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강. 미이라로 열조로 돌아간 야곱 (창세기 49:29-50:14)
창 49:29-50:14절.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50:1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청컨대 바로의 귀에 고하기를 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 바로가 가로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비를 장사하라 7.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떼와 소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10. 그들이 요단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호곡하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비를 위하여 칠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가로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강 건너편이더라 12. 야곱의 아들들이 부명을 좇아 행하여 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 요셉이 아비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군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야곱이 죽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죽음으로 마감하였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잔치 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고 했어요.
이는 망자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너도 이런 날이 곧 다가오니까 죽음을 준비하고 살아가라는 겁니다.
사람이 한번 죽은 것은 정하신 이치이고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살았을 때 잘하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살아가라는 겁니다.
지혜로움이란? 죽음 이후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한한 것입니다.
즉 태어난 날이 있으면 죽을 날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에 속한 모든 생명은 시작과 끝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유한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우리 인생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유한의 법칙을 적용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태어난 날이 있으면 반드시 죽을 날이 있는 겁니다.
유한과 무한은 짝이에요.
무한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고 유한은 보이는 세계에요.
유한은 무한으로부터 나왔어요.
유한은 피조물이 살아가는 역사이고,
무한은 창조주가 살아가는 묵시의 세계인 겁니다.
유한의 세계를 죽음의 나라라고 하고,
무한의 세계를 영생의 나라라고 해요.
영생하시는 창조주가 잠시 있다가 사라질 피조물을 왜 만들었을까요?
그건 어떤 목적에 의해서입니다.
그 목적이 다하면 철거를 하세요.
히브리서 1장을 봅시다.
히 1:10-12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태초에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어요.
그런데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주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만물을 논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인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너희는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이라는 겁니다.
즉 너희들은 옷과 같이 낡아지고 의복처럼 갈아입게 되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소망적인 것은 역사에 속한 몸은 후패해 지지만 그것은 하늘로 오는 몸을 덧입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건 마치 씨앗이 죽어서 나무를 내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봅니다.
고후 5:1-10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우리 장막(흙으로 난 몸)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하늘의 신령한 몸)을 덧입게 되니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나 죽으나 주만 영화롭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즉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역사 속에서 살아간 삶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이므로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라고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이사야 40장을 봅시다.
사 40:6-9.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치라고 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에게 무엇이라 외칠까요 라고 하니,
너희 육체는 풀이고,
너희 인생의 아름다움은 들은 꽃과 같다고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신다는 뜻이에요.
이 사실을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에 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해요.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내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선택이 된 민족이라는 겁니다.
너희 모습이 풀처럼 마르고 실패한 것 같지만 그건 실패가 아니란 겁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내가 너희들을 통해서 창세전부터 계획된 일들을 차곡차곡 이루어 가신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실패가 아니고 망한 것이 아니지요.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1-7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이건 놀라운 일이에요.
아무도 역사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것이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말하고 있어요.
이는 많은 민족들 중에서 이스라엘을 콕 집어서 너는 내 것이라고 찜했다는 뜻이에요.
왜 찜을 했는가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함이에요.
그런데 다스려가는 방법이 이상합니다.
평탄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물 가운데로 지나게 하고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한답니다.
이건 극과 극인 고난 속으로 인도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무슨 이런 사랑이 있나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 법하고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이걸 이해하는 것이 신앙이에요.
넷플릭스에 보면 제목이 “더 초즌(The Chosen): 부름 받은 자 & 선택을 입은 자” 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4 복음서를 바탕으로 한 예수님의 사역을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에요.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어린 자식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이사야 43장 1절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너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겁니다.
부모들이 아이가 태어나면 이것부터 가르쳐요.
너는 선민이다,
너는 하나님 백성이다,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라는 거에요.
그러니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극한 고난 속에서도 자부심을 갖고 사는 것이 이러한 민족적 정체성 때문이에요.
이 정체성이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살던 사람들을 하나로 결속하여 지금의 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로 국권을 회복하여서 열강 속에서 당당하게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본 종교 영화 중에서 최고라 할수 있어요.
성경을 바탕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 중에서 탑이에요.
강추하니 꼭 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 모습을 날 것으로 그려서 너무도 좋아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의 병은 고쳐주는데 정작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해결해 주지 않아요.
그러니 뿔따구가 나는 겁니다.
왜 남들에게는 해 주면 우리는 안해주느냐고 투덜거리면서 따라다녀요.
꼭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영웅주의가 아니라 실수투성이고 이기주의인 인간 그대로를 그려 놓아서 좋은 겁니다.
이런 인간들을 제자로 데리고 다니시는 예수님의 그 아픈 마음을 읽을 수가 있어서 좋았어요.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셨듯이 자기 밖에 모르는 짐승 같은 인간들을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참 마음에 들어서 적극적으로 추천하니 꼭 보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시켜서 보면 엄청 은혜가 될 것입니다.
제목이 마치 마지막 때 부르심을 입은 욕단의 후손인 우리나라 이름인 조선(choson)처럼 들려서 좋아요.
Chosen 과 Choson 알파벳 하나만 다르잖아요.
암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이 있듯이 만물을 만드신 목적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럼 만물을 만드신 배경을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태초의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었어요.
그곳에 말씀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그런데 말씀이라는 분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어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신 분도 하나님이신 거예요.
즉 하나님이라는 하나님과 말씀이라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겁니다.
요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런데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을 아버지의 독생자라고 하세요.
이러면 하나님이신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고 말씀이신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이신 겁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에게 알려 주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세요.
그러니까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계신 겁니다.
세 분 다 하나님이세요.
세 분 하나님이 태초에 어떤 계획을 세우신 겁니다.
여기서 태초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의 세계에요.
삼위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신 겁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5-17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가 나오지요.
그가 누구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그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에요.
이는 피조물이 아니고 창조주란 뜻이에요.
그 분이 만물을 만드신 겁니다.
왜 만드셨느냐?
그를 위하여 만드셨어요.
즉 예수님을 위하여 만물을 만드신 겁니다.
왜 만드셨느냐?
예수님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고 하는 겁니다.
섰다는 말은 만물이 예수 안에서 존재한다는 말이에요.
즉 만물의 존재 목적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왜 오셨나요?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에요.
이러면 이 세상 자체가 죄 아래 놓여 있음이 됩니다.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냈어요.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땅을 저주했어요.
그리고 아담을 쫓아낼 때 그들을 범죄케 한 원흉인 뱀도 함께 쫓아냈어요.
하나님이 저주받은 땅을 뱀에게 내어주었어요.
그래서 뱀은 이 세상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뱀이 지배하는 세상을 죄악된 세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죄의 나라에요.
죄의 나라에 하나님 백성이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해 둔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오라고 하신 겁니다.
왜 죄에서 구원하는가요?
이는 죄에서 구원된 자를 하늘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이 한 무리를 선택하셨어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언약의 후손이라고 하는 겁니다.
언약의 후손들은 죄에서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로 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구약 이스라엘 속에 담아 놓은 겁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에 가는 것으로 보여주신 거에요.
창세기는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보여주고 있어요.
여기에 동원된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에요.
요셉은 야곱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 산 인물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3 사람인 겁니다.
