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강. 요셉의 유언과 입관 (창 50장 22-26절)
창 50:22-26절.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해내시는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손길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요?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즉 언약으로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어요.
먼저 아브라함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언약하십니다.
그 언약으로 그의 후손들을 다스려가십니다.
이 이야기를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요셉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속에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을 담아놓았어요.
아브라함은 성부 하나님을 상징하고,
이삭은 성자 예수님을 상징하고,
야곱은 성령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삼위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겁니다.
그 언약을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요셉을 통해서 완성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요셉을 거치면서 어떻게 펼쳐지고 완성이 되는지를 밑그림처럼 그려 놓으신 겁니다.
출애굽기부터는 창세기에 그려진 밑그림이 확대되면서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면서 명료하게 그려지게 되는 겁니다.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부로 창세기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성경 전체를 논문으로 말한다면 서론이 끝이 난 겁니다.
출애굽기부터 창세전 언약이 본론으로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14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한 무리를 택하셨습니다.
이름하여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입니다.
이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게 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합니다.
이름하여 의롭다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의롭다 여겨주심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을 양자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됩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입니다.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만물이 창조가 된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니다.
골 1:13-17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 분이 나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가 누구신가 보니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입니다.
만물을 그가 창조했습니다.
왜 창조했느냐?
그를 위해서입니다.
그가 바로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역사를 히스토리(history) 라고 하는데 이는 그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이미 창세전에 주신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 라는 뜻입니다.
자기 백성이라 함은 다른 백성도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자기 백성인가요?
아버지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역사 세계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와서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사함을 얻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아무나 믿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믿어집니다.
이걸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 후손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것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창세전 언약을 창세기 1장에 모티브로 보여주셨어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빛이 비췸으로 창조가 시작되는 것으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창조 시작의 빛이 요한복음에서는 참 빛으로 나타나는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합니다.
만물을 지으신 주인이 욌는데 몰라보는 겁니다.
이걸 죄라고 합니다.
이러한 죄 아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하나 둘 찾아내는 일을 하십니다.
다 찾아 내면 이들을 울러 메고 하늘나라로 가서 잔치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창세전 언약이 완성됩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쌍둥이처럼 있습니다.
먼저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이 있고,
나중에 죄에서 건져내는 언약이 있습니다.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죄에서 건져내는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으로 나타납니다.
구약은 죄 아래 가두어지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약은 죄에서 건짐받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구약 교회의 멸망으로 보여주었고,
신약은 의와 거룩은 영생이라는 것을 신약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구약은 육의 역사이고,
신약은 영의 역사입니다.
육은 멸망을 당하고
영은 영생을 얻습니다.
구약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혈통적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끝이 나고,
신약은 이면적으로 나타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 쌍둥이 언약이 구약은 옛 언약으로 신약은 새 언약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논문의 본론과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위로부터 거듭난 영적 이스라엘을 천년왕국으로 데리고 가서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낙원에서의 삶을 예수님과 성도들이 완성된 것으로 보여주고 창세전 언약이 결론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되는 사건으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역사 속에 펼쳐진 창세전 언약이라는 대하 드라마가 끝이 납니다.
드라마가 끝나면 쫑 파티를 하잖아요,.
그게 영원한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대하 드라마의 문을 열어봅시다.
창세기는 문을 닫고 출애굽기가 문을 엽니다.
한 세대는 가고 새로운 한 세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는 세대 속에 펼쳐질 그림은 가는 세대를 통해서 맛보기로 보여주었어요.
그러므로 인류는 세대와 세대로 흘러가면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셨던 그림을 완성하게 되는 것입다.
창세기를 요셉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것은 요셉의 죽음 속에 언약의 완성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내용이 요셉의 죽음으로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서 역사 속으로 보내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죽어서 입관하는 것은 구속사의 완성된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이라로 입관되어서 영구히 보존되는 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야곱이 130세에 애굽으로 내려와서 17년을 살다가 147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요셉이 110세에 죽습니다.
요셉은 17세에 애굽으로 팔려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기근 때에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내려옵니다.
이 때 요셉의 나이 38세입니다.
야곱이 애굽에서 17년을 살다가 죽었으니,
그럼 야곱이 죽을 때 요셉의 나이가 55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이 110세에 죽었으니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난 후 55년을 더 산 것이 됩니다.
요셉은 55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본문을 봅시다.
창 50:22-23절.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요셉은 55년 동안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아들들을 자신의 슬하에서 양육하였어요.
이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아들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아버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적한 것과 같은 의미인 겁니다.
창세기 48장을 봅시다.
창 48:5-6절.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것이 될 것이요 6.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하에서 함께 하리라”
야곱이 죽기 전에 요셉이 낳은 두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습니다.
그리고는 요셉에게 앞으로 낳는 아들은 네 아들로 삼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낳은 아들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은 겁니다.
이건 마치 야곱이 요셉의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은 것이나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요?
이것은 야곱이 죽고 난 후의 요셉의 삶은 야곱의 연장선에 있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죽으면서 요셉을 자신의 삶에 묶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성령이 오면 띠띠고 가게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렇게 되면 야곱은 옛 사람이 되고 요셉은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새 사람의 인생을 55년을 산 것입니다.
요셉 개인의 인생으로 말하지만
요셉이 110세에 죽었으니 55년은 요셉으로 살았고 55년은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야곱이 죽고 55년 후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55년 동안 양자를 양육하며 산 것입니다.
창세기를 왜 이렇게 마감하느냐?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죄 아래 있던 자기 백성들을 양자로 삼아서 하나님의 아들로 양육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야곱의 후손들 구원 이야기는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온 이스라엘을 일컬어 이들은 내 장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성도들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들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8-9장을 봅시다.
롬 8:14-17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9:1-5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 말을 아니하노라 2.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성도를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실제로는 우리가 아들의 영을 받았는데 양자의 영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건 구약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구약도 양자에요.
왜 양자라고 하는지 아세요.
양자란 참 아들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참 아들이 아닌데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어서 아들로 삼아 주신 것이에요.
그리고 양자는 어떤 조건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것이 구약에서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상징하는 애굽의 바로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 한 것은 어린 양 안에서 새로 태어난 자들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어린 양 안에서 주어진 양자인 겁니다.
이건 신약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된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고 죄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이잖아요.
이건 창세전에 언약하신 것이에요.
역사는 창세전에 하신 언약을 역순으로 진행이 되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앞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거꾸러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에요.
