있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또 우세요.
예수님이 몰고 오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어요.
천년왕국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몰고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져요.
그곳을 하늘이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하면 우리가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간다고 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이미 오래전에 약속했어요.
아버지가 그 증인이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죽었어요.
그러자 형제들이 불안해하는 겁니다.
형제들의 생각은 요셉이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 있으니 안 그런 척하고 살았다는 거예요.
이제 아버지가 죽었으니 자기들 한데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요셉을 찾아와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한 약속을 지키라고 하는 겁니다.
쉬운 말로 복수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들으니 요셉이 갑자기 서글퍼지는 겁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와서 17년을 살다가 147세에 죽었어요.
그러니 요셉이 형제들을 17년 전에 이미 용서를 했어요.
그러나 형제들은 용서받은 자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러니 야곱이 죽고 나자 뜬금없이 17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말을 듣고 우는 겁니다.
그동안 형제들이 이런 마음으로 살았다고 생각하니까 허탈한 겁니다.
어쩌다가 우리 형제들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마음이 찢어지는 겁니다.
이건 형제들이 법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에요.
요셉은 감옥에서 자신이 형제들로부터 당한 억울한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다 알았어요.
그래서 기근에서 가족들을 살리려고 애굽으로 이사를 오게 한 겁니다.
이사를 오게 하였으면 그들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거예요.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소거했다는 뜻이에요.
생각하지도 않고 따지지도 묻지도 않겠다는 선언과 같아요.
이걸 은혜라고 해요.
은혜가 뭔가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거예요.
일사부재리 원칙으로 다 끝을 낸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가 죽고 나니 형제들은 요셉의 용서를 못 믿는 겁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법이 툭 튀어나와서 의심병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일찍이 요셉은 기근 때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살려내기 위하여 먼저 나를 앞서 보내서 양식을 준비케 한 것이라고 알려주었어요.
나를 애굽에 판 것은 형들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했어요.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는 스토리를 잠깐 살펴보고 갑시다.
앞서 42장을 보면 기근이 들자 야곱이 그 아들들을 애굽에 보내서 양식을 사오게 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대뜸 알아보았어요.
그러면서 그들을 시험합니다.
너희들 정탐꾼이지,,
그러자 형제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다 한 가족으로 독실한 신자들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서 거짓말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가족사를 밝힙니다.
자신들은 형제가 12명인데 한 명은 죽었고 한 명은 집에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합니다.
요셉은 베냐민은 집에 있고 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는 너희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질 때까지 3일 동안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3일 후에 감옥에서 꺼내고는 조건을 하나 내놓습니다.
너희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집에 있는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만 여기 남고 나머지는 곡식을 가지고 올라가서 식구들을 살려내라고 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시므온을 결박하여 옥에 가둡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하니까 형제들이 근심이 태산인 겁니다.
자기들끼리 아버지는 베냐민을 요셉처럼 아끼는데 아버지의 성정상 베냐민을 내어 줄 리가 만무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신들이 과거에 요셉을 버릴 때 일을 떠 올리면서 지금 우리가 이런 곤경을 당하는 것은 다 요셉을 버린 죄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웅성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42장을 봅시다.
창 42:21-23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23.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 들은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서로가 너 잘 낫네 못 낫네 하면서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고 다투는 겁니다.
이 모습을 요셉이 다 보고 있었어요.
이 때는 아무 소리 하지 않았어요.
시므온을 볼모 잡고 형제들에게는 곡식을 주고 빨리 가나안으로 올라가라고 보냅니다.
그러면서 그들 몰래 곡식 자루 안에 그들의 돈을 그대로 넣어 둡니다.
형제들은 그것도 모르고 가나안으로 올라갔어요.
자루 속에 돈을 보고 서로가 기겁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정탐꾼으로 오해받아서 시므온이 볼모로 잡혀 있는데 이제는 도둑 누명까지 쓰게 되었다고 난리인 겁니다.
르우벤이 자기 자식들 목숨을 담보로 하고 아버지에게 베냐민을 함께 보내 달라고 합니다.
이에 야곱이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곡식 사러 보내게 됩니다.
요셉은 이번에는 야곱을 애굽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베냐민을 볼모로 잡습니다.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 요셉의 은잔을 넣어서 베냐민을 도둑으로 몰아버립니다.
이건 야곱을 내려오게 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냥 오라고 하면 안 올 것 같으니까 아들 찾으러 오라고 하는 겁니다.
베냐민이 감옥에 가두어지게 되자 형제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이 요셉 대신 아끼는 아이라서 이 아이가 안 올라가면 아마도 아버지는 쇼크로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다가 대신 감옥에 들어갈 테니 이 아이는 보내 달라고 합니다.
아 아이가 안 올라가면 아버지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요셉이 자기 정체를 밝힙니다.
창세기 45장을 봅시다.
창 45:1-11절.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 말고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시편 105편을 봅시다.
시편 105편 16~19절.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은 유다가 아버지 건강을 생각하고 만약에 베냐민이 안 올라가면 죽을 수가 있으니 그것만은 안 되니 자신이 대신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이 모습에 요셉이 마음에 빗장이 깨어지고 맙니다.
방성대곡합니다.
얼마나 크게 울었으면 바로의 궁중에까지 그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드디어 요셉은 형제들에게 내가 형들이 버린 그 요셉이라고 정체를 밝힙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애굽으로 팔려 온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줄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이 나를 먼저 애굽으로 보내서 양식을 준비케 하여서 가족들을 살리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나를 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은 다 버리라고 합니다.
나도 처음에는 억울하여 잠도 못 잤는데
감옥에서 하나님이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가족들을 살리기 위하여 너를 앞서 보낸 것이 형제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다 용서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요셉이 분명히 그들을 용서했어요.
그러나 형제들은 믿지 못하고 있어요.
이게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차이에요.
머리와 가슴 사이의 간극이에요.
요셉의 형제들 신앙은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과 같아요.
이 시대 교인들은 머리하고 가슴하고 하늘과 땅 만큼이나 간극이 있어요.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실제는 아니에요.
믿음이라는 말을 몰라요.
자기들이 만들어 낸 믿음관으로 가지고 있어요.
이 시대 교인들의 믿음관은 주체가 자기에요.
그러다 보니 자기 행실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착하게 살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만약에 나쁘게 살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믿음을 자기 행위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건 법으로 사는 것이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자기 꼬라지에 따라서 미친 여자 널 뛰듯이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아침에는 천국인데 저녁에는 지옥이 되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하세요.
이건 세상 속에 제시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에요.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겁니다.
입 맞추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나 입을 맞출 수가 없어요.
입맞춤은 연인이나 부부끼리 하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에게 입을 맞출 수 있는 자는 예수님의 신부라야 하는 겁니다.
신부는 내가 하겠다고 시켜주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만 신부가 되어요.
이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주 예수를 믿게 하였어요.
이걸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가 없다고 하신 겁니다.
또한 성령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 사람은 아니라 할 수가 없어요.