그래서 언약을 이야기할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한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지칭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은 언약 체결 당사자로서 성부 하나님을 상징하고,
이삭은 제물로 죽었다가 살아난 자로서 성자 예수님을 상징하고,
야곱은 언약을 삶으로 풀어낸 자로서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야곱과 요셉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보여주는 한 인물이에요.
즉 야곱은 옛 사람의 모습이고 요셉은 야곱의 새 사람인 이스라엘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것을 야곱과 요셉이 성취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구원 이야기는 신약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야곱이 죽어서 조상들 품으로 돌아가는 것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 이야기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원래 야곱은 가나안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내려보내신 겁니다.
애굽에서 살다가 죽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신 겁니다.
야곱의 이러한 모습은 성도들의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이 이 세상으로 보냈어요.
이건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과 같아요.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예수 믿다가 죽으면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럼 야곱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성경의 시작을 창세기로 엽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운을 뗍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하늘은 간 곳 없고 땅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는 겁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요.
이건 죽음을 상징해요.
이건 죄로 인하여 타락한 세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죄인의 모습을 이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에요.
죄인이 살아가는 세상이나 죄인을 동일시하여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위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세요.
죄악된 세상 속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상 속에서 창조의 일을 하시기 위함이에요.
3절 이후부터 나타나는 창조 사역은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질서한 세상을 질서로 회복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이건 죽음에서 생명의 일을 하신다는 뜻이에요.
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해 가는 모습인 겁니다.
만물의 창조와 죄인의 구원은 영적 의미에서 동일한 의미에요.
영적인 의미에서 창조가 우리 안에서 엿새 동안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엿새에 속한 삶을 살고 있어요.
영적으로 죽은 자를 참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라는 엿새 동안 갈라내고 채우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창조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다 이루시고 나면 일곱째 날 안식의 세계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일이 완성되어요.
창조가 세 텀으로 일어나요.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갈라내는 창조를 말하고,
넷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는 채우는 창조를 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는 것으로 창조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창조이야기는 구원의 서정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어요.
이건 성도의 구속사를 보여주는 그림이에요.
그래서 창조와 구원은 영적 의미에서 동의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창조 사건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가 구원을 말할 때 삼 시제로 말하잖아요.
과거 구원
현재 구원
미래 구원으로 말하잖아요.
과거 구원은 출애굽과 같이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이건 존재론적으로 소속이 바뀌고 옮겨지는 구원이에요.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 라고 과거 시제로 말합니다.
창조 사건에서는 첫째 텀인 갈라냄을 당하는 것과 같아요.
현재 구원은 광야 생활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가는 현재진행형으로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이루어져 가요.
이건 수준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구원인 겁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 현재 시제로 말하는 겁니다.
창조 사건에서 둘째 텀인 채워짐을 입는 것과 같아요.
미래 구원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언약의 성취가 되는 구원이에요.
이건 예수님의 재림으로 구원의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건 영화로운 구원으로서 ‘구원을 이룰 것이다’ 로 미래 시제로 말하고 있어요.
창조 사건에서 셋째 텀인 일곱째 날 안식하는 것과 같아요.
이를 로마서에서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였어요.
부르심은 과거이고 의롭다하심은 현재이고 영화롭게 하심은 미래입니다.
이 일이 역사 속에서 엿새 동안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안식을 하세요.
이를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합니다.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합니다.
일곱째 날은 거룩하고 복된 세계로서 이 세상 밖 하나님 나라를 말해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룬 자들이 안식하는 곳이에요.
안식은 엿새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한 자에게 주어져요.
즉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져요.
예수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신 겁니다.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에요.
즉 예수 믿는 것이에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천국은 안식의 나라인데 누가 가느냐 하면 예수 믿는 자들이 가요.
예수와 원수된 나라에서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난이에요.
이건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살다가 죽어서 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야곱이 죽어서 가나안에 묻히는 것은 천지창조를 다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창세기 4장부터 시작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부터 죄인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어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자식을 낳습니다.
이러면 인류는 죄인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인류 역사의 시작과 언약의 후손이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감하고 있어요.
이러면 창세기는 인류 전체의 구속사를 함축하고 있음이 되는 겁니다.
아담으로 시작이 된 역사가 야곱(요셉)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50장은 야곱과 요셉의 죽음을 동시에 담고 있어요.
야곱이 죽고 난 후 요셉의 죽음 이야기를 바로 연결하는 것은 야곱과 요셉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에요.
야곱에게는 두 인생이 있어요.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 꾀로 살아간 인생과,
얍복강 이후 절름발이가 되어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있어요.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줍니다.
얍복강 이전에는 야곱의 인생을 살았고,
얍복강 이후는 이스라엘의 인생을 살았어요.
얍복강 이후 이스라엘의 인생을 요셉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요셉을 야곱의 약전에 기록해 놓은 거예요.
요셉을 야곱의 약전에 기록한 것은 요셉이 야곱의 2기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야곱이 요셉이 낳은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기 아들로 삼고서 아버지로서 축복을 한 것입니다.
성경 66권은 한 권이면서 각 권으로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전체가 하나의 중심사상으로 전개가 되지만 각 권마다 그 이야기를 다 담고 있다는 뜻이에요.
창세기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다 알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 모든 성경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마치 주제별로 이루어지는 연속극처럼 주제가 주제를 연결하면서 하나의 서사(敍事)를 말해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창세기에만 나와 있어요.
창세기는 세 사람의 열전이에요.
이 세 사람 속에 모든 성도가 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야곱으로 끝나요.
그러므로 창세기는 모든 성경을 다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부터 모든 성경은 창세기의 해설판과 같은 것이에요.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한 권에 다 담아 놓았지만
출애굽기 이후부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 이야기로 쭉 펼쳐 놓은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부터는 야곱의 12아들로 번성을 한 언약의 후손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전개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에요.
창세기에서는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언약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함축해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세 족장 이야기는 곧 우리들 이야기인 겁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다 우리 이야기에요.
그래서 오늘 살펴볼 야곱의 죽음 속에는 우리의 죽음도 담겨 있는 겁니다.
야곱은 죽음으로 역사 속 인생을 마감하고 열조로 돌아갑니다.
야곱이 역사 속에서 모든 일을 마치고 열조로 돌아간다 함은 마치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는 것과 같아요.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안식으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에요.
구원이란?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이는 죄인을 구원하는 것을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어요.
첫 번째 비유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고,
두 번째 비유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것이고,
세 번째는 탕자 비유로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들을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말해 주고 있어요.
잃어버렸다는 것은 원래 주인의 소유였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정에 의해서 잠시 잃어버려진 모습으로 있는 것이에요.
주인이 누구인가요?
삼위 하나님을 상징해요.
양의 주인인 목자는 성자 하나님을 상징하고,
드라크마의 여주인은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고,
탕자의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을 상징해요.
성자 하나님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자기 양을 찾으러 오셨어요.
성령 하나님은 어린 양의 신부들이 신랑이 주고 간 결혼 빙폐물을 잃어버려서 등불이 되어서 다시 찾아주는 일을 하세요.
성부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 열어 놓고 기다리고 계세요.
하나님 아버지 입장에서 최초에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아들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구원의 첫 열매인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는 분이에요.
그런데 오셨어요.
왜 오셨느냐?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찾으러 오신 것이에요.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들을 찾으려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시지요.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왔다고,,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그러면서 아무나 내게 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어 주는 자라야 내게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이끌어 주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요?