‘벤쟈민의 꺼꾸러 가는 시계’라는 영화와 같아요.
예전에 미국에 집회를 다닐 때 비행기 안에서 보았는데,
영화의 내용은 어린아이가 노인으로 태어나서 점점 젊어지고 나중에 아이가 되어 죽는 것으로 전개가 되어요.
마치 창세전 언약을 보는 것 같았어요.
우리는 창세전에서 나와 창세전 그 나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창세전과 창세전 사이에 역사가 있어요.
역사 속에서 창세전에 하신 언약을 이루고 창세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이건 구약에서 언약의 후손으로 보여주었어요.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가 정한 때까지 살다가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다시 본래의 자리인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요.
이건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에요.
예수님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의 조상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창세전 언약의 과정을 겪으신 겁니다.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 세상에 왔다가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시고 본래의 그 자리로 돌아가신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봅시다.
요 17:1-5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이제 그 때가 이르렀다고 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에요.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는 것이에요.
그 말씀이 창세전에 언약하신 것이에요.
이제 그 일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고 나면 예수님은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광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창세전에 계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언약하신 내용을 다 이루고 창세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시절에 가졌던 그 영화로움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나요?
양자 만들려고 오셨어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으신 겁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오셔서 이들을 정한 기간 동안 양육을 하고 계신 겁니다.
이 모습을 야곱이 죽고 난 후 요셉이 55년 동안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낳은 자식들을 자기 양자로 삼아서 애굽에서 양육하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양육이 다 끝나면 돌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입관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입관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다시 본문을 봅시다.
창 50:22-26절.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 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일백 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요셉이 110세 죽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 야곱처럼 미이라로 만들어서 입관을 합니다.
죽음 후에 시신을 처리하는 것이 야곱과 요셉은 달라요.
야곱의 시신은 가나안 땅 조상들의 묘실인 막벨라 굴에 안치를 하였어요.
그러나 요셉의 시신은 입관 후에 애굽에 두는 겁니다.
왜 야곱의 시신은 입관하였다는 말이 없고 요셉은 입관을 하였다고 할까요?
또한 왜 야곱은 가나안 땅 열조에게로 보내고 요셉은 애굽에 두었을까요?
무슨 뜻이 있겠지요.
그림을 그려보세요.
요셉의 몸에 향 재료들로 가득 채웁니다.
향 재료로 채우는 것은 썩지 말라는 것이에요.
이는 썩지 않을 몸으로 평안하게 안식케 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들에게 죽음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요셉의 시신이 들어간 관을 아론(aron)이라고 합니다.
관을 다른 말로 궤(ark)라고도 합니다.
이 말은 법궤 또는 언약궤 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직역하면 요셉은 언약궤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요셉은 죽어서 입관을 한 후에 역사는 출애굽기로 넘어가요.
그 관이 430년 후에 다시 나타나요.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셉의 관을 앞세우고 나와요.
25절을 보면 장차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 땅에서 빼내 가나안으로 올라가게 하실 때에 너희들이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하잖아요.
이게 430년 후에 나타나요.
그러니까 요셉은 죽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에 같이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것과 같아요.
그리고 430년 후에 요셉의 해골을 앞세우고 출애굽하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하늘나라로 이끌어 올리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예수님은 죽었지만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있어요.
정한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재림하면 우리를 이 땅에 빼내서 하늘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데리고 가서 천년왕국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아담으로 시작해서 요셉으로 끝이 나요.
이 전체가 인류의 역사를 축약하고 있어요.
아담에서 요셉까지는 인류 역사 전체를 함축하고 있어요.
인류의 시작을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고 쫓겨나는 것으로 시작하였어요.
창세기 식으로 역사를 보면 죄인인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역사가 마지막 요셉이 입관하여 안식하는 것으로 끝이 나요.
창세기는 왜 요셉이 입관하는 것으로 끝을 맺느냐?
이는 요셉이 궤 속에서 그 후손들과 애굽에서 동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입관이라는 것은 궤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인데
그 궤를 출애굽기에서는 성막의 법궤, 언약궤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요셉이 지금 어디에 들어갔느냐?
언약궤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진을 치고 있지요.
이스라엘의 중심은 성막이고,
성막의 중심은 성소이고,
성소의 중심은 지성소이고,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이고,
법궤의 중심을 두 돌판이에요.
두 돌판은 두 언약을 상징해요.
두 돌판은 죽었다 살아난 돌판이에요.
이스라엘이 범죄하자 처음 돌판은 깨어졌어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번째 돌판을 주십니다.
두 번째 돌판을 법궤 속에 보관하라고 하였어요.
첫 번째 깨어진 돌판은 예수님의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과 같아요.
두 번째 법궤 속에 보관된 돌판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을 상징해요.
우리 몸을 성전이라고 하지요.
성전은 하나님이 사는 집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이 사는 집이에요.
우리도 두 몸이 있어요.
죄 아래서 태어난 옛 사람의 몸이 있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의 몸이 있어요.
옛 사람은 죽어야 할 몸이고,
새 사람은 영원히 살아갈 몸이에요.
부정모혈로 태어난 옛 사람의 몸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하늘의 새 사람은 죽으면 하늘로 돌아가요.
첫 번째 돌판은 옛 언약으로 깨어진 율법이고,
두 번째 돌판은 새 언약인 은혜로서 보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지성소에 법궤를 보관할 때 법궤 안에는 두 돌판 이외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실체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행하여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자신이 사흘 만에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고 하셨어요.
이는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새 성전이에요.
그 새 성전이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고 하신 겁니다.
언약궤를 의인화하면 예수님을 상징해요.
요셉이 죽어서 예수님 품으로 들어간 겁니다.
예수님 품에서 안식하고 있는 거예요.
야곱과 요셉은 똑같이 향 재료를 몸에 채워서 장례를 지냈어요.
그런데 야곱은 무덤 속에 집어넣고 요셉은 입관했어요.
쉬운 말로 야곱은 땅에 묻혔고 요셉은 묻히지 않은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야곱과 요셉은 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야곱은 옛 사람을 상징하고,
요셉은 새 사람을 상징하기 때문이에요.
옛 사람은 흙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래서 야곱은 땅에 묻어주는 거예요.
새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하늘에 사람이에요.
하늘로서 난 사람은 땅에 묻힐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요셉은 관 속에 보관하는 거예요.
우리 옛 사람은 이 땅에서 났기 때문에 땅에 묻히지만,
그러나 우리 새 사람은 하늘로부터 났기 때문에 하늘로 돌아가요.
