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 칼럼

성질대로 살아라

정낙원 2008. 7. 25. 17:11

◈ 착해지려고 하지 말고 성질대로 살아라 ◈

사람들이 생각하기는 Jx를 믿으면 윤리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으로 변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다 보니 좋은 신앙을 좋은 사람되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

윤리적 관점으로 성경을 대하니 설교가 인간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바울은 십자가는 세상 지혜로는 알 수 없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다.

십자가를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없다는 말은 이성으론 해석이 불가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성적 해석을 금지하는 이유는 성경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밖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선과 악과 성경이 말하는 선과 악이 다르다.

성도의 삶 역시도 세상이 말하는 착함 삶과 성경이 말하는 착한 삶이 다르다.

우리 생각엔 바울은 Jx의 사도이기 때문에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한다.

바울은 화를 내지도 않고 항상 온화한 미소로 사람을 대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을 본받자 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바울 역시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다.

Jx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성격과 성질하고는 상관이 없다.

Jx는 12제자의 성격을 바꾸어 주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인간의 성격이 바뀐다고 해서 인간 자체가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인이라는 말은 죄 밖에 생산할 수 없는 존재란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실에서 선함과 악함을 찾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여기서 복음과 복음적으로 사는 것은 다름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들 복음을 전하면 그 사람의 행동으로 그가 증거하는 복음의 참됨을 평가하고자 한다.

이렇게 되면 복음은 사람의 행위로 판단이 되어지게 된다.

즉 착하게 살면 복음적인 사람이고 나쁘게 살면 복음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 받게 된다.

이는 선악적 사고이다.

사도행전을 15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요한을 전도여행에 동참시키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서로 심하게 다투고 갈라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바울과 바나바는 누가 뭐래도 복음에 사람들이다.

윤리적인 잣대로 본다면 어떻게 복음을 아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 라고 항변 할 수 있다.

복음을 윤리적으로 이해를 하면 바울과 바나바는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해가 지도록 품지 말고 화해를 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스스로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성경을 쓴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하나님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지 않고 각자의 길로 가도록 놓아 두셨다.

서로가 갈라짐으로서 자신의 못남을 드러내게 한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의 죄성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심으로 너희가 잘난 놈이 아니란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전도를 하다가 어렵다고 돌아간 마가요한이나 그 문제로 다투고 갈라지는 너희가 동일하게 죄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로 바울이나 바나바나 마가요한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남기고자 함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다툼을 통하여서 자신들도 은혜로 구원된 죄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점점 착한 인간으로 변해 가는 것이 아니고 죄인임을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얼마나 착하느냐 를 묻지 않고, 네가 죄인인줄 아느냐를 묻고 계신다.

예! 난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당신은 신자이고, 그래도 난 괜찮은 사람인데요 라고 하면 당신은 불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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