이는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한 자들이에요.
이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생명인 영생을 아버지께서 이끌고 오는 자들에게만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이 일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그리고 본래에 계시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셨어요.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4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태초라는 하나님 나라가 있었어요.
그 나라는 만물이 있기 전에 있던 하나님 나라에요.
이곳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계셨어요.
삼위 하나님이 무언가를 계획하시고서 만물을 만드신 겁니다.
하나님이 태초라는 창세전에 계획하신 것을 이루시려고 없던 만물을 만드신 것이에요.
이러면 만물은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창조가 된 것이지요.
필요가 다하면 철거하세요.
그래서 시작과 끝이 있는 세상을 만드신 겁니다.
그 계획이 다 이루어지면 철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철거할 세상을 만드셨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화가가 그림을 캔버스에 그립니다.
그림은 캔버스에 그려지기 전부터 화가의 머릿속에 있었어요.
화가는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캔버스를 산 것이에요.
이건 마치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하신 그림을 그리시려고 만물을 만드신 것과 같아요.
그래서 만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에요.
창세전에 하신 계획을 우리는 편의상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에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만물이 창조가 되었어요.
창세전 언약의 내용을 봅시다.
에베소서 1장을 봅니다.
엡 1:3-14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어요.
여기서 우리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말해요.
즉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겁니다.
이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 아래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죄 아래 부정한 모습으로 있는 자기 백성들을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 거룩하게 흠이 없게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세요.
그럼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 죄인에서 거룩한 백성의 지위를 회복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되는 겁니다.
이 모든 일들을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인 창세전에 미리 예정을 하셨어요.
그것도 그 기쁘신 뜻대로 말이에요.
이 거대하고도 장엄한 드라마를 역사 속에서 펼쳐 가시는 겁니다.
이름하여 예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에요.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의 내용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에요.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서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 너무나 기쁘고 황홀한 겁니다.
그래서 찬송부터 하고 웅장한 드라마의 서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부터 종말까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라는 드라마를 찍어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전에 북경 올림픽 개회식을 할 때,
중국의 5천 년 역사를 두루마리에 그려 놓은 것을 보았어요.
자신들이 5천 년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면서 두루마리로 쫙 펼쳐 보이니까 5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적 사실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를 확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자랑스러워하던 5천 년 역사가 일순간에 두루마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어요.
이건 마치 요한계시록에서 세상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사라진다는 것과 같아요.
마치 창세전 언약과 같은 겁니다.
이 세상 역사가 그러해요.
펼쳐졌다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면 이 역사는 용도가 다하여서 폐기하실 것이에요.
그럼 역사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아지는 것으로 진행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존재하는 것과 같아요.
이건 선재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은 언제든지 나올 수가 있잖아요.
즉 화가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처럼 말입니다.
화가는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정한 때가 되면 화폭에 펼쳐 보이잖아요.
또 다른 비유로 영화의 시나리오 속에는 출연하는 배우들이 있어요.
이들은 촬영이 시작되면 나타나요.
나타나서 있는 것이 아니고 시나리오 속에 이미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겁니다.
그럼 묻습니다.
배우가 먼저인가요?
시나리오가 먼저인가요?
시나리오가 먼저이지요.
시나리오가 없으면 배우는 없는 존재에요.
배우를 존재케 하는 것은 시나리오에요.
그러니 시나리오가 먼저이고 배우가 나중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먼저이고 우리가 나중이에요.
언약 속에 있으면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언약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말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으로 보내실 때는 종으로 보내어졌어요.
죄 아래 가두어진 상태로 말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 와서 구원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역사를 운행하는데 있어 창세전에 계획된 대로 운행을 하세요.
우리의 구원 이야기는 지금 펼쳐질 뿐이지 이미 창세전에 완성된 그림으로 있었어요.
잘 보세요.
예수님이 창세전에 계셨잖아요.
그럼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도 이미 창세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정한 때를 따라서 펼쳐 보이는 것이에요.
갈라디아서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때가 차매’ 라고 합니다.
‘때가 차매’ 라는 말은 ‘정한 때’라는 뜻이에요.
정해진 때가 되면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정한 때에 오셨어요.
우리도 정한 때가 되어서 부르심을 입었구요.
마치 시나리오 속에 있던 배우를 사건 속으로 투입시킨 것과 같아요.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지만 이 일은 이미 창세전부터 계획이 되었던 일이에요.
지금 일어난 일이지만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있었던 일인 겁니다.
예레미야 1장을 보세요.
렘 1:4-5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예레미야가 잘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예레미야가 왜 찾아오셨어요,
응 이제 내가 너를 좀 쓰려고,
왜요?
내가 너를 태어나기 전에 선지자로 찜을 해 두었거든,
오잉,,,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다고 합니다.
만들기 전에 선지자로 지명했다고 해요.
이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믿음으로는 얼마든지 이해가 되어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레미야를 선지자 배역을 맡겨야 하겠구나 라고 찜을 해 놓은 겁니다.
예레미야는 이 일 때문에 창조가 된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찾아가서 너 이제부터 선지자 해 라고 사역을 시키신 것이에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전우치’ 라는 영화로 예를 듭니다.
전우치는 그림 속에 있는 영물이에요.
그림 속에 있는 영물을 도사들이 주문으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얏 ~ 하면 그림 속에 있던 전우치가 '짠' 하고 나타나요.
그리곤 다양한 사건으로 벌리면서 영화 속 그림들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즉 역사 속에서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도사가 다시 주문을 외우면 본래의 자리인 그림 속으로 쏙 들어가요.
이건 마치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와 같아요.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 나라에 계셨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린 창세전 언약이라는 그림을 그리려고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겁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셨어요.
말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창조 사역이에요.
창조를 다른 말로 구원이에요.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세상에 오신 겁니다.
왜냐하면 육신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몸으로 치루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을 이 땅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낸 겁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에게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일들을 하고 오라고 미션을 주신 겁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 말씀이신 하나님이 하실 일이 담겨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에요.
이름 속에 이미 심판성이 담겨 있어요.
자기 백성이라고 하잖아요.
이는 자기 백성 아닌 자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와 저희를 갈라내는 일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가면 너희와 저희로 쫙 갈라져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져요.
이걸 십자가에서 보여주었어요.
강도 둘을 놓고 예수님이 하나는 천국으로 하나는 지옥으로 갈라낸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창세전 언약 속에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너희와 저희로 갈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로 너희와 저희로 갈라내셨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천국의 비밀이 담겨 있어요.
그 비밀을 아는 자는 십자가 도를 믿고 모르는 자는 안 믿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기 백성들만 믿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한 가족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오고 나니까 너희와 저희로 갈라지는 일들이 발생한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온 인류가 한 혈통이었어요.
한 아담 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혈통으로 이루어지던 인간사를 끊어버린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혈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어요.
영의 질서라는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담으로부터 시작이 된 죄인들의 육의 질서를 끊어버리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영의 질서로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 세계가 나누어지게 되었어요.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있고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너희와 저희라고 하였어요.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9-13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참 빛으로 이 세상에 보냅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을 창조 첫 날을 연상시키는 말씀이에요.
창조 첫째 날이 어떤 것인가요?
빛이 있으라 잖아요.
이 빛이 참 빛이에요.