이걸 예수 안에서 잠 잔다고 하는 겁니다.
비록 몸뚱이는 무덤에 묻히지만 영적인 의미로는 예수 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들의 나팔 소리에 깨어난다고 하는 겁니다.
관을 아론이라고 했지요.
아론이 누구인가요?
대제사장이에요.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요셉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품에 있는 겁니다.
요셉은 예수 안에서 안식하고 있는 거예요.
이 땅에서의 모든 슬픔과 고난을 다 털어버리고 평안에 들어간 거예요.
이사야서 57장에 보면 사람이 죽는 것은 평안히 침상에 들어가 쉰다고 해요.
맞아요.
요셉의 모습 속에는 우리도 있어요.
우리들도 죽으면 몸은 비록 무덤에 묻히지만 영혼은 예수님 품에서 안식을 해요.
안식이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본래의 자리는 어머니와 같아요.
우리는 그걸 고향이라고 해요.
고향은 쉼을 주는 곳이에요.
고향에 간다는 말은 나를 태어나게 한 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에요.
이 그림을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주었어요.
하나님이 아담 속에서 하와를 빼내지요.
그리고 다시 아담 속에서 집어넣어 버립니다.
이걸 혼인이라고 하고 한 몸이라고 해요.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되는 것이 구원이에요.
아담과 하와는 서로가 한 몸이 되기 전에는 안식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빈 자리로 인하여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안식이 되려면 부족한 부분이 다 채워져야 해요.
부족한 부분이 언제 채워지는가요?
자기 몸에서 나간 자가 들어와야 하는 겁니다.
이건 아담이나 하와나 마찬가지예요.
아담은 하와가 들어와야 채워지는 것이고,
하와는 아담 안에 들어가야 채워지는 것이에요.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될 때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은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만 누릴 수가 있는 것이에요.
아담과 하와는 예수님과 우리 이야기에요.
예수님 속에서 우리가 나왔어요.
구원은 예수님도 우리도 만족케 되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신부 찾으러 오셨어요.
자기 신부를 찾기 전에는 예수님도 안식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안식하기 위해서 자기 안에서 나온 신부들을 찾으러 다니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천년왕국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비유하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 1장에 창조가 세 텀으로 이루어지지요.
첫째 텀이 갈라지는 것이고,
둘째 텀이 채워지는 것이고,
셋째 텀이 안식하는 것이에요.
이 모두가 창조 7일에 속하였어요.
창조 7일 속에 세 텀의 창조가 일어나요.
이것이 인류 역사로 나타납니다.
창세기에서 인류 역사의 구조도 세 텀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아담부터 노아까지 한 텀이에요.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 한 텀이에요.
아브라함부터 야곱(요셉)까지 한 텀이에요.
출애굽기 이후부터는 이 구조가 확대되어서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겁니다.
출애굽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이 한 텀으로 나타나요.
이건 갈라지는 창조와 같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에서 은혜로 갈라내는 일을 하셨어요.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약이 한 텀으로 나타나요.
이건 채우는 창조와 같아요.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하늘에 신령한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세요.
이 일이 다하면 예수님이 재림을 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천년왕국에서 안식하는 일을 하세요.
이건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는 세 번째 텀에 속한 것이에요.
이렇게 될 때 예수님의 역사 속에서 행하실 삼직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선지자직이고,
신약은 제사장직이고,
천년왕국은 왕직이에요.
천년왕국이 끝나면 8일 대 성회가 있어요.
이걸 큰 안식일이라고 해요.
8일 대 성회는 역사 밖 하나님 나라에서 가지게 되어요.
천년왕국까지 역사에요.
천년왕국은 창조 7일에 속하였어요.
일곱째 날 안식일도 창조 7일에 속한 날이잖아요.
창조 7일 후에 주어지는 8일 대 성회를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천년왕국이 끝나면 역사 바깥에 있는 태초라는 그 나라로 영원히 이사를 가요.
우리는 그 나라를 하나님 나라 라고도 하고 하늘나라 라고도 하고 천국이라고 해요.
창세기적인 구속사로 볼 때 요셉이 죽어서 입관된 것은 천년왕국에서 안식하는 것과 같아요.
요셉도 아직 한 순서가 남아 있어요.
천년왕국이 끝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이사 가는 것이에요.
그것이 나중에 이스라엘과 출애굽하여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이 두 가지 권고를 합니다.
창 50:24-25절.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은 자신은 죽지만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여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신다고 합니다.
권고는 히브리어로 “바카드” 라고 하는데,
이는 “방문하다” 라는 뜻이에요.
직역하면 하나님이 친히 방문하신다는 뜻이에요.
두 번의 권고가 나옵니다.
첫 번째 권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고,
두 번째 권고는 요셉의 해골을 메고 출애굽을 하여서 가나안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친히 방문하여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이 일이 출애굽기에서 실제로 일어납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사이에 간극(間隙)이 400년이나 있습니다.
이건 마치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의 간극인 400년 중간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면 요셉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음이 됩니다.
그럼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는 리허설과 같은 것이고,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는 실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마지막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것으로서 그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하나님께서 어떻게 간섭을 하셨는지를 살펴봅시다.
창 11장을 봅시다.
창 11:27-32절.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아브람의 아비는 데라입니다.
이들은 갈대아 우르에 살았습니다.
야살의 책을 보면 데라는 당시 니므롯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데라는 우상숭배에 젖어 있었어요.
이러한 때에 아브람이 태어납니다.
아브람이 태어났을 때 이상한 별 하나가 동쪽에서 일어나서 다른 별 넷을 삼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점성술사들이 니므롯에게 알려줍니다.
니므롯의 신하들이 이건 불길한 징조이므로 아브람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에 니므롯이 데라에게 아브람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데라는 하녀가 낳은 아들을 대신 데려다주고 아브람은 노아와 셈 할아버지 집으로 피신을 시킵니다.
아브람은 노아와 셈 할아버지로부터 39년 동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데라가 섬기던 우상들을 다 때려 부수어버립니다.
그 후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다가 하란에 머물게 됩니다.
데라가 하란에서 죽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하란에 있는 아브람을 찾아가 가나안으로 데리고 옵니다.
창세기 12장을 봅니다.
창 12:1-5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데라가 죽자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해 주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신다고 하면서 가나안으로 가자고 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말씀을 쫓아서 가나안으로 갑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위하여 아브람의 인생은 펼쳐져 갑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에 온 지 1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습니다.