즉 번복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안 믿기가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예수 믿는 것을 내가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결코 정죄함이 없이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 꼬라지를 보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아가요.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에게 종속된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받은 자들의 특징이에요.
마태복음 7장을 보면 산상보훈의 결론을 집 짓는 비유로 마감합니다.
산상보훈은 율법이라는 옛 언약을 새 언약으로 재 해석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하는 겁니다.
구약의 율법은 겉의 행위 법이지만
신약의 은혜는 속의 믿음의 법이에요.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한 것은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이에요.
형제들이 자신들의 행실로 인하여 왔다 갔다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요셉이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이미 다 용서를 다 해주었는데,
내가 어찌 하나님이 하신 일에 왈가왈부 할 수가 있느냐,
그럴 순 없다고 하는 거예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당신들이 행한 악한 일을 선으로 바꾸어서 만민들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하는 일로 삼았다는 겁니다.
속된 말로 당신들이 나를 애굽에 팔지 않았으면 내가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으며,
애굽의 총리가 아니었으면 당신들을 기근으로부터 살려낼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거예요.
전화위복인 겁니다.
요셉이 이러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을 단련했기 때문이에요.
요셉이 17세에 형제들에게 버림당하고 애굽으로 내려왔어요.
13년 감옥생활을 하다가 바로의 꿈을 해몽하고서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어요.
요셉은 13년 동안 감옥생활을 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단련을 시키신 것이에요.
시편 105편을 봅시다.
1.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2.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3.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4.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5.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6.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8.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11.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12.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3.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14.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15.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그 발이 착고에 채워졌고 그 몸이 쇠사슬에 묶여있다고 하지요.
그래 놓고 하나님이 요셉을 단련하셨어요.
언제까지 하나님이 계획한 일이 이루기까지에요.
하나님이 계획한 일은 아브라함 언약이에요.
일찍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실 때 네 후손이 이방에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하였어요.
그러자면 그 후손들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가야 해요.
그런데 이 놈들이 안 내려가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기근을 불러서 내려가게 한 것입니다.
이 때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창고에 양식을 보관해둔 상태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13년 전에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내려보내서 준비를 시킨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듬뿍 받고 있는 요셉에게 애굽에 내려가라고 하면 안가니까
하나님이 형제들을 가지고 요셉을 애굽으로 쫓아내도록 하신 겁니다.
당시에 요셉은 얼마나 비통하고 원망스러웠겠어요.
그런데 감옥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모두가 내가 네 조상 아브라함하고 한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한 일이고 내가 너에게 준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주시는 겁니다.
너를 형제들의 주가 되고 만유의 주가 되게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형제들을 원망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그러더라고 하는 겁니다.
단련이라는 단어는 “짜라프” 라고 하는데,
이는 ‘시험하고’, ‘새기고’, ‘금장색을 새기듯이 완전하게 한다’ 라는 뜻이에요.
마치 금세공업자가 아름답게 세공하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요셉의 삶 속에서 언약을 새겨넣은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말씀이 육신이 된다고 해요.
예수님을 일컬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예수님 몸에다 새겨 넣은 것을 말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풀어내신 거예요.
요셉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요셉의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내게 하신 겁니다.
요셉은 구약 시대 예수로 산 겁니다.
이건 언약의 후손들의 필연적인 삶이에요.
이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해 가세요.
이걸 이사야 43장에서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해 놓고서는 내가 너를 물 가운데와 불 가운데를 지나게 하면서 조성을 해 가신다고 하셨어요.
조성이란? 하나님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을 야곱의 삶에 새겨 넣는다는 말이에요.
이걸 말씀이 육신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야곱이에요.
하나님 것이라구요.
하나님이 요셉을 감옥에 가두어서 조성하시듯이 우리도 조성해 가세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우리 뜻대로 안 살아지는 것이에요.
만약에 인생이 우리 뜻대로 살아졌으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사람이 저를 포함해서 단 한 사람도 없어요.
하나님이 처음 지은 사람이 누구인가요?
아담이지요.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에요.
조상이란? 근원이라는 뜻이에요.
원본이란 말입니다.
그럼 그 다음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아담의 복제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을 했어요.
그럼 아담의 모든 후손은 죄인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마지막 아담으로 보내셨어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늘의 사람의 조상으로 보내신 겁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의 사람을 낳는 일을 하신 겁니다.
예수로 낳아진 하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제품들이에요.
그 안에 예수님의 것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걸 예수그리스도로 충만해진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은 객관적인 사실이에요.
그러나 이 사실을 자신의 것으로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을 성도라고 해요.
성도는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고린도후서 4장을 봅시다.
고후 4:5-18절.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13. 기록한바 내가 믿는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가 주라는 것과 우리들은 그의 종이라는 사실을 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참 빛이신 예수님은 자신들 안에 심어 놓았다고 합니다.
즉 질 그릇과 같은 인간의 몸에 보배이신 예수를 담아 놓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에다가 하늘의 보물을 담아 놓은 겁니다.
그런데 그 보물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우리 몸을 깨트리는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그 아들을 한 알의 밀알로 심은 겁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수많은 밀알을 낳은 겁니다.
이렇게 낳아진 밀알들을 다시 심는 일을 하세요.
그래서 예수 죽인 것을 자기 몸에 짊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품은 성도를 다시 죽음으로 넘겨주세요.
그럼 그 죽음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살아나게 되는 겁니다.
예수를 품은 자들을 가지고 또 다른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를 품은 자들의 죽음으로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즉 순교자들의 피로 복음이 전해졌어요.
이를 겉 사람은 후패해진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후패한 겉 사람 속에서 속 사람이라는 알맹이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겉 사람을 심고 속 사람을 낳는다는 겁니다.
육신의 것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살려내신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버려지고 죽임당하는 것을 슬퍼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가 이 과정을 겪게 되어 있어요.
그 첫째가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예수를 품은 자들도 예수님처럼 죽어지고 살아나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객관적 예수를 주관적 예수로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주관적 예수가 될 때 우리의 인생은 예수님의 삶으로 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성도에요.
이들은 요셉처럼 착고에 채워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인생을 차압하여서 말씀이 응하는 삶으로 간섭을 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예수를 객관으로 세워두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삶이 나타나지 않아요.
마치 요셉의 형제들과 같이 요셉의 용서하심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하여도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요셉의 형제들처럼 죄사함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봅시다.
고전 1:18-24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 도가 구원의 능력이에요.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님께로 난 자들에게만 그러해요.
하나님께로 나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여요.
왜 그런가 하면 신자와 불신자는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은혜로 살아가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는 자는 법으로 살아가요.
은혜는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법이고,
법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법이에요.
성도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판단하세요.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 안에서 살아가요.
자기 인생이 없는 겁니다.
자기 인생이 없으니 자기가 책임질 것도 없는 겁니다.
이들은 요셉처럼 용서함으로 살아가요.
자기 안에 원수를 두지 않아요.
다 용서해요.
그러니 인생이 가벼운 겁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가 있어요.
구약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신약으로 사는 사람이 있어요.