그러니 창조 첫째 날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참 빛에 의하여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로 나누는 것을 말해요.
참 빛이 오심으로서 창세전 언약이 시작된 것이에요.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에 두 민족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참 빛으로 이 세상에 보냈어요.
누구든지 그 아들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기로 하셨어요.
그런데 아무도 몰라보는 겁니다.
왜 몰라보는가요?
이는 육으로는 알 수 없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아들을 영접하게 해 놓으셨어요.
그것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영접하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영접하는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는 사람만 영접하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는 사람인가요?
이는 창세전에 하나님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해 놓은 자들이에요.
이 세상에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와 되지 않은 자가 있어요.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자 두 부류로 갈라지는 겁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너희는 믿었고 저희는 거부하였어요.
왜 하나는 믿고 하는 거부하는가요?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었고,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천국이 믿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을 하셨기 때문이에요.
이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의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녹명된 자들은 반듯이 구원해 내세요.
이것을 잃은 양을 찾는 것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지중해를 건너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 찾아오신 것입니다.
자옥아 자옥아 하면서 말이에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창세전에 예정하셨다는 이야기가 기뻐야 되는데,
기분 나빠 하는 자들이 있어요.
이름하여 인본주의 알미니안주의자들이에요.
이들은 예수 믿는 것을 자기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진다고 해요.
그래서 마음을 열어서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주체를 자기들이 행사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마치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던 율법사와 같아요.
율법사는 영생 얻는 방법만 알면 자기가 하겠다는 겁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그래요.
이들은 예정론을 이야기하면 뿔따구를 내요.
그들은 하나님이 다 하면 인간은 뭐냐?
우리가 로봇 이냐 라면서 비아냥 거려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을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고 해요.
이건 천국과 지옥을 자기가 선택하겠다는 것과 같아요.
이게 교만이고 죄에요.
죄가 뭐냐?
자기가 하나님같이 되는 거예요.
이건 뱀이 여자를 미혹하던 말이에요.
여자는 뱀의 말을 듣고 자기가 하나님같이 되고자 선악과를 따 먹고 죽었어요.
하나님은 자기가 하나님같이 하겠다고 하는 놈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았어요.
죄인은 결정권이 없어요.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요.
넌 죽은 놈이야,
죽은 놈이 무슨 결정을 해,
넌 개뿔도 아니라고,
넌 그냥 먼지야,
훅 불면 사라질 먼지라고,
먼지 주제에 뭘 하겠다고 나대느냐고 해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자식을 낳습니다.
이름하여 죄인의 자식들이에요.
두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어줍니다.
장자는 가인이라 짓고 차자는 아벨이라 지었어요.
가인의 이름은 “얻음” 이라는 뜻이고,
아벨의 이름이 “허무” 라는 뜻이에요.
얻음이라는 가인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자이고,
허무라는 아벨은 난 아무 것도 아닙니다로 살아가는 자에요.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고 아벨은 하나님께 속하였어요.
가인처럼 악한 자에게 속한 자들은 자기 주체를 챙기는 일을 하고,
아벨처럼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난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라’ 라고 살아가요.
이게 교회 안에 그대로 셋팅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예수를 믿어지게 해주어서 믿는 자들이 있고,
자기가 예수를 믿어서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예수를 믿어지게 해주어서 믿는 자들을 신본주의자라고 하고,
자기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을 인본주의자라고 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은 아벨처럼 아무 것도 아닌 자로 보냈어요.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죄란? 자기 주체 챙기기에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자기가 주인으로 태어나요.
그래서 자라가면서 자기 꿈을 이루고자 경주하는 겁니다.
세상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내 꿈을 펼쳐라,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우린 모두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어요.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실상을 알게 된 겁니다.
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마치 베데스다 못이 동하여도 들어갈 수 없는 38년 된 병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네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삶 속에서 나는 부인되고 예수만 드러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가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서 예수가 믿어지게 하시고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도록 간섭해 주시는 겁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산 자들이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에게 인생을 차압 당하였어요.
히브리서 11장은 하나님에게 인생을 차압 당한 사람들 이야기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주어가 ‘믿음으로’ 인 겁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전부 믿음으로예요.
이는 믿음이 이들을 각양의 삶으로 인도하셨다는 뜻이에요.
이건 우리더러 이 사람들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그 반대에요.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간섭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더러 본받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성경은 어떤 인물은 본받으라고 하지 않아요.
누구를 본받자고 하면 안 돼요.
아브라함은 본 받을 인물이 아니에요.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하나님을 보셔야 한단 말이에요.
아브라함의 배후에 일하신 하나님을 보란 말이죠.
성경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을 이야기해놓고 12장에 허다한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증인들 중에 제일 먼저 누구를 말하느냐?
예수님을 먼저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냐?
믿음으로 살았던 최초의 사람인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제일 먼저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이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고 부활하여서 하나님에게 올라가신 첫 번째 분이세요.
그래서 첫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구약에 무덤 속에 있던 자기 백성들 전부 끄집어내 가지고 데리고
올라가는 거예요
그 모습이 오늘 본문의 모습이에요.
야곱이 지금 죽어서 가나안으로 올라가잖아요.
야곱의 시체 뒤를 온 이스라엘 백성이 따라가는 거예요.
어디로 따라가나요?
가나안 땅으로 따라가지요.
그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에요
거기에 누가 있나요?
열조가 있어요.
하나님은 야곱 사건을 가지고 예수님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겁니다.
야곱이 어디에 살았나요.
가나안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애굽으로 내려보냅니다.
내려보낼 때 뭐라고 하였나요?
큰 민족을 이루어서 올라오라고 하셨어요.
이건 예수님에게 주신 미션과 같은 것입니다.
야곱이 죽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오지요.
가나안은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해요.
하나님 나라에 계시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어요.
이 땅에 오셔서 죽임당했어요.
그 죽음을 근거로 해서 자기 백성을 몽땅 어디로 데려가느냐?
다시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을 애굽에 내려보내서 죽게 만드신 겁니다.
죽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라고 하신 거예요.
혼자 오지 말고 큰 민족을 이루어서 오라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야곱이 죽어서 큰 무리를 이끌고 가나안으로 올라오는 겁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야곱의 시신을 앞세우고 전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마치 개미행렬처럼,
참 재미있는 것이 본문을 보세요.
창 50:7-9절.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야곱의 장례 행렬을 보세요.
후손들만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고 애굽 사람들도 데리고 오지요.
바로 궁에 있는 장로들과 애굽에 있는 모든 장로들과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함께 올라오는데 그 떼가 심히 컸더라고 하지요.
이건 마치 야곱이 낚시 줄에 꿰어서 줄줄이 달고 올라오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만 구원시킨 것이 아니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동시에 구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겁니다.
이방인 성도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가나안을 땅으로 보지 말고 조상으로 보세요.
야곱이 죽어서 어디로 갔나요?
열조에게 돌아갔어요.
49장 33절에서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열조란 조상을 말해요.
야곱의 조상이 누구인가요?
아브라함이죠.
삼단논법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선택했지요.
왜냐하면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주어진 것이잖아요.
창세전 언약은 어디에서 주어졌나요?
예수 안에서 주어진 거예요.
그러면 열조가 예수가 되는 거지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열조는 예수님인 겁니다.
예수님이 모든 성도의 조상이에요.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계시지요.
