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이름 속에 담긴 뜻

정낙원 2008. 7. 25. 17:37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긴 심판성

 

 

하나님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예수" 라는 이름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 안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실 일이 계시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 속에 이미 "자기 백성과, 아닌 자"로 구분이 되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비유를 하시면서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을 "너희와, 저희로" 구분하셨습니다.

제자들인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이 되었지만, 저희들에겐 천국비밀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천국을 비밀이라고 한 것은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꼭 알려 주어야 할 자들에게만 알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낸 목적은 오직 자기 백성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상대적으로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에게 찾아냄을 당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것과 같이, 여인이 온 방안을 뒤져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듯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위해서 인간 쪽에선 할 일이란 전혀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몫이지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작 구원을 받아야 할 자들은 본인이 잃어버려진 자인 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찾김을 받고 나서야 비로서 자신이 잃어버려진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일평생 고기를 잡고 살던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이며 구원을 받아야 할 자인 줄 모르고 잃어버려진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찾김바 되고 나서 비로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야 할 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구원이란? 본인이 전혀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를 사라의 태중에서부터 두 민족이 나누이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따라서 결정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갈라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들과 상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구원의 일을 행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일로 남겨두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일컬어 은혜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천국에서 살아갈 사람도 은혜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구원받은 것이 인간의 것이 전혀 섞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것만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선택 당한 사람은 인간의 조건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자랑을 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찾김 당한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고 찾아주신 분에게 관심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찾아내신 목적은 예수님의 뜻을 위해서이지 성도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구원받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오직 주인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입니다.

주인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것이 종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예수님에게 찾아냄을 당한 성도라고 한다면 예수님 앞에서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나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 올 때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뜻에 맞는 목적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만약 다른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 예수님은 우상이 되고 맙니다.

우상숭배란? 절간에 가서 부처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신을 찾는 행위를 말합니다.

즉 신을 사랑해서 찾는게 아니고 아쉬운게 있어서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엔 탐욕이 없는 인간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이 탐욕은 사라지지 않고 늘 두더쥐처럼 고개를 내 말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이 탐욕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탐욕이 없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실제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다가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사사건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 냈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스라엘은 오해하기를 자기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출애굽 시킨 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뜻에 반하는 일에 부딪치니 원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탐욕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배도 할 자들입니다.

 

바울은 자기 육신을 위하여 사는 자를 일컬어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빌 3장18-19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것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살게 해 주시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죽이기도 하시고 때로는 살리기도 하십니다.

 

삼상 2:6-7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시편 23편에선 하나님께선 목자가 되셔서 때로는 쉴만한 물가로,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예수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주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죽는 길로도 인도하시고 사는 길로도 인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길로 인도하시느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되지 성도의 뜻대로 결정되어지지 않습니다.

 

종 입장에선 주인을 위하여 쓰임 받는 것 자체가 주인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구원에 의미를 아는 성도라면 자기 형편을 가지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예수님에 의하여 찾김 당한 자들의 삶에 자세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육신이라는 놈이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에 의해서 찾김 당한 성도가 심판을 당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은혜로 대하시는 것은 그 속에 예수님에 의하여 찾김을 당한 은혜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불신자와 성도가 똑같이 범죄를 하여도 성도에겐 예수님이 찾아내신 의가 들어 있기 때문에 죄를 묻지 않으시고, 불신자에겐 예수의 의가 없기 때문에 죄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예수님의 의가 있느냐! 없느냐! 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에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형편에서도 감사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고, 은혜로 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의 사람이란? 그 사람이 은혜롭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대하신다는 말입니다.

은혜 속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용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용서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위 때문에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지 이제부터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께 진 빚을 갚아야지 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아 놓고서도,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악당들입니다.   

생각 같아선 우리도 늘 용서하고 사랑하고 살고 싶지만 육신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정답을 알면서도 정답을 쓸 수 없는 것이 바로 죄인의 한계입니다.

 

그러니 신앙을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고 나는 이렇게 주님께 은혜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라고 살아가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사는게 신앙생활입니다.

 

어느 개그맨의 말처럼 "그래서 내가 왔잖아!" 라고 하여 예수님께서 오심이 복음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이게 왠 은혜이고 왠 횡재입니까?,,,,,,,

 

 

 

'신앙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약  (0) 2008.07.25
구더기의 방자함  (0) 2008.07.25
자기 주제 알기  (0) 2008.07.25
영과 육 논쟁 끼어들기  (1) 2008.07.25
다른 복음과 괴물  (1) 2008.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