구약으로 사는 사람은 율법으로 살아가고,
신약으로 사는 사람은 은혜로 살아가요.
율법으로 사는 사람은 옛 언약이라는 법으로 자기가 책임지는 것으로 살아가고,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은 새 언약이라는 은혜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요.
율법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가 오시기 전이니까 땅에 속하였고,
은혜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하늘에 속하였어요.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속량해 주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죄 아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타자에요.
구경꾼이에요.
그러나 은혜에 속한 성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다 속량해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요.
그러니 죄로부터 자유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사건이에요.
사실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세상 신인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여서 믿어지지 않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여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 속에서 믿어지게 하도록 하셨어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믿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죄로부터 자유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구약으로부터 출발하여 신약으로 마감해요.
율법으로 시작해서 은혜로 마치게 되어 있어요.
비록 창세전에 영생을 받기로 작정이 되고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성도라 할지라도 이 수순을 겪게 되어 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7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잘 보시면 하나님이 유업을 이을 아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아들이 아직 어려요.
그래서 일정 기간 청지기 아래 두어서 종으로 살게 하였어요.
청지기 아래서 살아가는 삶이 율법이에요.
율법 아래서 죄의 종 노릇을 하는 겁니다.
정한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율법 아래로 보내셨어요.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아들들을 속량하시기 위해서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겁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리고 믿어지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신 겁니다.
성령이 오셔서 성도들 안에서 믿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믿어지는 사람들은 요셉의 용서를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고 하지요.
왜 아들의 영이라고 하는가요.
원래 아들로 태어났는데 잠시 죄의 종으로 두었기 때문이에요.
죄의 종은 율법으로 다스려요.
그래서 율법 아래서 죄의 종으로 살았던 겁니다.
하나님이 정한 기간 그렇게 하신 겁니다.
때가 차매 예수님을 보내서 죄 문제를 해결케 하시고 죄의 종에서 아들의 지위를 회복케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이 모든 사실들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믿어지는 겁니다.
믿어지니까 이제는 예전처럼 죄로 인한 불안감으로 살지 않게 된 겁니다.
비록 죄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죄로부터 자유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요셉의 형제들이 그 과정을 겪게 되는 겁니다.
요셉은 분명히 그들이 죄를 용서해 주었는데
형제들은 그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건 모든 성도들이 겪게 되는 수순이에요.
그러니 요셉의 형제들 이야기는 이 시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이 이야기는 예수님과 우리 이야기에요.
창세기를 이렇게 마감하는 것은 구원의 서정을 말해주고 있어요.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을 보세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창조의 일을 하시잖아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죄인들의 모습이에요.
이러한 세상에 참 빛이 와서 갈라내고 채우고 안식하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출애굽기를 보세요.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 노릇하잖아요.
이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위에 있는 모습이에요.
분명히 언약의 후손인데 죄의 종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정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서 죄의 나라에서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빼내 약속의 나라로 옮겨주시잖아요.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어가는 구원의 서정이에요.
애굽에서 빠져 나왔다고 해서 이들이 믿음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요셉의 형제들처럼 믿지 못하였어요.
이제 광야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광야에서 자라가고 있는 겁니다.
요셉이 용서를 했어도 그걸 믿지 못하는 자들로 출애굽기로 넘어가요.
믿음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처철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구원자를 기다리게 되어요.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말이에요.
정한 때까지 이들도 요셉이 경험한 일들을 겪게 되어 있어요.
착꼬에 채워져서 말씀이 응하기까지 말씀으로 단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일찍이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어요.
요셉이 버림당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에요.
언약의 후손은 모두가 요셉의 과정을 지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요셉 속에다가 언약의 후손들이 세상 속에서 겪게 되는 일들을 담아 놓은 겁니다.
요셉은 샘플과 같아요.
요셉 속에는 예수님도 담겨 있어요.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는 예수님과 우리의 이야기에요.
요셉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율배반적인 형제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인 겁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이 되게 하셨듯이 믿음 없는 자들을 믿음 있는 자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방관자로 두지 않아요.
하나님이 창조주세요.
죄인을 예수 안에서 의인으로 만들어가는 창조주세요.
이렇게 만들어진 자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안에서 구원을 했어요.
이 말은 예수의 운명으로 다루어 가신다는 뜻이에요.
속된 말로 우리는 예수님 팔자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에요.
우리가 예수에게서 나왔으면 우리가 예수와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그건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과정을 겪게 되어 있단 말이죠.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겪게 되는 거예요.
요셉도 죽임당하고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겪었어요.
그 형제들도 애굽에 버려졌다가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겪게 되어요.
요셉이 형제들로 버림받고 다시 살아나서 애굽의 총리로 나타나요.
예수님도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고 살아나서 만유의 주가 되셨어요.
우리도 요셉처럼 버림받았다가 다시 살아나요.
요셉과 같이 총리가 된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요 라고 하는 겁니다.
왕 같은 제사장의 자리로 나아가는 길이 그리 녹녹치 않아요.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혹독한 과정을 겪게 되어 있어요.
그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요.
내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
나는 버려진 자가 아닌가?
내가 구원받은 자가 맞나?
온갖 염려와 의심이 들어요.
요셉과 살면서 요셉을 의심하는 일들이 우리에게도 나타나요.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아요.
늘 흔들려요.
흔들리면서 자라가요.
그게 신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배워가는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하는데
우린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있어요.
요셉의 형제들처럼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고 법 아래서 두려워 떠는 겁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믿어지는 것 같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믿음이 흔들리는 겁니다.
그러자 불안감이 엄습하여 두려움에 거하게 된 겁니다.
그건 형제들 속에 요셉의 용서가 새겨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제 하나님이 새겨가는 일들을 하세요.
그것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빠져나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애굽을 떠나라고 하지요.
그러나 안 떠나요.
결국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해요.
출애굽 하기까지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대로 그들을 간섭해 오셨기 때문이에요.
430년 동안 요셉의 형제들이 종살이한 것은 요셉이 버림받아 말씀이 요셉을 단련한 것같이 형제들을 단련하는 시간이 되는 거예요.
형제들에게 애굽은 감옥이에요.
요셉의 형제들도 필연적으로 요셉과 같은 과정을 겪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이 다 그래요.
우리가 예수 처음 믿고부터 다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느냐?
안 돼요.
우린 모두가 처음에는 관념적으로 믿어요.
하나님 말씀을 지식적으로 들어요.
지식적으로 들으면 남의 이야기에요.
그래서 실제의 삶 속에서는 예수의 삶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말씀은 잔뜩 들어서 알고는 있어요.
설명하라고 하면 청산유수에요.
그러나 삶은 따로에요.
입술로는 존경하나 마음은 멀어요.
그것을 중풍병자라고 해요.
예수를 못 만난 사람이에요.
예수를 만나면 그렇게 살 수 없어요.
예수가 그 속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 과정이 필요해요.
신자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왜 성경에 이런 과정을 말하느냐 하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런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이에요.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이 있듯이 실제 인생의 의미를 알고 살아지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야 아는 거예요.