예수님이 계신 하늘 나라가 가나안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품으로 가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줬잖아요?
하와가 어디에서 나왔나요?
아담에게서 나왔지요.
하나님이 하와를 다시 아담 품으로 끌고 가지요.
아담과 하와는 원래 한 몸이었는데 잠시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된 상태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해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안식이라 하구요.
만물이 주께로부터 나왔다가 주로 말미암아 살다가 주께로 돌아가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사역을 잘 마치고 간 곳이 어디인가요?
천국이에요.
안식의 세계에요.
그래서 천국을 안식의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천국은 누가 가느냐?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수고하고 슬픔을 겪은 자들이 가는 것이에요.
이 땅에서 지옥 생활을 한 자들이 간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천국을 알게 하시려고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우리를 던져놓으신 거예요.
우린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환멸을 느껴야 해요.
이 세상에 더 있다 가라고 해도 우리는 싫다고 해야 해요.
병들었을 때 찾아와서 고쳐줄까 그래도 우리는 아니요 괜찮습니다 라고 해야 해요.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예 고쳐주세요 라고 하고 있어요.
히스기야가 병에서 고침 받고 나서 무슨 짓을 했나요.
성전 말아 먹는 일을 했어요.
일찍 죽었으면 안할 짓을 괜히 살아서 하고 만 겁니다.
여러분 눈에는 이게 복인가요?
저주인가요?
저주에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히스기야처럼 등신짓을 하고 있어요.
그것도 목사들이 말이에요.
환자들 찾아가서 히스기야 설교를 한단 말이에요.
그럼 좋아라 해요.
어휴 통재라,
이를 어찌해야 쓸꼬,
오래전에 우리 복권사님 어머니 이야기를 좀 합니다.
예전에 복권사님 어머님이 간경화로 병원에 입원을 하였어요.
그땐 권사님이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어요.
근데 연락이 온 겁니다.
목사님이 병문안을 좀 해달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쫓아갔습니다.
가니까 아버님과 권사님이 계신 겁니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잠깐 묵상기도를 하는데 오늘 밤을 못 넘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께 가야 할 것 같은데 죽을 준비가 되셨냐고 했어요.
이 말에 권사님도 놀래고 아버님도 놀라는 겁니다.
그러자 아내가 허벅지를 꼬집는 겁니다.
미쳤느냐
환자 앞에서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
눈을 흘기는 겁니다.
그런데 어미 입에서 뜻밖에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자신은 결혼하기 전 처녀 시절에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시집오면서 교회를 못 나가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권사님 아버님이 우체국장을 하시면서 울산 불교회장직을 맡고 있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얼마나 불심이 강했는가 하면 담을 두고 옆에 교회가 있었는데 설교 시간이 되면 불경을 틀어 놓고 방해를 했다고 해요.
그러니 어머니는 교회 갈 엄두도 못내고 살았던 겁니다.
그런데 어머님의 입에서 뜻 밖의 신앙고백이 나오니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세상에,,
권사님도 모르고 있었어요.
권사님도 모르니까 저를 만날 때마다 기도 부탁을 했거든요.
목사님 저희 부모님이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 입에서 자기는 한번도 예수님을 마음에서 빼내 본 적이 없다는 소리에 모두들 깜짝 놀란 겁니다.
아버님도 마찬가지예요.
비록 교회는 못 나갔지만 담장을 두고 교회가 있어서 예배 시간 때면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을 전했어요.
어머니의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그 오랜 세월 동안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사신 것이라고 참 잘 하셨다고,,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니까 아멘 아멘하면서 다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렇기 기뻐하고 얼굴이 얼마나 밝은 줄 몰라요.
그리고는 그 날 밤에 어머니는 소천을 하였어요.
병문안하면서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가 다 끝나고 난 후에 낙심해 있는 아버님에게 말씀드렸어요.
두 분이 얼마나 금술이 좋은지 떨어지곤 못 살아요.
그렇게 정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제가 어머니는 예수를 믿고 천국으로 가는데 아버님은 예수를 안 믿으니 지옥으로 갈 텐데 이젠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어요.
어머니를 못 난다고 하니까 낙심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머니를 만나려면 아버님이 예수를 믿어야 해요.
그럼 만날 수가 있어요.
아버님 이제부터 교회에 나가고 예수를 믿기로 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겁니다.
실제로 그 주간부터 교회에 출석하였어요.
이 분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어린아이같이 예수님 사진을 품에 안고 다니면서 예수 믿지 않는 아들하고 며느리에게 예수 믿으라고 했다는 거에요.
일 년을 그렇게 사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그 동안 일어난 일들을 아들하고 며느리에게 말을 하니까 그 후에 아들하고 며느리가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였어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제가 어머니의 병 문안을 하러 가기 직전에 권사님이 출석하는 교회에 담임 목사님이 오셔서 히스기야 이야기를 하면서 금방 나아서 퇴원하게 될 것이라며 기도하고 가셨다는 겁니다.
이건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환자들도 그런 말을 듣고자 해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오래 산다고 해야 좋아하지 일찍 죽는다고 하면 싫어해요.
죽음에 쫓기는 인생이기 때문에 반대로 죽음을 피하고 싶어하는 본능 때문이에요.
마귀라는 놈은 오래 살게 해서 땅에 붙잡아 두고자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빨리 이 땅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환경으로 몰아넣고서 오래 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세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환멸을 느끼라고 이 땅의 삶을 고난의 삶 속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마귀에게 넘겨주었어요.
그래서 마귀를 일컬어 이 세상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봅시다.
요 15:18-19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도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세상을 악하다고 고발을 하셨기 때문이에요.
세상에서 예수를 믿으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세상은 우리를 환영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으려고 하고 있어요.
꿈 깨세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터이지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신 겁니다.
이 고난의 삶을 죽음으로 벗어버리게 되는 것이에요.
21장을 봅시다.
계 21:1-4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지요.
이건 천년왕국을 말해요.
천년왕국을 뭐라고 하나요.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린 양의 신부들이 믿음의 정절을 지켰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버림을 당하고 온갖 멸시를 당하고 피눈물을 흘렸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시는 겁니다.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이제 고난 없는 곳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하지요.
이 말은 자기가 좋아하는 인생을 살아보지 못하였다는 뜻이에요.
언약에 인생이 차압당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에요.
야곱은 죽음으로 열조들이 누리는 그 평안으로 들어간 겁니다.
열조들도 모두가 야곱과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그 1호가 예수님이라고 해요.
히브리서 12장을 봅시다.
히 12:1-2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에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요.
아벨부터 시작해서 신앙의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어요.
이들을 일컬어 12장에서는 구름같은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증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음의 주라고 하지요.
믿음의 주라는 말은 믿음의 근원이라는 뜻이에요.
비록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구약의 마지막 때에 오셨지만 영적으로는 아벨 이전부터 계셨어요.
믿음으로 아벨이 제사를 지냈어요.
이는 아벨의 예수님의 의지해서 제사를 드렸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아벨의 제사 속에 예수님이 계신 겁니다.
아벨이 양으로 제사를 드린 것은 예수님으로 드린 것을 상징해요.
그래서 11장의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으뜸을 예수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삶을 산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계셨어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열조는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예수 안에서 안식하고 있는 겁니다.
열조로 돌아간다는 말은 안식한다는 말이에요.