창세기 15장을 봅시다.
창 15:1-2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서‘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방패이고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나는 자식은 없고 종이 있는데 그 종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겠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너에게 약속한 것은 너의 몸에서 난 자식으로 이어가겠다고 하면서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그걸 어떻게 믿겠느냐고 합니다.
이에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둘로 쪼개 놓고 언약을 맺습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 홀로 지나가십니다.
이건 하나님의 희생으로 언약을 이루어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언약의 내용이 이상합니다.
네 후손이 이방에서 400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다가 사대 만에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겁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애굽 여인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아 버립니다.
이 때 아브람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그리고 침묵의 시간이 흐릅니다.
아브람 나이 99세 때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옵니다.
창세기 17장을 봅시다.
창 17:1-22절.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20.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 내 언약은 내가 명 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세월이 흐른 후 아브람의 나이 99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언약의 표징을 아브람의 몸에 새기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은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면서 할례를 행하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줍니다.
그리고 그 아내 사래를 사라로 이름을 개명해 줍니다.
이름을 주신 것은 이제 하나님이 아비가 되어서 가문을 이어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년 이맘때가 되면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언약을 세우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이삭이 태어납니다.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12아들을 낳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은 후 나그네 인생을 살게 됩니다.
집 나간 지 30년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집으로 돌아온 야곱에게 이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개인의 이름이지만 이스라엘은 민족적 이름인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야곱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자식들 간에 분란이 일어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맙니다.
요셉을 잃어버리고 20여 년이 흐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근이 닥칩니다.
온 세상에 양식이 다 떨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야곱은 자식들에게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이에 자식들이 애굽에 가서 자신들이 버렸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을 알고 기겁을 하고 맙니다.
이젠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요셉의 입에서 뜻밖에 말이 나오는 겁니다.
형제들이 자신을 애굽에 팔아버린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모두가 우리 가족을 애굽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모시고 애굽으로 내려오라고 합니다.
이에 형제들이 아버지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야곱은 죽었다고 생각했던 요셉이 살아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는 것도 믿기 힘든 일인 겁니다.
이에 야곱이 하나님께서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창세기 46장을 봅시다.
45:26-28절. “요셉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가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하자 야곱은 깜짝 놀라며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27. 그러나 요셉이 말한 것을 다 말해 주자 그는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며 28. 이렇게 말하였다. 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봐야겠다.”
46:1-4절. “그래서 야곱은 모든 소유를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그는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2. 그 날 밤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부르셨다. 그때 야곱이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3.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님 곧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서 네 후손을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4. 내가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갈 것이며 네 후손을 인도하여 다시 이 땅으로 올라오게 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요셉이 지켜 보는 가운데 이집트에서 죽을 것이다.”
야곱이 제사를 드린 후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서 큰 민족을 이루어서 이곳 가나안 땅으로 다시 올라오게 해주시겠다고 합니다.
이에 야곱은 식솔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17년을 살다가 죽어서 가나안에 묻힙니다.
이어서 요셉도 죽어서 입관이 됩니다.
요셉은 죽기 전에 형제들에게 두 가지 유언을 합니다.
첫 번째 유언은 하나님이 너희들을 권고하사 이 땅에서 빼내 아브라함과 약속한 땅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이고,
두 번째 유언은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사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갈 때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권고하시는 일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첫 번째 권고입니다.
권고란? 방문하다 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권고하신다고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야곱의 후손들을 방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후손을 애굽으로 내려보내신 분이 누구인가요?
하나님입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실 때에 언약을 이루시는 주체가 누구로 나타났는가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쪼개 고기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희생으로 언약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애굽에 있는 백성들을 방문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방문하는가 하면 강제로 빼내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가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보다 강한 놈이 붙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스라엘은 바로의 압제하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요.
스스로 나올 수가 없어요.
죄 밖에 계신 분이 빼내 주어야 나올 수가 있어요.
그래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방문을 하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빼내 주신 겁니다.
구원은 타자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에요.
이방 종교는 자율 구원이에요.
그러나 기독교는 타율 구원이에요.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 줄 몰라요.
내가 어디에 갇혀 있는 줄도 몰라요.
내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구원받아야 된다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강제로 우리를 업고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말할 때 하나님이 독수리 날개로 업고 나왔다고 하는 겁니다.
왜 구원을 이런 식으로 할까요?
그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구원 속에 우리의 공로는 0.000000001% 도 담기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천국에서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미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천국에는 감탄사가 합창이 되어서 메아리로 울려 퍼져요.
여기서도 세상에,,
저기서도 세상에,,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세상에나~ 세상에나,,,,,
이 그림을 구약 마당에서 야곱의 후손들을 가지고서 애굽에서 그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지고서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을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날 생각을 추호도 없었어요.
요셉은 알고 있는 거예요.
이 놈들은 자발적으로 말을 듣는 자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실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방문해서 강제로 이주시키는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는 거예요.
신앙생활 끝에는 감사가 나와야 해요.
내가 뭘 했다는 것이 나오면 안 돼요.
예수 믿는 것도 내 실력이 아니에요.
예수를 믿게 해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내가 잘나서 예수 믿은 것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고 하면 그 사람 지옥 가요.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듯이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어서 구원받는 것이에요.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우리가 통상적으로 전도 할 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이 말은 엄청난 오해를 불러와요.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라고 하면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갖가지 핑계를 댑니다.
지금은 바빠서 안 되고 나중에 시간이 되면 믿을게요 라고 한단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들이 따르자 다 돌려보냈어요.
천부께서 심지 않는 자는 다 뽑힌다고 하였어요.
그래서 타국과 전쟁을 하려면 먼저 우리 병력과 상대방의 병력을 달아보고 저쪽 병력은 10만대군이고 우리 병력은 5천 명이면 싸우려 하지 말고 화친을 요구하라고 하였어요.
망대를 세우려면 먼저 비용을 계산해서 망대 세우는 비용이 1억이면 내가 가진 돈이 천만 원이면 공사를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요?
예수는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누구라도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예수에게 올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자만 구원하세요.
그래서 천부께서 심지 않는 자는 다 뽑힌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밖에 나가서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라고 전도해 오세요.
그럼 제가 상세하게 이것은 이런 뜻이 아니고 저것은 저런 뜻입니다 라고 설명해 드릴게요.
어떤 이는 듣고 어떤 이는 듣지 않겠지요.
들려지는 사람은 남을 것이고 들려지지 않는 사람은 떠날 것이에요.