그렇다고 아이를 무시하면 안 되잖아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니까.
요즘 말로 대학 졸업함과 동시에 삶 속에 뛰어들어봐야 하는 거예요.
세상 속에서 부딪쳐 보면서 인생을 알아가는 거예요.
부모 아래서 꼬박고박 학자금 받아서 살아갈 때는 인생 몰라요.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고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식 낳고 키워가면서 배워가는 거예요.
비로소 인생살이가 녹녹치 않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거예요.
인생살이가 장난이 아니듯이
예수 믿는 것이 장난이 아니에요.
세상을 죽고 사는 전쟁처럼 살아야 하듯이
예수 믿는 것도 죽고 사는 전쟁처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전쟁이에요.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전에는 자기 맘대로 살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찾자 오시고 나면 그 때부터 인생은 꼬이기 시작해요.
우리 맘대로 살아지지가 않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 때가 좋았어요.
광야에 나오니까 하나에서 열까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먹고 입고 마시는 것까지 다스림을 받았어요.
그래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데모를 한 겁니다.
사람이 제일 힘든게 남에게 간섭당하고 사는 거예요.
아이들도 간섭해 보세요.
울어버리잖아요.
그런데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간섭당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샀어요.
왜 샀겠어요.
우리 맘대로 살라고 사겠어요.
아니에요.
하나님의 것으로 사용하려고 샀어요.
제자들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자기 인생을 살았어요.
싫든 좋든 자기 뜻대로 살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찾아오고 난 후에는 자기 인생이 없었어요.
성령이 임하고 나자 띠 띠고 가는 인생을 살았어요.
그게 고난인 겁니다.
달리 고난이 아니고 자기 맘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고난인 겁니다.
우리는 예수 때문에 산전수전을 다 겪게 되어 있어요.
산전수전 겪고 온 사람들은 흔들림이 없어요.
실력은 실패를 통해서 쌓여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지 않아요.
들의 풀과 꽃처럼 키워요.
바람이 불면 가시에도 찔리고 해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실패를 많이 해 본 신앙이라야 단단해지는 거예요.
속된 말로 죄도 지어보고 내가 죄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 인간인지를 알아야 해요.
모범생처럼 하면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지 못해요.
교회는 의인 만드는 곳이 아니에요.
죄인 중에 괴수임을 고발시키는 곳이에요.
그래서 주둥이를 닫게 해요.
누가 잘못하면
눈 치켜 뜨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라고 지랄 떠는 것이 아니고,
그럴 수 있지 하고
괜찮아, 힘내, 하면서 짐을 함께 지는 것을 배워야 하는 곳이에요.
율법 아래 있을 땐
죄에 빠지지 않고
예배 빠지지 않는 것은 대단한 실력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울의 군대는 영웅들이 모이지만
다윗의 군대는 루저들이 모여요.
사울의 군대는 자기들 힘으로 싸우지만
다윗의 군대는 하나님을 의지해요.
신앙 생활하면서 쓴맛 단맛 다 겪어야 해요.
수욕 당할 것 다 당하면서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 좋은 신앙이에요.
파닥파닥 뛴다고 좋은 신앙이 아니에요.
도살당할 양처럼 묵묵히 죽어지는 것이 실력이에요.
하나님이 요셉을 착고에 채워서 말씀을 새겨 넣었어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깨닫게 해주는 거예요.
너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언약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이라고 알려준 겁니다.
깨달으니까 용서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요셉이 형님들 이거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 거예요.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었는데 왜 의심하고 두려워하느냐?
왜 아직까지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고 법에 거하고 있느냐고 우는 거예요.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보고 우신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너희가 평화에 대하여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런데 너희 눈에는 가리워져 있다고 하면서 우셨어요.
예루살렘은 평화라는 의미에요.
그런데 그 안에 평화가 없는 겁니다.
평화의 땅에 살면서 평화를 못 누리고 있는 겁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예수님이 평화라는 이름을 가진 성전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지 못하니까 우신 것에요.
이게 어디 남의 이야기인가요?
지금 우리 이야기잖아요.
구약은 실패의 역사를 가르쳐주고 있어요.
왜 안 되느냐?
하나님이 그토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간섭을 해주시는 데 왜 안 되느냐?
그건 인간으로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고발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넣는 일을 해주시는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곁에서 계속 도와주었는데 안 되더란 말이죠.
예레미야 31장을 봅시다
렘 31:31-34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가 장차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설명해주고 있어요.
지금 하나님 백성이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던 시기에요.
망하는 시기란 말이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남편이 되어서 모든 것을 다 해주었어도 너희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를 바벨론이라는 감옥에 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바벨론 포로로 생활하면서 신앙이 더 깊어졌어요.
이건 마치 착고에 채워서 말씀을 새겨 넣는 것과 같아요.
바벨론 포로 생활은 죄값을 치르는 것이에요.
죄값을 다 치르고 나면 고토로 돌아오게 되어요.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이 유다 집과 새 언약을 세운다고 합니다.
전에는 내가 너희 밖에서 남편 노릇을 했지만,
이제는 너희 안에서 남편이 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는데
고난당하고 난 후에 주의 율례와 법도를 배우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는 겁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과 같이 신앙도 실패를 해 봐야 해요.
하나님이 실패의 길로 인도하세요.
감옥 같은 환경으로 밀어 넣으세요.
감옥에서 우리 몸에다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은 자로 양념을 해서 김치를 담는 겁니다.
예수의 맛을 들이는 겁니다.
고난당함이 없는 신앙은 사상누각과 같아요.
그런 신앙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무너져요.
처음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맛이 안 나와요.
실패도 해보고 좌절도 해보고 에수 안 믿겠다고 해 보세요.
교회 안 나가겠다고 해 보세요.
다 필요한 거니까
그러다가 아 이거 아니구나!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세상이 아니고 교회이구나!
그때서야 비로소 진심의 소리가 나오게 되는 거예요.
탕자가 왜 중요하냐?
집을 나가봐야 해요.
그래서 아버지의 집이 그리워져야 해요.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어땠겠어요?
투덜거렸겠어요?
아니에요.
감사했어요.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탕자로 나가서 아버지 집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사를 알게 하시려고 고난의 과정에 집어넣으시는 거예요.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신 것이 놀랍고 놀랍고 놀라운 것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고난이 없는 신앙은 전부 허상이에요.
신앙이란? 날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채워가는 거예요.
값싼 은혜에 빠져 있지 마세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자 라고 하지 마세요.
그런 삶을 주시려고 예수님이 죽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서 잘 살게 해 주실 것 같으면 초대교회에 그런 환란이 있으면 안 돼요
성령이 오심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난 후에 환란 속에 집어넣어졌어요.
환란을 통과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난을 체휼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라는 것을 자기 삶 속에 채워지는 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 예수의 맛을 내게 되는 것이에요.
평안하게 신앙생활 한 사람들은 맛이 없어요.
옛날 신경숙 시인이 쓴 글을 보면 밥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숟가락 젓가락이라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귀중한지 모른다고 해요.