안식을 잠이라고 해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지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주 안에서 자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성도에게는 죽음을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봅시다.
계 14: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지요.
왜 복이라고 하는가요?
수고를 그치고 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이사야 57장을 봅시다.
사 57:1-2절.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의인의 죽음을 평안에 들어갔다고 하지요.
그가 침상에서 편히 쉰다고 합니다.
이는 잠을 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지요.
자는 자들이란? 이 땅에서 예수로 인하고 고난당하다가 죽은 성도들을 말해요.
성경은 성도들의 죽음을 잔다고 해요.
이는 깨어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주 안에서 자는 자들은 모두가 깨어나요.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들의 나팔 소리로 강림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자는 자들을 깨우려고 기상나팔을 부는 겁니다.
기상나팔 소리는 새 날을 알리는 소리에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은 새로운 날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천년왕국은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 자들이 들어가요.
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 자들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시키세요.
달란트 비유를 보면 나오잖아요.
달란트를 남긴 자들에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케 하시잖아요.
하나님의 일이 뭔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세상에서 예수 때문에 미움을 받고 버려짐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들을 천년왕국에서 벌어지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일곱째 날 안식일과 같아요.
안식일을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의 안식일이라고 하지요.
즉 여호와의 안식일이에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룬 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구속사를 다 이룬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받는 것을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이러면 구약의 하나님 창조가 신약의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 안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다 마쳤을 때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것이에요.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배우들이에요.
이제 드라마가 끝나고 쫑 파티 할 날이 멀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는 다 뜻이 있어서 보내셨어요.
예수그리스도가 만유의 주가 되는 드라마에 배우로 보내신 거예요.
드라마 속에는 수많은 배역이 있어요.
이 사람에게는 이런 배역을 맡기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배역을 맡겨요.
각자 맡겨진 역할만 하면 되어요.
남의 배역을 탐내지 마세요.
이러한 배역을 교회 안에 두셨어요.
어떤 사람은 목사로 섬기고,
어떤 사람은 장로와 권사와 집사로 섬기고,
어떤 사람은 주일 학교 교사로 또한 성가대원으로 섬겨요.
이건 마치 성막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그릇들과 같아요.
성소 안에 사용되는 그릇들은 모두가 정금으로 만들었어요.
이는 그릇에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용되는 용도만 다를 뿐이지 그 가치는 다 같아요.
다 귀한 것이에요.
우리 모두가 그러해요.
다 귀해요.
그러니 천국에 가면 천사들이 우리를 수종든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지만 장차 천국에서는 우리가 천사들을 부려요.
창세기 1장에 천지와 만물을 이루는 주체는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이 다 이루셨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캐스팅하셨을 것 같으면 하나님이 다 하세요.
배우들의 코디를 감독이 다 하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하세요.
옷도 준비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몸 놀림과 말하는 대사까지 다 지도해 주세요.
우리가 살아온 신앙생활 모두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일어나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서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워가는 거예요.
그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찬송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어요.
각자의 간섭하심이 이 자리에 있게 만든 겁니다.
성도에게 있어 감사할 것 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세상에,,, 세상에,,,
말도 안 돼,
말도 안돼,
어떻게 나 같은 무지랭이를,,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에,, 세상에,,, 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신앙생활이 스스로 자랑스러우면 안 되어요.
내가 이만큼 했잖아요?
그런 거 나오면 안 되어요.
모두 하나님이 하셨구나.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천국의 모습이에요.
천국은 자기가 받은 면류관을 벗어드리는 곳이에요.
이것을 교회에서 배우는 거예요
이제부터 엄청나게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나 야곱처럼 죽음을 상세하게 기록한 곳이 없어요.
대부분 그냥 죽었더라 하면 끝인데,
이상하게 야곱은 죽은 후에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자세하게 말해주고 있어요.
이건 영적 의미가 크고 넓고 깊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야곱의 시신 처리를 통해서 뭔가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본문을 봅시다.
창 50:1-3절.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요셉이 야곱의 시신 안에 있는 것들을 다 빼내고 향 재료를 채우지요.
이건 썩지 말라고 미이라로 만드는 거예요.
미이라를 만든다는 것은 영구 보존을 위해서요.
썩지 않는 것으로 영구 보존하는 것은 영생의 모습이에요.
요셉은 야곱을 40일 동안 미이라로 만들었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40은 고난의 완성수에요.
노아 홍수도 40일 왔어요.
이스라엘도 40년 광야 생활을 했어요.
예수님께서도 40일 광야에서 시험받으셨어요.
모세도 광야에서 40년을 훈련받았어요.
또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안도했어요.
시내산에 40일 있다가 내려왔어요.
여리고 정탐꾼도 40일 정탐했어요.
4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가는 숫자예요.
야곱은 지금 죽었어요.
야곱과 요셉은 하나라고 했지요.
야곱은 옛 사람을 상징하고 요셉은 새 사람을 상징해요.
요셉은 야곱의 새 사람으로서의 2기 인생인 이스라엘로 산 사람이에요.
그럼 야곱의 속 사람 속에 누가 들어가 있나요?
요셉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옛 사람으로서 겉 사람이고 요셉은 새 사람으로서 속 사람이잖아요.
하나님 앞에 새 사람은 향기 나는 제물이에요.
그래서 요셉이 야곱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빼내고 그 속에다가 썩지 않는 향 재료를 집어 넣는 것입니다.
향 재료란? 아름다운 향기에요.
미이라를 만드는 것을 보면 사람이 죽으면 안에 있는 내용물들을 다 끄집어냅니다.
배를 갈라서 창자를 다 끄집어내고 거기다가 향 재료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리고 몰약으로 방부처리 하여서 썩지 않게 만드는 거예요.
옛 사람 야곱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은 다 빼내 버리고 그 속에 새 사람 요셉의 것들을 향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야곱은 옛 사람인데 실제 야곱 속에는 뭐로 채워지는 건가요.
새 사람 요셉의 것으로 채워지는 겁니다.
야곱 속에다가 요셉의 것을 심어놓은 거예요.
요셉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인 겁니다.
요셉이 야곱을 시신 처리하는 모습은 예수님의 시신을 처리하는 모습과 똑 같아요.
요한복음 19장을 봅시다.
요 19:38-42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마 27:57-61절.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예수님이 죽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지요.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줍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합류합니다.
이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향품으로 싸고 몰약을 발라서 세마포로 쌌어요.
이건 미이라를 만든 것과 같은 의미에요.
구약에서는 야곱의 시신을 요셉이 수습하지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시신을 요셉이 수습하지요.
둘 다 요셉이에요.
영적으로 같은 의미인 거에요.
‘아리마대’라는 말은 ‘높음’이라는 뜻이에요.
이는 높은 곳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요셉’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더하실 것이다’ 라는 뜻이에요.
이 말을 의역하면 높은 곳에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것으로 예수님 시신 속에다가 채우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이에요.
이 일을 요셉을 통해서 하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의 이름이 뭔가요?
요셉이지요.
태어날 때도 요셉에게서 태어나고
죽을 때도 요셉이 수습하는 겁니다.
잘 보시면 예수님이 누구의 무덤에 들어가는가 하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 속에 들어갔어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기가 들어갈 무덤에 예수님을 안치한 겁니다.