이게 씨 뿌리는 비유에요.
씨가 떨어졌다고 다 결실하지 않아요.
천부께서 가꾸지 않는 밭에 떨어진 씨들은 중간에 다 넘어져요.
끝까지 결실하는 것은 천부께서 관리하는 밭이에요.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하고 교회 밖에서 선포되는 말씀하고 뉘앙스가 조금 다를 수가 있는 겁니다.
교회 밖에 사람들은 모든 주체를 자기가 행사한다고 생각해요.
모든 결정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예수 믿고 싶으면 예수 믿고 믿기 싫으면 안 믿는다고 생각해요.
그럼 여러분들이 보험회사 직원같이 보험 안내하듯이 꼬셔서 데리고 오면 제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설명하면 진짜배기들은 남고 가짜들은 다 떠나게 되어 있어요.
우린 모두가 이렇게 해서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겠다고 해서 왔는데 말씀을 듣다가 보니 우리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에요.
우리는 교회 안에 와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간섭해 오셨는지를 알게 되었어요.
오늘 이 본문 말씀도 가볍게 들으면 안 되어요.
왜 창세기를 이런 식으로 마감하는지 여기에 대하여 고민을 좀 해보시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이렇게 해라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가실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말 자체가 하나님의 의지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심어지는 것이에요.
너희는 가나안 땅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족속이라는 거예요.
너희는 애굽의 떡에만 관심이 있지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너희는 가나안 땅에 살아야 하는 자들인데 애굽의 떡이 좋아서 비록 애굽에서 종살이하더라도 이 땅에 살고자 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걸 아시고 너희들은 말로 해서 안 들어 처먹는 종자들이라서 내가 직접 애굽으로 내려가서 너희들을 기어코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올라오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의지이고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안에 심어지면 고래 등에 작살을 꽂아놓은 것과 같아요.
꼽힌 작살은 절대 빠지지 않아요.
고래가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으로 도망을 갈지라도 하나님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기어코 데리고 오세요.
언약이 그렇게 무서운 거에요.
우리는 이 세상으로 보내어질 때 창세전 언약을 품고 왔어요.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와서 가자고 그러는 겁니다.
우리가 놀라서 누구세요 라고 물으니,
내가 너를 지은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예레미야 1장을 봅시다.
렘 1:4-10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찾아옵니다.
이 때 예레미야 나이가 대충 20세 전후라고 합니다.
한창 자기 꿈을 펼쳐 갈 시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와서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였고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건 예레미야의 인생을 차압하는 사건입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아 슬프다’ 라고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한마디로 재수 옴 붙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 열성 성도들 같으면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환호할 텐데,
왜 예레미야는 기뻐하지 않고 재수 옴 붙었다고 할까요?
이는 선지자의 운명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건 철이 들었기 때문에 나타내는 반응인 겁니다.
예레미야의 운명이 성도의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복중에 짓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알아진 바가 되었어요.
그리고 각자의 사역이 정해진 채로 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입었어요.
그러다가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 인생을 예레미야처럼 차압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고래작살과 같은 언약을 우리에게 심어놓은 거예요
그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까지 인도하는 거예요.
쉬운 예로 듭니다.
아담 속에서 하와가 나왔지요?
이건 마치 엄마가 아기를 낳는 것과 똑 같아요.
아기는 엄마와 탯줄이 연결되어 있어요.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끊어졌지만 엄마와 자식 사이에는 끈끈한 정이 있어요.
엄마와 자식은 하나에요.
타자가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생명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요.
이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인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나왔어요.
우린 이걸 모르고 살고 있었어요.
정한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우리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 찾아갑니까?
언약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400년 전에 아브라함 할아버지 하고 세운 겁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 그 후손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생각을 요만큼도 하지 않았어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찾아갔을 때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나요.
출애굽 하자고 하니까 안 나가겠다고 하지요.
모세가 찾아간 건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찾아간 건가요?
하나님이 찾아가신 거지요.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지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를 주잖아요?
그 지팡이는 누구를 상징하느냐?
하나님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애굽을 방문한 것이지요.
애굽에 갔더니 자기 백성들이 비참한 모습으로 종살이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나가자고 하니까 싫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후려 패면서 강제로 데리고 나오는 거예요.
이게 구원이에요.
구원은 강제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러면 첫 번째 하나님이 권고하심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권고를 살펴봅시다.
창 50:25절.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출애굽 할 때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올라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너희들이 출애굽하는 것은 요셉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끄집어낸다는 뜻이에요.
요셉의 시체를 앞세우고 나왔다는 이야기는 시체가 그들을 끄집어낸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가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끄집어내서 하늘의 거룩한 성으로 올라간 것으로 실제화 되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덤에 나오실 때 홀로 나오신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이 일이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면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속에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해골을 메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오는 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는 것과 똑같은 모습인 겁니다.
그러면 구약의 애굽은 신약은 무덤이 되는 거예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가 되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서 언약의 후손들을 출애굽 시키셨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서 출애굽케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애굽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전부 끄집어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이에요.
그냥 구원해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목숨을 주고 구원해내셨어요.
그래서 창세기 마지막에 하나님이 권고해서 즉 하나님이 방문을 하셔서 요셉의 해골을 메고 애굽을 나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제들 앞에서 나는 비록 너희들 앞에서 죽지만 관속에서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요셉은 죽었으나 죽지 않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분명히 죽으셨지만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요셉의 관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고 계신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시대는 말세지말입니다.
만물이 종말의 징조들을 쏟아내고 있어요.
만물이 몸살을 하고 탄식하고 있어요.
만물이 이 세상의 주인이 방문하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에 만물이 소리를 치지요.
지금 이 시대에 나타나는 재앙의 모습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것을 싸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에요.
만물이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온역으로 소리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구약에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 천둥 번개로 나타났던 현상론적인 모습들이 신약에서도 각양의 천재지변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들은 만물이 소리치는 것을 들을 겁니다.
대통령이 시찰을 나가려면 누가 앞서나가요?
대통령이 방문하기 전에 비서실에서 경호원들이 먼저 나가서 준비를 하잖아요.
이처럼 만왕의 왕이 행차를 하시기 전에 만물이 소리치고 있는 겁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이제는 깨어서 기도할 때라고 하는 겁니다.