그것 없으면 밥을 못 먹는데,
가장 귀한 건데 말이죠,
그런데 우린 그걸 가장 천하게 취급을 해요.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그릇들은 귀하게 여기면서 말이에요.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앞에서 영차영차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뒷설거지 잘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이에요.
드러난 일 보다 감추어진 일 하는 것이 실력이에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우렁 각시처럼 일하는 사람이 실력 있는 사람이에요.
교회 야유회 준비할 때는 번적거리며 잘해요.
그러나 다 끝나고 나면 다 집에 가기 바빠요.
설거지는 안해요.
그때 우직한 사람은 끝까지 남아서 뒤처리 다 하고 가요.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이에요.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굳은 일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이죠.
우리는 모두 그러한 자리로 가야 해요
옛 말에 등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어요.
잘난 나무들은 다 목재로 팔려나가지만, 등 굽은 나무는 누가 사 가지를 않아요.
그런데 그 등굽은 나무가 숲을 이루어 선산을 지켜내는 겁니다.
잘나고 똑똑한 놈들은 다 저 잘난 맛으로 부모 공경하지 않아요.
부모 공경은 못난 놈들이 해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잘난 자들은 잘난 의로 문제만 일으켜요.
그러나 자기 의가 없는 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굿은 일을 다 해요.
잘난 놈들은 얼굴 드러나는 일에는 적극적이지만 얼굴 나지 않는 일에는 하지 않아요.
신앙생활은 화려한 열매를 따는게 아니에요
날마다 버려지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처럼 종의 자세로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이 땅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배워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의도적으로 산전수전 겪는 곳으로 몰아치는 거예요.
세상에서 실패를 많이 해본 사람일수록 교회 안에서 예배가 중요하고 기도가 중요하고 섬김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 사람들은 예배를 안 빠지려고 해요.
예배의 소중함을 알기에 생명처럼 지키게 되는 겁니다.
형식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배를 우습게 여기면 안 된단 말이에요.
지금은 예배관이 다 무너졌어요.
엘리야 시대처럼 다시 무너진 단을 수축해야 할 때에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는 일을 하세요.
그게 역설적으로 나타나요.
많이 부대끼며 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많아 안다는 것이에요.
많이 안다는 것은 많이 부대꼈다는 것이에요.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하나님과 부대낌이 생기는 거예요.
실제 하나님이 말씀을 그들 속에 새겨 넣는 일들을 하시는 거예요.
부대끼면서 추상의 하나님에서 실상의 하나님으로 깨달아가는 거예요.
야곱도 보세요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는 조상의 하나님으로 알았어요.
그런데 장자의 복을 받고 집을 떠나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부모의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하나님을 배워가는 거예요.
이천 년 전에 죽으신 예수가 그 이천 년 전에 죽으신 예수로 남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현재 내 안에 와 계신 예수여야 한단 말입니다.
목사가 전하는 예수가 아니라 그 예수를 내가 만난 예수이어야 해요
내가 만난 예수가 있는 사람은 용서와 사랑이 나오지만
목사가 전하는 예수로 알고 있는 사람은 지식과 법이 나와요.
주님을 만난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은 완전히 달라요.
마태복음 18장을 봅니다.
마 18:15-22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교회는 루저들이 모인 곳이에요.
다윗을 따르던 자들과 같은 자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그러다 보니 허물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허물진 사람을 잘라내려 하지 말고 용서하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묻는 거예요.
몇 번이나 용서해 주리이까,
일곱 번이나 용서해줘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일곱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490번 용서해 주라는 횟수가 아니에요.
용서라는 것은 정한 양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해줘야 된다는 거예요.
무조건 용서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용서받은 자라는 것을 알 때에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의 비유를 드는 거예요.
일만 달란트 비유를 봅시다.
마 18:23-35절.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천국을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탕감해 주는 어떤 임금을 비유로 말하고 있어요.
천국 비유에요.
일만 달란트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가 없는 액수를 은유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임금은 불쌍히 여겨 모두를 탕감해 주었어요.
탕감해 준 이유는 한 하나 불쌍히 여겨서에요.
그런데 탕감받은 종은 그걸 탕감으로 여기지 않았어요.
갚아야 할 채무로 여긴 겁니다.
그 종이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종을 만납니다.
예를 들어서 일만 달란트를 천억이라고 하면 백 데나리온은 만원에 불과해요.
이건 비교가 불가해요.
그 종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니 그 종이 조금만 참아 달라고 합니다.
이에 그 종은 안 된다고 하면서 옥에 가두어버렸어요.
이 모습을 본 신하들이 임금에서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자 임금이 일만 달란트 탕감해 준 종을 불러서 내가 너를 탕감해 주었으면 너도 당연히 너에게 빚진 자를 탕감을 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으니 너도 옥에 가두어져야 할 것이라 하면서 옥에 가두어버립니다.
이 비유를 왜 했나요?
형제를 몇 번 용서해야 하느냐 라는 질문에 답을 한 겁니다.
비유의 핵심은 용서받은 자는 용서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한 것은 용서하고 살라고 용서를 해 준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준 것처럼 너희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원리를 말해요.
33절을 보세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한 것이 아니냐,
이건 법칙이에요.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마치 콩 심은데 콩이 나는 것과 같이,
용서받은 자에게서는 용서가 나오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같이 살게 되어 있어요.
이건 유전자가 같기 때문이에요.
사람이니 사람 행사를 하는 것이고,
짐승이니 짐승 행사를 하는 것이에요.
이건 가르칠 문제가 아니라 속성이에요.
이렇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렇게 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하라고 하면 종교가 되어버려요.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되어요.
신앙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종교는 우리가 행하는 것이에요.
신앙과 종교는 일을 행하는 주체가 달라요.
구약은 율법을 지키는 주체가 인간이었어요.
이걸 옛 언약이라고 해요.
그러나 신약은 주체가 하나님이에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세요.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해요.
예레미야 31장을 다시 봅시다.
렘 31:31-34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날이 이르면 새 언약을 세운다고 하지요.
새 언약은 하나님이 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주는 겁니다.
이것은 밖의 법이 아니고 안의 법인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법을 지킬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 법이 새겨지면 더 이상 죄가 기억나지 않아요.
에스겔 36장을 봅니다.
겔 36:24-28절.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새 영은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주어서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새 영이 해 주신다고 해요.
다시 말해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죄사함의 일이고 용서하는 일이에요.
즉 하나님으로부터 탕감받은 것으로 이웃에게 탕감해 주는 것이에요.
구약은 하나님이 밖에서 도와주셨지만
신약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도와주세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용서하는 자가 되는 거예요.
용서가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가 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죄를 안 짓고 사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좌 아래서 난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죄사함이 필요하고 용서가 필요한 겁니다.
죄를 안 지으면 죄사함이고 용서고 필요가 없어요.
역사 속에서는 죄사함이 필요하고 용서가 필요해요.
흔히들 착각하기를 마귀가 우리를 죄 짖게 한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마귀는 죄짖지 말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죄사함과 용서가 필요 없도록 만들어요.