이 무덤은 빈 무덤이고 새 무덤이에요.
한 사람도 들어가지 않은 무덤이에요.
이러면 예수님이 요셉의 무덤에 들어간 1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서 안식하는 1호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이 높은 곳에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였잖아요.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뜻하는 거에요.
그럼 예수님은 열조로 돌아간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도 요셉이었어요.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도 요셉이에요.
예수님은 요셉으로 시작해서 요셉의 손으로 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의 모습이에요.
우리도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이 나요.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날까지 다 이루세요.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의 2기 인생의 시작을 요셉으로 하였어요.
요셉으로 시작해서 요셉으로 마무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야곱 속에다가 썩지 않을 향으로 채우는 일을 한 겁니다.
하나님의 것은 썩지 않는 것이에요.
왜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건가요.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살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이 이야기를 우리의 구속사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면 우리 옛 사람의 인생은 끝이 납니다.
이건 옛 사람의 죽음을 말해요.
예수님이 우리 속에 있는 아담의 속성을 빼내는 일을 하세요.
그리고 그 속에 영원히 썩지 않는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세요.
아담의 속성을 다 빼내 버리고 그 속에 예수님의 것들로 채워 넣는 일을 한단 말이죠.
이걸 40년이라는 역사 속에서 하세요.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이에요.
또 다시 영적으로 깊은 이야기를 합니다.
원래 히브리 장례식에는 시신을 미이라로 만드는 게 없어요.
죽으면 세마포로 싸서 돌 무덤 속에 집어넣어요.
죽어서 반석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반석은 예수님을 상징해요.
그러니까 언약의 후손들은 죽으면 모두가 예수님 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미이라 장례법은 애굽식 장례 법이에요.
왜 애굽의 장례식으로 하는가요?
요셉이 총리로 다스리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거예요.
요셉이 총리로 있던 애굽은 셈 족이 다스리던 나라예요.
그래서 애굽 왕이 하나님의 신으로 꿈을 해몽한 요셉을 총리로 세운 겁니다.
실질적으로 애굽은 요셉이 다스렸어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요셉이 다스린 나라이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겉 모양은 애굽 나라인 겁니다.
겉으로는 애굽 나라인데 그 속은 하나님 나라인 겁니다.
그래서 영구 보존되는 장례법으로 치루는 겁니다.
애굽에는 두 가지 장례법이 있어요.
미이라로 만들어서 영구 보존하는 장례법이 있고,
시신을 땅에 묻어 썩게 하는 매장법이 있어요.
미이라는 유명한 사람들에게 하고,
매장은 일반 사람들에게 해요.
유명한 사람들은 미이라로 영구히 보존하여서 후대에 그 업적을 기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야곱에게 유명한 사람에게 하는 미이라 장례법을 치른다는 것은 야곱이 유명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을 후대에 기리도록 한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기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비록 애굽에 살지만 미이라 장례법을 치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례 절차 하나까지 그 속에 계시를 담아 놓은 겁니다.
성령께서 지금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해부하는 일들을 하세요.
우리 안에는 사망에 속한 기운들인 분냄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생각과,,, 같은 옛 사람의 것들이 가득 들어 있어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아담의 속성들은 다 빼내고 예수님의 속성인 성령의 열매들로 채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채우고,
희락으로 채우고
화평으로 채우고
오래 참음으로 채우고
자비로 채우고
양선으로 채우고
충성으로 채우고
온유로 채우고,
절제로 채우는 것이에요.
우리는 날마다 제하고 새기는 일들을 당해요.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은 죽임을 당하고,
하늘의 것으로 채워짐을 당하는 거예요.
이 일을 누가 하느냐?
성령께서 하세요.
야곱의 미이라가 애굽에 있는 가족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지요.
이것이 430년 후에는 민족으로 나타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요셉의 시체를 앞 세우고 나오지요.
가족들은 야곱의 시체를 따라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갔어요.
그러나 민족적으로 나타날 때에는 요셉의 시신을 앞세우고 가나안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요셉의 시신도 미이라로 되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러한 과정을 겪게 되어 있어요.
광야에서 그들 속에 있는 애굽의 것들이 다 빠지고 향 재료로 채워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고 2세대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왜 오셨는가요.
쓴 뿌리들을 제거하시고 예수의 것으로 심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죽임당하는 일들을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픈 겁니다.
신앙생활은 아파요.
값싼 은혜에 취하지 마세요.
요즘에는 이원론 영지주의자들이 창궐해요.
복음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어요.
복음 안다고 하면서 육체의 종노릇 하면서 사는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복음을 깨달으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 사람들 있는데 그건 복음을 악용하는 악한 자들인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지식으로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 도는 삶으로 드러나야 되는 것이에요.
복음은 마치 배추 김치에 양념이 배듯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녹아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로 푹 절여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의 맛을 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은 예수의 냄새를 잃어버렸어요.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시대처럼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조롱거리가 된 적이 없어요.
기독교 인구는 1200만명이라고 자랑하지만 예수의 맛을 내는 사람은 지극히 미미해요.
오죽하면 세상이 개독교라고 비하하고 조롱하겠어요.
이 모두가 복음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어서 그래요.
속된 말로 예수쟁이 맛대가리가 없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맛나 보이는데 막상 입에 넣어보면 맛이 없어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세요.
토하여 낸다고 하잖아요.
이 시대가 라오디게아 교회에요.
신앙이 푹 삶아진 삼계탕처럼 뼈까지 흐물흐물하게 고아져야 하는데,
먹으려고 하면 닭이 살아서 꼬끼오 하고 뚝배기 속에서 나오는 것과 같아요.
이 시대 교인들이 신앙은 마치 휘발유에 확 뿌려서 태워만 놓은 통닭 같아요.
탈 때는 멋있는데 막상 먹고자 하면 하나도 안 익어서 먹을 수가 없어요.
삶아졌어야 먹지요.
복음적 지식은 잔뜩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양념처럼 배어 있지 않으니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복음을 빙자해서 게으름을 합리화시켰는가요.
누가 그렇게 가리켰는가요.
머리만 잔뜩 커서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은 선수인데 섬기고 베푸는 데는 빵점인 겁니다.
성경 어디에도 게으름을 피우라고 한 곳은 없어요.
내 신앙이 옳은지 그른지 성경을 상고해 보아서 점검을 받으셔야 해요.
내가 지금 올바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릇 행하고 있는지,
신앙은 대충 대충이 없어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한다는 것이에요.
예수의 운명에 동참하는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했듯이 띠 띠고 가는 것이에요.
그 띠는 뭔가요?
예수님이고 십자가에요.
성령이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띠 띠게 하세요.
성령이 오기 전에는 독자적으로 행동을 했어요.
그러나 성령이 오고 난 후부터는 독자적으로 행동을 못해요.
성령이 베드로를 띠로 묶은 거예요.
그때부터 베드로는 성령에 이끌려서 살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어떤 모습으로 죽었나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어요.
바울도 마찬가지예요.
성경을 보시란 말이죠.
오순절 성령 받고 난 사람들이 어디 자기 맘대로 산 사람이 있나요.
없어요.
한 사람도 없어요.
성경을 상고해 보세요.
성경에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상고해 보란 말입니다.
내가 지금 예수 믿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으면 다행이지만 아닐 것 같으면 돌이키셔야 해요.