창세기는 요셉의 입관으로 끝을 맺지만,
출애굽기를 통해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모습으로 있다가 하나님이 방문하셔서 이끌어내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죄악 가운데 가두었다가 뽑아내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우리는 창세전 언약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났고,
창세전 언약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에서의 구원의 서정이 버려짐과 되찾음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가족들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큰 민족을 이루어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여정으로 간섭하신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가나안으로 올라올 때에는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의 희생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은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를 요셉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입관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어요.
그러다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해방되어 출애굽을 합니다.
이 때 요셉의 해골이 맨 앞에 서서 나오는 겁니다.
이러면 그들을 출애굽 시키는 것은 요셉이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3장을 봅니다.
출 13:19절.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나오지요.
이 모습은 요셉의 일을 모세가 하고 있는 것이에요.
영적으로 보면 모세와 요셉은 같은 인물이에요.
요셉은 죽었으나 관 속에서 죽지 않고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어요.
모세가 홍해를 가르지요.
홍해는 죽음을 상징해요.
죽음의 강을 요셉이 가른 것이에요.
왜냐하면 요셉이 죽음을 이긴 자로 있기 때문이에요.
모세가 요셉을 메고 홍해를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 홍해가 갈라진 거에요.
이건 마치 예수님이 무덤 문을 여신 것과 같아요.
갈라진 홍해 길을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온 자들이 마른 땅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에요.
이는 죽음을 이긴 자들의 모습인 겁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은 모두 다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상태로 나왔어요.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자들에게는 인간의 조건이 사라졌어요.
모두가 어린 양 안에서 나왔기 때문이에요.
이제부터 광야의 이스라엘은 새로운 민족이 된 겁니다.
어린 양 안에서 태어난 새로운 민족이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아브라함의 혈통은 중요하지 않아요.
어린 양의 죽음을 아는 자가 진짜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어린 양의 희생을 모르는 자는 전부 죽임당해요.
광야에서 그것을 추려내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추려내는 그 작업에 걸려든 자들이 나단과 아비후와 고라 일당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어린 양의 피를 모르는 자들이에요.
이러한 구조가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어요.
지금도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모르는 자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제외하는 일들을 하시는 겁니다.
심판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요.
에스겔서에 보면 성전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되는데 늙은 자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어요.
교회 안에서도 어린 양에 합당한 자가 있고 합당치 않은 자가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자는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구원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구원의 확신은 가짜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진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이 있는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어요.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사람은 이론으로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신앙은 경험이에요.
하나님이 방문해서 경험케 하세요.
그러므로 예수를 진짜 만난 사람은 확신이 있는 겁니다.
확신이란? 우리의 이성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에요.
이건 기적을 경험하는 것과는 달라요.
말씀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말씀으로 만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말씀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어 있어요.
표적이 아니라 말씀이에요.
표적은 그림자이고 말씀이 실상이에요.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은 달라요.
종교생활은 이성으로 하는 것이고,
신앙생활은 경험된 자가 하는 것이에요.
술람미를 보세요.
솔로몬과 술람미는 예수님과 성도 간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구원 이야기에요.
술람미는 솔로몬을 경험한 사이에요.
경험은 서로가 공유하는 것이에요.
이건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이에요.
믿어지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믿어지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경험하는 것이지 책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에요.
책으로 배운 사람을 아무리 설명해도 몰라요.
자기 지식으로 이해할 뿐이에요.
그러나 신앙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구원은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부대낌이에요.
그래서 제가 신앙 생활은 예수님과 스킨쉽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사건을 통해서 비록 내 꼬라지가 옳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죄사함을 믿음으로 경험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성령의 보증을 받은 사람은 자기 꼬라지로 인하여 주눅 들지 않아요.
내 꼬라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구원은 취소되지 않아요.
이러한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이러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는 삶 자체가 신앙생활이에요.
삶 따로 신앙 따로가 아니고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살아가는 삶을 대충대충 살 수가 없듯이
신앙생활도 대충대충 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신앙생활을 취미 생활하듯이 하는 사람들은 교인이지 성도가 아니에요.
교인들은 종교생활을 하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요.
종교생활은 시간 나면 하지만
신앙생활은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에요.
종교생활은 자기 기분 따라 하지만
신앙생활은 우리의 기분과 상관없이 하게 되어 있어요.
종교생활은 취미이기 때문에 의무와 책임이 없지만,
신앙생활은 삶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의무이고 책임이에요.
스스로 속지 마세요.
고린도후서 13장을 보세요.
고후 13: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신앙생활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예수님이 하세요.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생명을 보여주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겉 사람은 날로 후패해져 가지만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우리 인생을 우리 맘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에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너희 안에 믿음이 있는가 시험해 보라고 하잖아요.
내가 지금 예수를 가슴으로 믿고 있는지 아니면 머리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자는 신앙생활을 대충대충할 수가 없어요.
우리 안에 계신 그 분이 그렇게 하도록 방치하지 않아요.
계속 간섭하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과 스킨쉽을 하는 장소에요.
애굽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애굽에서는 만나 주시지 않아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광야로 나오면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겁니다.
광야가 교회에요.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에요.
광야에서 시내 산 위에 계시던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스라엘 진 속으로 들어오셨듯이
지금은 교회에서 말씀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었으나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동거하고 있어요.
이 그림이 구약 마당에서 요셉은 비록 죽었으나 관속에서 이스라엘과 동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객관적인 사실을 주관화하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객관적 사실이에요.
요즘 말로 팩트에요.
그러나 그 예수를 믿는 것은 다 달라요.
어떤 이는 예수님 이야기를 역사적 이야기로만 듣는 이가 있고,
어떤 이는 예수님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믿는 사람이 있어요.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예수를 믿어요.
예수님이 죽어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겁니다.
성령이 객관적인 사실들을 주관적으로 믿어지도록 일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우리 안에서 주관화되면 예수님이 나와 동행한다는 사실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셉의 시신을 관에 넣어서 출애굽 할 때까지 이스라엘 속에 두신 겁니다.
요셉은 죽어서도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겁니다.
이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한 순간도 버려두지 않음이 됩니다.
늘 함께하고 계신 겁니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1-7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스라엘은 자녀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이 말씀이에요.
너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가르쳐요.
이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조성하시는 분이에요.
조성이란? 만들어 가신다는 뜻이에요.
조성하려면 함께 동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는 어떤 원인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이에요.
구원과 마찬가지에요.
영적 의미로 창조나 구원이나 동의어에요.
원인이 언약이에요.
만물의 창조는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이고,
이스라엘의 구원은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에요.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똑 같아요.
모두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고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이에요.
이게 새 언약으로 나타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는 말에 자기 이름을 넣고 불러보세요.