마귀는 우리 앞에 예수의 피를 가리는 일을 해요.
왜냐하면 예수의 피가 모든 죄로부터 자유 하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이에요.
광야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와야 해요.
모세가 애굽에 있던 언약의 후손들을 광야에 있는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합니다.
이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인도하세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다 죽어요.
그런데 마귀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말라고 해요.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한단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착하게 살아서 예수가 필요 없도록 하는 겁니다.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집은 죽음의 재앙이 들이닥쳐요.
예수의 피가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예수의 피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정답을 알아도 정답대로 살 수 없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겁니다.
죄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늘 자각하게 만들어요.
하나님은 착한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을 원해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지는 용서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인간을 원해요.
성령이 오면 새 마음이 주어진다고 하였잖아요.
새 마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용서로 살아가는 마음이에요.
예수그리스도부터 받은 용서가 형제를 용서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짓고 싶어도 안 지을 수가 없어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죄를 짓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죄의 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죄의 몸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는 두 가지를 경험하게 되어 있어요.
첫째는 앞서 말했듯이 죄를 지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죄를 짓고 나면 참소를 당하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죄를 지으면 마귀가 율법으로 참소해요.
율법의 참소에 걸리면 스스로 정죄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럼 구원의 즐거움이 날아가요.
시편 51편을 봅시다.
시 51:10~19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이것은 다윗이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고 쓴 시에요.
다윗은 죄를 짓고 그 죄책으로 시달렸어요.
그러다가 나단 선지자로부터 다윗은 자기 본질을 알게 되었어요.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은 본질상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은 은혜의 나라에요.
은혜는 반드시 죄를 바탕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필요악이라는 말이 있듯이 죄와 은혜는 짝으로 일을 하는 겁니다.
다윗이 만약에 죄를 안 지었으면 자기가 죄인인 줄 몰랐을 겁니다.
죄를 모르면 은혜도 몰라요.
은혜를 모르면 선악의 법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선악의 법은 죽이는 법이에요.
그럼 죄인을 용서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을 법으로 통치하게 되어요.
법으로 통치하면 다 죽여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실존을 알려준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범죄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라고 한다면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막지 않았어요.
죄를 짓고 나자 나단을 보내서 고발하는 겁니다.
오해할 수 있으니 참고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묵인하고 추인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죄를 통해서 하나님은 일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 아래 있어요.
죄 없는 것이 없어요.
다 죄에요.
죄악된 세상 속에서 은혜로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말년을 보세요.
역대상 21장과 사무엘하 24장을 봅시다.
대상 21:1절.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삼하 24:1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다윗의 말년을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하시나요.
하나님이 사단을 시켜서 다윗을 죄를 짓게 만들지요.
우리는 죄짓지 못하도록 막을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짓도록 하십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은혜를 남기기 위함이에요.
은혜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성경 속의 인물들은 큰 실수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격동해서 짓게 한 죄가 뭔가요?
인구조사에요.
이건 자기 업적을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이에요.
요압은 말렸어요.
삼하 24:3-4절.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4.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장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장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의 앞에서 물러나서“
아니 이 백성은 다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 숫자 세서 뭣하려고요,
하나님이 필요하면 백 배나 더할 수가 있는데,
왜 쓰잘데기 없이 인구조사를 하라고 합니까.
그냥 곱게 있지,
그러자 다윗이 주둥이 닫고 하라면 해,
이에 신하들이 궁시렁거리면서 한 거에요.
인구조사 하고 나서 결과를 봅시다.
삼하 24:10절.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 하고 나서 어떻게 하나요.
후회하지요.
아버지 나 죄 지었어요.
내가 미련했어요.
미련하다는 말은 바보짓을 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난 살 수가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이 모든 일의 설정을 누가 했나요?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겁니다.
왜 그런가요?
은혜로 데려가시려고 한 거예요.
인구조사가 끝나자 하나님이 네 이놈하고 나타나서 혼내는 겁니다.
다윗의 잘난 척 때문에 죄 없는 백성 7만 명이 죽었어요.
다윗이 잘못했다고 하니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지내라고 합니다.
그 아라우나 타작마당에 성전이 세워져요.
성전의 기능이 뭔가요?
죄인이 흠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용서받는 곳이에요.
이걸 은혜라고 해요.
성전은 은혜로 가득한 곳이에요.
이러한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시편 51편으로 가 봅시다.
다윗이 죄를 짓고 나자 나단을 보냅니다.
다윗은 죄를 숨기고자 하였어요.
완전범죄를 꿈 꾸었어요.
그래서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전쟁터에서 열심히 전쟁하고 있는 우리야를 불러서 강제로 밧세바와 동침하게 만들려고 했어요.
그래야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가 자기 것이 아니고 우리야의 것이라고 우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충직한 우리야가 전쟁 중인 장수가 어떻게 유희를 즐길 수 있겠느냐 하면서 두 번이나 거절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요압에게 우리야를 맨 앞자리에 세워서 전투를 하다가 죽게 하라고 했어요.
이 얼마나 나쁜 인간인가요?
이게 다윗이에요.
이런 놈이 나 죄인 아닌데요 라고 쑈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다윗은 우리야도 죽었으니 이젠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있었어요.
그 때 하나님이 나단을 보내서 다윗의 죄를 다 까발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실존을 알려주는 겁니다.
니가 죄를 짓는 건 니 어미가 너를 죄중에 잉태하였기 때문이야,
너는 태생이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이야,
니가 뭘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죄인이야,
넌 가만히 있어도 죄인이야,
다윗은 이 소리를 듣고 꼬꾸라집니다.
절망하고 말아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게 되어요.
성신을 내게 거두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정직한 영을 주어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제사를 즐겨하는 분이 아니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율법 지켜서 ‘나 착한 사람이에요’ 라고 나오지 말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로 나오게 하겠다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다윗의 사건으로 무얼 말하고자 하는가요?
은혜에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세리와 죄인들 같이 가슴을 치면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탄식하는 것을 바래요.
바리새인들처럼 난 죄 안 지었어요.
난 저 세리와 죄인들과는 달라요.
이러면 안 되어요.
죄 안 지었다고 하는 바리새인은 지옥으로 보내고,
죄인임을 알고 긍휼을 구하는 세리와 죄인들을 천국으로 보내세요.
우리는 본질상 죄인이에요.
죄 짓는 게 우리 주특기에요.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나쁜 짓을 안하면 죄인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도 성도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어요.
세상 사람과 성도는 죄관이 달라요.
너희는 죄인이야 라고 하면 인간들은 여기에 동의를 안 해요
그것은 하나님이 가진 죄관과 인간이 가진 좌관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인간들이 가진 죄관은 자기 행실로 판단하는 선악의 법이에요.
선악의 법은 남을 이롭게 하면 선이고 남을 해롭게 하면 악이라고 해요.
다윗이 거기에 걸려 있는 거예요.
다윗은 범죄하기 전에는 회개 안 했어요.
범죄하고 보니 찔림이 와서 회개를 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너는 죄를 지었던 안 지었던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 거예요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어요.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되었어요.