어떻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자기 맘대로 살 수가 있나요?
없어요.
제발 달콤한 말에 속지 마세요.
왜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조 중 첫 번째를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미혹한다고 하셨겠어요.
지금이 그때예요.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시대에요.
그러니 눈 부릅뜨고 귀 쫑긋 세우고 저 목사가 하는 말이 하늘에 말인지 땅에 말인지 분별을 하셔야 해요.
저 목사가 하늘에 떠 있는 별인지 아니면 땅에 떨어진 별인지 분별을 하고 따라야 해요.
신앙은 전쟁이에요.
남에게도 속지 마시고
스스로를 속이지도 마세요.
예수 믿는 것은 취미 생활하는 것이 아니에요.
목숨을 걸어 놓고 하는 전쟁인 것입니다.
대충대충 하지 마세요.
회사생활은 그렇게 열심이면서 왜 교회 생활은 대충대충 하려고 하는가요?
안 돼요.
성경적으로 올 바르게 잘 하셔야 해요.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애굽의 장례법으로 적용을 시켜서 날마다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빼내게 하시고 그 안에 예수님의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세요.
그렇게 영구 보존해서 영생의 나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로 가득 채워서 천국으로 데려간단 말입니다.
그 일을 하려고 성령이 오신 겁니다.
성령이 임하자 자기 살자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길로 저벅저벅 걸어간 것입니다.
이게 신자의 구원이에요.
신앙생활은 아파요.
아프더라도 내 안에 쓴 뿌리들이 제거되고 내 속에 예수의 것으로 채움을 입고 있구나 생각하시고 잘 이겨내세요.
교회에 왔으면 예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담아 가야지 빈 손으로 가면 안 돼요.
성령은 지금도 우리 안에 예수라는 향 재료를 넣는 일을 하세요.
구약에는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어요.
무덤 속에 장사하는 것이 있고,
불로 태우는 것이 있고,
들에 버려지는 것이 있어요.
악한 자들은 불로 태우고,
가난한 자들은 들에 두어 새나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고,
선한 사람과 귀한 사람은 시신을 취해서 무덤 속에 집어넣어요.
무덤 속에 집어넣는 것은 나중에 깨어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향 재료로 시신을 수습해서 무덤에 안치한 겁니다.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는 악한 역적이에요.
그럼 시신을 들에 두어서 새들의 밥으로 두어야 해요.
그런데 빌라도는 아리마대 요셉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내어주었어요.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바위 굴에 안치를 하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들에게는 죽음은 소멸의 의미가 아니라 다시 깨어난다는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선한 사람들은 다 영생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서 시신을 수습하는 거예요.
성경 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죽음 이야기가 있어요.
죽었더라만 이야기 하지 상세 하게 어떻게 했다는 것은 없어요.
그런데 야곱과 요셉의 죽음 이후 시신 처리하는 이야기는 상세히 말해주고 있어요.
또한 야곱과 요셉만 영구 보존을 위하여 미이라로 만들었어요.
왜 그런가요?
이는 야곱과 요셉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보면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라는 가사가 있지요.
예수님을 반석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죽으면 예수라는 반석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옛 사람은 다 빼냄을 입고 예수님의 것으로 채워진 자로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향으로 가득 채워진 것으로 말이에요.
이 모습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가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옛 것이 제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임당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부인 되고 예수로 채워짐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이름을 내고자 해요.
그러나 성령은 우리 안에 우리 이름을 지워버리고 예수 이름을 새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아벨의 삶을 사는 거예요
아벨의 이름이 뭐다?
“허무”라고 했어요.
nothing 이라니까요.
너 아무것도 아니야!
구원이란? 옛 사람이 새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고,
사울이 바울이 되는 것이에요.
아브람을 예로 봅시다.
아브람은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지어준 이름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나안에서 지어준 이름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람으로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세겜 땅 상수리나무 아래에 단을 쌓고 첫 제사를 드립니다.
이 때는 옛 사람으로 드린 제사에요.
이것은 율법 아래서 드리는 제사를 상징해요.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시키고 난 후에 할례를 행합니다.
그리고 난 후 18장에서는 상수리나무 아래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잘 보시면 아브라함이 된 후에는 상수리나무 아래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건 거듭난 신앙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이 바뀌고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은 새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옛 사람의 신앙이 있고 새 사람의 신앙이 있어요.
옛 사람 아브람은 상수리나무 아래서 짐승의 제사를 드렸어요.
그러나 새 사람 아브라함은 상수리나무 아래서 누군가를 기다려요.
이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예수그리스도를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에요.
상수리나무는 신목으로 불렸어요.
이는 십자가를 상징하기도 하고 교회를 상징하기도 해요.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것은 상수리나무 아래 있는 것과 같아요.
옛 사람은 교회에 제사드리러 오고,
새 사람은 교회에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러 와요.
아브람은 옛 사람이지만,
아브라함은 새 사람이에요.
그래서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 때 세 천사가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영접하고 대접합니다.
천사들이 대접을 받고 난 후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내년 이맘 때가 되면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개명한 후에 하나님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산으로 가서 이삭을 제물로 제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이삭 대신 수풀에 걸린 숫양을 잡아서 드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을 여호와 이레라고 하였어요.
여호와 이레란?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뜻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뜻이에요.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옛 사람 아브람의 제사를 받지 않고,
새 사람 아브라함의 제사를 받으신다는 뜻이에요.
새 사람의 제사는 여호와가 주신 제물로 드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브람 때는 제물을 주지 않고 아브라함이 되고 난 후에 제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새 아버지가 주신 제물로 제사를 드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름을 지어주신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아브람의 아버지는 데라이지만,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겁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되고 난 후에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차압당하는 인생을 살았어요.
이게 성도가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인 것입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처럼 간섭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자기 이름을 삭제당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삭제당한다는 말은 자기 인생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름을 지어주신 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어요.
간사한 야곱이라는 이름이 삭제당하고 우상과 싸우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살았고,
큰 자라는 사울이라는 이름이 삭제당하고 작은 자라는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어요.
구원이라는 것은 내 이름을 지워버리고 그 안에 예수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행해지는 모든 것이 예수님이 하신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든지 내 이름이 나타나면 안 되어요.
봉사나 전도나 헌금이나 모든 것이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향기로운 재물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야곱 속에 좋은 향들을 40일 동안 집어넣었어요.
그 40일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전부를 말해요.
우리는 배가 갈라지고 이 속에 예수님의 것으로 채워 넣음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엿새가 차기까지,,,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놀라워서 말문이 막힐 지경입니다. 이 벅찬 감동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예수님을 구속하신 주님으로 믿으며 신랑으로 소망할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나도 고맙습니다. 그저 감사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이 벅찬 감동을 엿새가 차기까지 잃어버리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85강. 요셉의 유언과 입관 (창 50장 22-26절) (1) | 2026.05.15 |
|---|---|
| 84강. 형제들의 불신과 요셉의 울음 (창 50장 15-21절) (1) | 2026.05.01 |
| 82강.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행한 복과 저주의 의미(창 49장 1~28절) (1) | 2026.04.17 |
| 81강. 지팡이로 뒤바뀐 장자와 차자 (창 48장 1~22절) (0) | 2026.04.07 |
| 80강. 환도뼈의 유언 (창 47장 27-31절) (1) | 2026.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