이 사실이 믿어져야 세상을 이길 수가 있어요.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창세전에 영생주시기로 작정을 하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이 믿어지게 하신 겁니다.
이 믿음은 모두에게 주시지 않고 오직 언약의 후손에게만 주셨어요.
그것이 구약 마당에서는 그림자로 혈통적 이스라엘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실상으로 영적 이스라엘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별별 놈이 다 있어요.
이것이 구약에서는 12 지파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12 제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을 확장하면 온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들을 하늘 예루살렘이라고 해요.
하늘 예루살렘은 12가지 보석으로 지어졌어요.
보석마다 다 성질이 달라요.
그러나 모두가 등불이신 어린 양의 빛을 받아서 빛을 발하게 되어 있어요.
각자의 색깔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12가지 보석은 다 달라도 하나에요.
서로가 건물의 벽돌처럼 연결이 되어 있어요.
그 안에 어린 양이 등불로 계신 겁니다.
이건 우리 교회의 모습이에요.
교인들마다 개성이 다 달라요.
다 개 같은 성질머리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 동일한 것은 모두가 그 속에 등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겁니다.
이들이 서로 하나가 되어서 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 속에 예수님이 계세요.
마치 요셉이 관 속에서 이스라엘과 함께하고 있듯이 말이에요.
이제 정한 때가 되면 다 이 세상에서 출애굽을 하게 될 것이에요.
그 때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비록 모자라고 못났어도 하나님의 자녀들이에요.
하나님이 방문하시면 한 알갱이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서 하늘나라로 둘러메고 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장의 나팔 소리로 강림하신다는 말은 자는 자들을 다 깨워서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함이에요.
우리는 이 소망의 말씀을 받았어요.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하고서는 뭐라고 하는가요?
물 속에도 집어넣고
불 속에도 집어넣는다고 하지요.
하지만 물도 엄몰치 못하고 불도 태우지 못해요.
왜냐하면 물과 불을 이기신 분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언약의 후손은 이 두 가지를 다 통과해요.
이 두 가지를 통과한 자들이 언약의 후손이에요.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는 것 속에 들어가 있는 자들이에요.
물과 불은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를 가려내는 시험지와 같아요.
모세 안에서 홍해를 건넌 자들은 한 사람도 낙오된 자들이 없었지만,
애굽의 바로와 홍해에 들어간 자들은 다 몰살당하였어요.
하나님 안에 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불 속에서도 살았지만,
느브갓네살에게 속한 자들은 풀무불 입구에서 다 타 죽었어요.
이 방법은 지금도 유효해요.
하나님은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를 가려내기 위하여 물과 불로 시험을 하세요.
하나님의 백성은 물과 불의 고난을 통과하게 되어 있어요.
물과 불 가운데를 통과할 때 가짜들은 물에 빠지고 불에 타버리지만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은 물에 빠지지 않고 불에 타지 않고 다 나와요.
물과 불에서 벌벌 기어 나오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 속에 집어넣는 사람들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얼마나 불쌍하게 생각했겠어요?
그냥 신상에게 절 한번 하면 될 걸,
왜 그리 고집을 부려가지고 불 구덩이 속에 들어가 타 죽어야 하느냐,
에휴 못난 사람들 같으니라구,,,,
그런데 이들이 불 속에 들어갔는데 타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서 걸어다니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흰 옷 입은 어떤 분과 말이에요.
그 분은 불이 태울 수가 없는 분이에요.
흰 옷 입으신 분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안아주는 거예요.
그림을 잘 그려 보세요.
한쪽은 불 속에 들어가 있고
한쪽은 불 바깥에 서 있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쌍하다고 하는 겁니다.
불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불 속에 들어간 사람들을 불쌍하다고 하고,
불 안에 있는 사람들은 불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하다고 하는 겁니다.
불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불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지옥에 갔다고 슬피 울고,
불 안에 있는 사람들은 불 바깥의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알고 슬피 울고 있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십자가 너머가 불 속의 세상이고,
십자가 이쪽이 불 바깥의 세상이에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저주라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예수님은 십자가 너머 세상으로 가셨어요.
그곳이 물이 엄몰치 못하고 불이 태우지 못하는 세상이에요.
천국은 물과 불 너머에 있어요.
물과 불은 믿음이 없는 자는 건널 수가 없어요.
성도들은 믿음이라는 수레를 타고 물과 불의 강을 건너가요.
물과 불은 믿음이라는 수레를 엄몰치 못하고 태우지 못해요.
온 세상이 홍수로 뒤덮여도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식구들은 요동치 않고 평안이 있었어요.
그 방주가 거룩한 산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아라랏 산은 물과 불이 엄몰치 못하는 곳이에요.
그곳은 홍수도 엄몰치 못하는 새 감람나무들이 있는 곳이에요.
아라랏산은 천국을 상징하는 곳이에요.
지난번 뉴스에 나온 소식이에요.
스티븐 호킹 박사가 발표한 기사 내용이에요.
지금까지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하였어요.
그런데 스티븐 호킹 박사가 연구한 새로운 이론에는 블랙홀에 빠지면 끝이 아니고 반드시 출구가 있다는 거예요.
이쪽에서 빠지면 저쪽 출구로 나가는데 거기는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거예요.
놀라운 발견이에요.
이건 천국 이론이에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블랙홀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죽음을 끝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 슬퍼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는 죽음은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가는 문이에요.
죽음이라는 문을 지나가면 영생이라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어요.
블랙홀을 죽음이라고 보란 말이죠.
이쪽에서 봤을 때 죽음을 끝인 줄 알았는데 이후에 다른 세상이 나온다고 하잖아요.
난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런 걸 연구했는지 모르겠어요.
대단한 발견이에요.
복음적으로 이해를 좀 하세요.
난 그걸 보고 세상에 천국을 물리학이 증명해주는구나 생각했어요.
과학의 끝에 천국이 있어요.
죽음이라는 블랙홀이 있어요.
거기에 빠지면 다른 세계로 나가요.
그 세계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상이에요.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다른 세상으로 옮겨 가요.
그 세상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에요.
홍해 건너 광야로 가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가 없듯이,
죽음이라는 터널을 빠져나가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놓고 건너가게 하고는 다시 합쳐버리지요.
다시 합쳐진 홍해는 인간이 가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죽음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인 겁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면 처음 하늘과 땅은 간 곳이 없어진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마지막을 요셉이 입관하였다로 장식하는 거예요.