이걸 은혜라고 해요.
다윗이 죄를 짓든 안 짓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예요.
그런데 범죄하고 난 후에 법에 걸려든 거예요.
법에 거하게 되니까 구원의 즐거움이 상실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고백하는 거예요.
주여 내가 지금 사랑 안에 거하지 않고 법에 거하니까 내 구원의 즐거움이 상실되어버렸습니다.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성신이 내 안에서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셔서 내가 죄를 지었던 안 지었든 내가 사랑 안에 거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겁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다 죄 용서함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럼에도 우린 육신이 연약해서 죄를 지을 수가 있어요.
그러면 마귀는 법을 가지고 들이민단 말이죠.
법에 걸려들면 다윗과 같이 낙심하게 되어요.
법 아래 거하면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날아가 버려요.
그럼 죄가 되어요.
신약에서의 죄는 예수님의 피를 무가치하게 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28-29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구약에서는 모세의 법을 어긴 자를 죽였어요.
그러나 신약은 아들의 피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자를 죽어요.
지금은 새 언약 시대에요.
새 언약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이에요.
누구든지 예수의 피를 바른 자는 의롭다 여겨주시는 법이에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우리의 잘잘못을 가지고 죄를 따지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낸다고 하셨지요.
그가 오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한다고 하시지요.
이는 새로운 법칙을 몰고 온다는 말이에요.
옛 언약의 죄관이 아니라
새 언약의 죄관을 주신다는 뜻이에요.
옛 언약의 죄관은 우리 행위로 판단하는 것이지만,
새 언약의 죄관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판단해요.
중요한 것이니 잘 이해하셔야 해요.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행위로 죄로 여기지 않아요.
죄가 아니란 말이 아니고 정죄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로 여기지 않고 간과해 준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흔히 원죄 자범죄라고 하잖아요.
우리를 구원했다는 말은 둘 다 해결해 주셨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죄와 상관이 없는 자라고 하는 겁니다.
죄 없는 자라는 말이 아니고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이걸 믿으셔야 해요.
믿음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믿는 것이에요.
마귀는 선악의 법으로 이걸 못 믿게 방해를 해요.
우리가 여기에 잘 걸려드는 게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이건 마치 광야에 나온 자들이 애굽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몸에 배여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광야에서 애굽에서 태어난 자들은 모두 죽이는 겁니다.
애굽에 습성을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가면 거기서도 애굽에 법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가나안에는 애굽을 모르는 2세들을 데리고 가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의 즐거움을 빼앗기고 사는 것이 다 마귀의 농간 때문이에요.
그러니 늘 자기 꼬라지로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꼬라지가 괜찮다 싶으면 천국 단상에 앉아 있고,
꼬라지가 개판이라고 하면 지옥 개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어요.
잘난 것 있으면 기고만장하고,
못난 것 있으면 기가 팍 죽고,
그게 바로 법에 거하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오늘 새벽에 우리 요셉이가 동영상 하나를 보냈어요.
이 녀석에 쥬스를 먹다가 확 뱉어서 방을 어지럽혀 놨어요.
지네 엄마가 손 들라고 했어요.
근데 손을 들고 있으면서도 지네 엄마 품으로 파고드는 거예요.
이게 사랑이라니까
사랑은 엄마가 뭐라고 해도 파고 드는 거예요.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그렇다니까요.
우리는 완벽하게 살아낼 수가 없어요.
완벽한 몸뚱이가 아니므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자리 잡고 있어요.
사랑의 법이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파고 들게 하는 거예요.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긍휼히 여겨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이게 믿음이고
은혜이고
사랑이에요.
요셉이 형제들을 보고 우는 것이 그거예요.
왜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느냐!
사랑받아 놓고 사랑 속에 거하지 못하고 법에 거하느냐!
나와 함께 살면서도 왜 두려워하느냐!
요셉은 형제들이 두려워하는 그게 속상하고 아픈 거예요.
야곱이 죽고 나서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눈치를 보고 살았어요.
그게 불신이고 죄에요.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이에요.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죄를 사해주심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인 거예요.
그게 자기 꼬라지로 믿음 있네 없네로 나타나는 거예요.
잘했을 때는 기고만장하는데,
잘못하면 부끄러워서 나 교회 못 가겠어 그러잖아요.
여러분들의 신앙이 진짜일 것 같으면 어떤 수치스런 경우에도 교회에 와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수치스러운 일이 있으면 교회에 안 와요.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다른 교회로 옮기잖아요.
안 그런 척, 믿음 있는 척, 고상한 척 하잖아요.
그건 아주 나쁜 신앙이에요.
어린아이 신앙이에요.
그 사람은 구약을 살고 있는 거에요.
좋은 신앙은 예 맞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수욕당하지요.
이게 나와야 해요.
뻔뻔스러우라는 말이 아니고.
말 뜻을 잘 이해하세요.
자식이 잘못했다고 집을 나가는 것이 잘한 겁니까?
아니면 집에 꾸역꾸역 들어오는 것이 잘하는 겁니까?
꾸역꾸역 집에 들어와서 밥 챙겨 먹는 것이 잘하는 거예요.
물론 밉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집 나가는 것 보다는 더 나아요.
꾸역꾸역 처먹는 것이 더 낫지 집 나가면 더 골치가 아파요.
그런데 우리는 똥 싼 놈이 성질낸다고 가출을 해 버려요.
교회는 잘난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니에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초즌(choseon)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부 인생 실패자들만 모였어요.
모두가 형편없는 놈들이에요.
세상 가치로 쓸만한 놈이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이 그런 놈들을 모은 겁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님이 몰고 온 나라가 은혜의 나라이기 때문이에요.
잘난 바리새인들 눈에는 하나님 나라가 창피한 거예요.
저런 비루한 자들이 살아가는 나라라고 한다면 자기들은 안 가겠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고상한 나라를 꿈꾸고 있어요.
그들은 고상함이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고상함은 없어요.
인간은 그냥 똥 덩어리에요.
냄새 풀풀 나는 인간들이에요.
교회는 잘난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에요.
못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자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비록 올바르게 살지 못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 저 개 맞아요,
부스러기라도 먹지 않으면 나 죽어요,
그러니 부스러기라도 주세요 라고 긍휼의 보좌 앞에 나오는 것이 신앙이에요.
누가 허물이 있다고 하여도 그러려니 하세요.
쯧쯧하면서 혀 차고 손가락질하지 말고,
그래, 저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또 노파심에 조심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오해하지 말고 잘 이해하셔야 해요.
우리가 믿음 있는 척 교회에 와서 회개한다고 하잖아요.
뭘 회개하나요.
대부분 행실을 잘못한 것이에요.
이게 구약적 회개에요.
신약적 회개는 믿음으로 살지 않은 것이에요.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책망한다고 했잖아요.
무슨 죄를 책망한다고 하는가요?
예수 안 믿는 것이에요.
옛 언약의 죄와 새 언약의 죄는 달라요.