요셉은 죽음 너머 사람으로 애굽에 있는 백성들과 함께하는 겁니다.
요셉의 육신은 죽었지만 영으로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거예요.
우리 예수님도 그러해요.
육신으로는 죽었으나 성령으로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삶이 고난일지라도 하나님은 관 속에 들어간 요셉처럼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함께 하고 있음을 믿음으로 보아야 해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들어도 낙망하지 마시고 예수 때문에 당하는 아픔이라 생각하시고 믿음으로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이 동행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에요.
솔직히 살아오면서 신앙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이 있었잖아요.
그럼에도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간섭해 오셨기 때문이에요.
여기까지 온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물 가운데서도 빠져 죽지 않고 불에 타 죽지 않고 있는 것이에요.
어떤 고난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어코 우리를 고난 속에서 끄집어내서 약속하신 그 나라로 데리고 가세요.
마지막으로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더 초즌(The chosen. 부름을 받은 자)이라는 드라마에 보면 다예누 만찬이 나옵니다.
다예누란?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수전절이 되면 식탁을 베풀고 지나온 이야기들을 해요.
*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하셨으되 애굽인을 심판하지 않으셨더라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하나님께서 애굽인을 심판하셨으되 그들의 우상을 멸하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하나님께서 그 우상을 멸하셨으되 그 장자를 죽이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그들의 장자를 죽이셨으되 그들의 부를 주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그들의 부를 우리에게 주셨으되 바라를 가르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하나님께서 바다를 가르셨으되 마른 땅을 지나도록 안도하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우리가 마른 땅을 지나도록 인도하셨으되 압제자를 수장하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압제자를 수장하셨으되 40년동안 광야에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40년동안 광야에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셨으되 만나를 먹이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셨으되 안식일을 주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셨으되 시내산으로 우리를 이끌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내산으로 이끄셨으되 토라를 주지는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토라를 주셨으되 이스라엘 땅에 인도하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 우리를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하셨으되 거룩한 성전을 허락하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다예누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한 과정 한 과정을 되뇌이는 것이에요.
지나고 보니 이러저러한 일이 없었을지라도 감사한 것 뿐이라는 것을 신앙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제자들이 돌아가면서 한 소절씩 말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 때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감지하지 못하는데 사도 요한의 형인 큰 야고보가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을 알고 울면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큰 야고보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늘 가까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갖가지 기적을 보면서 예수님의 나라가 곧 이를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시몬을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니까 질투심이 발동하여서 어머니 살로메에게 불만을 하는 겁니다.
이에 살로메가 예수님에게 주의 나라가 임하면 요한과 야고보를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합니다.
갈릴리에서는 그랬어요.
그런데 막상 예루살렘에 올라와서는 예수님이 자신이 서기관과 장로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엄청 아파해요.
자신의 철 없음을 애통해 하는 거에요.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에 의미를 달리 이해하고 있어요.
그런데 큰 야고보는 실제로 알아들은 겁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메시야와 함께하고 선택을 입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큰 일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눈물이 나는 거예요.
지금 이 자리가 너무도 귀한 것임을 알고 감사의 고백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추가로 다예누를 하는 겁니다.
*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전을 허락하셨으되 우리 일생에 메시야를 보내주지 않으셨어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기다릴 것이니 주님께서 저희를 택하셨고 이 순간을 택하셨으니 그거면 충분합니다 라고 합니다.
지금 메시야를 만난 것이 감사이고,
함께 한다는 것이 감사인 거에요.
설령 지금 자신과 함께하는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도 자신은 더 기다릴 수 있다는 반어법으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예수님은 이미 메시야이기 때문이에요.
다예누는 만족하는 신앙고백이에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라는 말은 지족하면 자족한다는 말과 같아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지금의 현실이 고마운 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엄청난 은혜를 받았어요.
그럼에도 우린 늘 결핍으로 살고 있어요.
마치 거머리처럼 배가 터지는데도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 먹고 있어요.
만족할 줄 모르고 매일 매일 다고 다고 하고 있어요.
더 갖고 싶어하고,
더 높아지고 싶어하고,
더 대접받고 싶어하고,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는 다예누 신앙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먹먹했어요.
창세전 언약을 처음 깨달았을 때 그 감동들이 많이 희미해져 있기 때문이에요.
영감도 예전 같지 않고 모든 것이 둔감해진 것입니다.
마음이 많이 아파요.
요즈음은 많이 울어요.
말씀을 전하는 것도 두려워지고,
목회를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하고,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책상머리에는 빵 한 조각을 놓고 기도하는 할아버지 사진을 걸어 놓고도 내 잔이 넘치나이다 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부적 환경은 예전과 비교하면 훨씬 나아졌음에도 왜 기쁨이 없을까?
왜 기쁨과 감사가 사라질까?
한마디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겁니다.
이러다가 엘리처럼 말씀과 이상이 흐려지면 어떡하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찾으면서 회개하고 있어요.
다시 처음 사랑을 회복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주여 종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주님의 긍휼이 없이는 한시라도 살 수 없는 종입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 비취사 나로 빛 가운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말씀이 늘 달음질하게 하여 주세요.
몸은 늙어가도 모세처럼 눈이 밝고 영감이 흐려지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어요.
다예누 신앙은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신앙이에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이 정도면 되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다예누 신앙을 회복하여야 할 때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기쁨이고,
교회로 모이는 것이 설렘이고,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 것이 황홀해야 해요.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셔야 해요.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왜 무엇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렸고 감사를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신앙은 늘 오르락 내리락 하지만 하나님은 여일하세요.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셔서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주세요.
일을 계획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일을 행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일을 성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세요.
처음과 나중이고
시작과 끝이고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이세요.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이 이렇게 인도하신 거예요.
앞으로도 마찬가지예요.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앞으로도 지켜주세요.
이걸 믿으셔야 해요.
여기까지 지켜주시다가 앞으로 힘이 없어서 못 지켜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셨으면 반드시 성취하는 하나님이세요.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에요.
비록 세상을 살아가는 삶 속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있거들랑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아픔이라고 생각하세요.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세요.
힘들고 어렵더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아시고 범사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창세기 강해를 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속에서 우리들의 구원 이야기로 눈을 열어서 보게 하시고 귀를 열어서 듣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서 믿어지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요셉은 죽었으나 입관하여 백성들과 함께하는 것이 예수님 이야기로 들려지게 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믿음으로 우리 곁에서 함께 하고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인지하게 하여서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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