옛 언약의 죄는 행실의 죄이지만
새 언약의 죄는 예수 안 믿는 것이에요.
즉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이 죄에요.
예수를 안 믿는 것이 뭐냐,
지기 행실로 인하여 우는 거에요.
여러분이 그런 기도를 하면 예수님이 그래요,
알어! 니가 죄인인 줄 안다니까
그래서 너 때문에 내가 죽었잖아,
내 죽음 때문에 니가 용서 받고 살고 있잖아.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주님 오늘도 죄악된 세상 속에서 주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죄로부터 자유하고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해요.
언제까지 죄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럴 겁니까?
이러한 것을 개가 토하였다가 다시 먹는 것이고,
돼지가 씻었다가 도로 눕는다고 해요.
막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무얼 믿고 살아가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예요.
말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별을 하세요.
여러분 눈 앞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 예수님이 보여야지 자기 꼬라지가 보이면 안 되어요.
내 꼬라지에 예수님의 피가 발라진 것이 보여야 해요.
’주여 다시는 죄를 안 짓겠습니다‘ 가 아니고,
’주여 이런 죄인을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되어야 한단 말이에요.
아이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집에 들어와 문 잠그고 단식하면 좋겠어요.
잘못했습니다 하며 집구석 쳐 박혀 있는 것이 좋겠어요?
아니면 잘못했다 할지라도 밥상 차려놓으면 밥 먹고 같이 텔레비전 보는게 좋겠어요?
어느 모습이 아들의 모습인가요?
나와서 함께 해야 되잖아요.
그게 자식이에요.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잘못했다고 365일 징계하는 부모가 어디 있냐고요?
아이들이 다 그렇게 크는데,
근데 아이가 지 스스로 아 우리 부모는 나를 용서하지 못할 거야,
그래서 방 문고리 걸어 잠그고 있을 것 같으면 어떻겠어요.
그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떨 것 같은가요.
아파요.
자식이 잘못한 것이 아픈 게 아니고
부모 눈치 보고 있는 그것이 더 아파요.
살다 보면 넘어질 수 있어요.
우린 완벽한 자들이 아니에요.
넘어지더라도 또 일어서면 되어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시는 주님이에요.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신 승리를 높이는 것이에요.
승리를 높이는 것이 정죄를 적극적으로 이기고 사는 것이에요.
성도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어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가 않아요.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1-39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지요.
왜 그런가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이에요.
해방을 잊지 마세요.
왜 해방이라고 하는지 아세요.
이건 믿을 일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나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대적할 자가 없고
송사할 자가 없고,
정죄할 자가 없고,
끊을 자가 없어요.
왜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완전한 것이에요.
이걸 믿고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이게 있어야 두렵지가 않아요.
이게 없으면 요셉의 형제들처럼 두려워해요.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 다 용서해 주었어요.
맞아요.
그런 죄책감이 매여 있지는 말라는 거예요.
죄책감에 빠져 있는 것은 예수님의 핏 값을 헛되게 하는 거예요.
요셉의 형제들이 지금 요셉의 용서를 헛되이 하고 있는 겁니다.
요셉이 용서해 준 것을 법으로 가지고 있으니까
이 법을 깨뜨리려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고난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신앙이란 반드시 애굽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에게도 고난이 필요하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주 자기 백성들을 고난의 풀무 속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시편 119편을 봅시다.
시 119:67-74절.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69.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70.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74.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
고난을 주의 손이 나를 만들었다고 하지요.
이것이 말씀이 요셉을 단련했다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고난을 통해서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새겨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말씀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우리 몸으로 파고들어서 실제
현실에서 구체화 되어 나타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겁니다.
요셉이 형제들보고 간곡한 말로 위로하더라는 말이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말씀을 응하게 하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간곡한 말로 위로한다는 말은 자기 모든 정성을 쏟아서 기도해주는 것과 같은 거예요.
마치 예수님의 기도와 같은 거예요.
신약에 오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하지요.
요셉이 그 모습인 거예요.
형들이 내가 용서한 것이 믿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에요.
이게 신약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똑 같은 거예요
요한1서 1장 5절에서 2장 6절을 봅시다.
요일 1:5-2:6절.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한이 그러는 거예요
내가 말하는 것은 너희들이 죄 안 짓고 살기를 바란다.
그런데 몸뚱이가 죄 안짓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죄를 짓겠지만 너희를 위하여 예수가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자가 되어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고 있어요.
이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실제 삶 속에서는 자기의 죄과를 인하여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툴툴 털고 일어나서 담대히 나와서 주여 내가 이러한 죄를 지었음에도 피 흘리는 용서함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 용서의 자리까지 나아가서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거죠
그게 신앙이라니까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계속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으로 끌고 가서 너희 죄 값으로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용서해 준 것을 인간들은 법으로 받아서 이해를 못하니까,
신약은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믿어지게 하시고 실제 삶으로 풀어내도록 하시는 겁니다.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용서하심의 말씀이 삶으로 풀어져서 살아지는 거예요.
장성한 자는 예수님의 용서해 주심을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은혜로 살아가요.
그러나 어린아이는 머리로만 알고 실제 속에서 누리지 못하고 있어요.
어린아이 신앙을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진다고 해요.
종말에는 어린아이와 젖먹이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하지요.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관념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실제 사건이예요.
실제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을 우리 삶 속에서 적용시키란 말이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거예요.
성령이 그 안에 오신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실제 삶에서 풀어내고 살아요.
그게 결코 정죄함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에요.
요셉은 자기가 경험되었기 때문에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어요.
말씀이 단련을 하여서 말씀을 응하게 하였어요.
형제들은 경험이 없으니까 이제 그 경험된 장소로 이동을 시키는 거예요.
그게 어디냐?
애굽인 거예요.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430년 후에 풀려나올 때 하나님의 실제 사랑들을 체험하고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게 신앙생활의 여정인 거예요.
지금 우리도 그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은 요셉처럼 겪은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형제들처럼 그 과정 속에 있는 사람도 있어요.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의 신앙의 맞다 틀리다 평가하지 말고
어떤 이는 앞서 있고,
어떤 이는 뒷서 있어요.
앉고 일어섬은 하나님께서 각자 간섭하실 것이에요.
신앙은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어요.
죄에 종노릇 하던 자들이 죄로부터 자유한 자가 되어서 죄를 이기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은 반드시 그 과정을 거치게 하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실제 일어난 것임을 체휼하는 자리로 우리를 끌고 가세요.
끌고 가는 과정이 아픈 과정이지만 그 아픈 과정을 통해서 죄로부터 자유한 자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법의 사람에서 은혜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삶 속에 어떠한 고난이 있을지라도 아파하지 마시고
그 아픔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게 하는 양분이라 생각하세요.
어느 날 문뜩 돌아보면 저 만큼 앞서 가 있음을 보일 겁니다.
부디 은혜 속에 강한 자로 서 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주신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희미하던 십자가 도가 점 점 더 명료해져서 그것이 우리의 무기가 되어서 죄와 사망과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그 은혜 안에서 강건해지게 하시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신 하나님 나라를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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