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마약

정낙원 2008. 7. 25. 17:43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

 

 

에덴동산에 두 나무가 있었다.

한 나무의 열매는 먹으면 죽는 열매이고,

또 다른 나무의 열매는 먹으면 영생하는 열매이다.

 

그런데 먹으면 죽는 열매는 보기에 좋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생겼고,

먹으면 영생하는 열매는 볼품이 없고 맛이 없어 보이고 추해 보인다.

먹으면 죽는 선악과는 마귀가 추천하는 열매이고,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과는 하나님이 추천하는 열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고 생명과를 먹어야 할 것을 당부하셨다.

 

이걸 신약적으로 말하면 붙들면 죽는 것이 있고,

붙잡으면 사는 것이 있다.

율법을 붙들면 죽고, 은혜를 붙들면 산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두 과실은 먹으면 죽는 선악과는 율법을 상징하고,

먹으면 사는 생명과는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성도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면 선악과는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하는 율법신앙을 상징하고,

생명과는 예수님의 행함을 의지하는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선악과는 인간의 행함을 자랑하는 성화주의 신앙이고,

생명과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잡는 은혜 신앙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두 과실을 먹으면 나타나는 현상을 살펴보자.

먼저 선악과를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자.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

즉 심판자 즉 왕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같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권세를 갖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으면 살아야 할 피조물 입장에선 하나님 같이 심판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권세를 갖는다는 것이란 너무도 매력적이다.

평생 남의 지시만 받고 눌려 살다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매력적이 아닐 수가 없다.

 

인간이라면 다 상석에 앉고 싶어 하지 말석에 앉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다 대접을 받고 싶어 하지 대접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목사라면 다 큰 교회를 하고 싶어 하지 작은 교회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이 보기 좋고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열매를 선호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이 열매를 보는 순간 매료되어 빠져 나오지를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보는 순간 빠져 버리고 마는 선악과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이미 보는 순간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과 같아서이다.

 

성화란? 선악과와 같이 한번 빠지게 되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어떤 교회는 100점 교인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성화를 가르친다.

그 교회는 10에서 시작하여 100점까지 있다.

일단 교회에 처음 들어오면 기본 점수로 10점을 준다.

이제 이 교인은 10점으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여 점수를 쌓아야 한다.

 

온전한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하면 10점

주일 낮 예배 참석하면 10점

주일 오후 예배 참석하면 10점

새벽기도 참석하면 10점

구약예배 참석하면 10점

교회의 각 기관에 봉사하면 10점

하루성경 3장 이상 읽으면 10점

전도, 봉사, 충성하면 10점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면 10점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반듯하게 살면 10점

 

이들이 가르치는 것은 오직 교회 중심주의다.

오로지 충성과 분발을 촉구한다.

그리고 밖에선 온전한 품행과 방정한 삶이다.

 

이들에겐 예수 안에서의 쉼은 없다.

오로지 자기가 행한 것에 취하여 행복해 한다.

영적 나르시즘에 빠졌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런 신앙을 가르치면 사람들이 미친다.

 

물론 개중에 너무 어려워 아예 자포자기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계속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

한 계단씩 올라가는 재미를 맛본 사람은 빠져 나오지 못한다.

올라갈 때마다 주어지는 그 영광 때문이다.

많이 성화 된 자는 항상 상석에 앉고 대접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덜 성화 된 자는 선배의 지도를 받고 그들을 본받아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

 

고지가 저기다,,,

조금만 더,,,

 

안 하면 안수집사, 권사, 장로, 여 전도회장 남 전도회장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속으로 미워 죽겠는데도, 겉으론 웃어 주어야 한다.

속에 잇는 것을 그대로 들어냈다간 쌓은 점수를 다 까먹기 때문이다.

 

그러니 겉으론 천사인데 속으론 지옥이다.

화가 나도 참아야 하고,

교회 가기 싫어도 가야하고,

헌금하기 싫어도 해야 하고,

봉사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안 하면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수천 명이 모이는 공 예배 시간에 목사가 누구 호명을 하면서 잘한 일을 칭찬하면 그 순간은 황홀하여 '오 아름다운 밤이여' 가 절로 나온다.

마약이다.

한번 영광 받으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마약이다.

선악과가 따로 없다.

 

이런 교회에 안수집사나 장로쯤 되면 80점 90점짜리는 된다.

안수 집사를 세울 때나 장로를 세울 때는 반드시 위에 점수표를 기준으로 자격을 준다.

이런 교회에서 안수집사정도만 되면 빠져 나오지를 못한다.

 

한번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해서 또 다시 그런 곳을 찾게 되어 있다.

한번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시작하면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솔직히 오로지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한다고 하는 목사도 목사님 오늘 말씀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 기분이 좋다.

반대로 목사님 그것도 설교라고 합니까? 라고 하면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오른다.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으면 그저 쾅하고 죽이고 싶다.

 

그래서 잠언서 기자는 하나님께선 유명과 음부는 만족함이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은과 금은 풀무로 시련을 하지만 인간은 칭찬으로 단련을 한다고 하신 것이다.

 

칭찬을 이겨 낼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성화 신앙에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고 빠져드는 것은 그 속에 칭찬이 들어가 잇기 때문이다.

누가 장로님 어떻게 하면 장로님 같이 될 수 있습니까?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물으면 이미 게임은 끝났다.

 

마귀가 광야의 예수에게 찾아와 권한다.

 

야! 예수야!

니가 그래도 명색이 하나님 아들인데 세상 사람들에 존경을 한 몸에 받아야 안 되겠니 라고 속삭인다.

그래 너는 할 수 있어!

 

예수님의 반응은 싸늘하다.

다만 하나님만 섬기라고! 마귀가 떠나면서 한 마디 툭 던지고 간다.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그래 평생 구질구질하게 살아라!

 

그러나 반대로 생명과는 자기를 부인하여야 하고 날마다 죽어야 하는 속성이 들어가 있다.

생명을 낳고 키우는 일이란 너무도 힘들고 고된 일이다.

 

생명이란 자체는 잉태하는 순간부터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다.

쉽게는 입덧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아기를 위하여 엄마는 망가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열 달 동안 뱃속에서 괴롭히더니 낳고 나면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이제부터가 더 골치가 아프고 힘든 고난이 시작된다.

잠시도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자기 일이 없다.

온통 아이에게만 모든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잠시라도 한 눈을 팔게 되면 이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프면 밤이고 새벽이라도 없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래도 부모는 그 아이 키우는 일을 기쁨으로 키운다.

한 사람을 반듯하게 키운다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식을 키워 본 사람이라면 다시 아이를 낳으라고 하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왜일까?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낸다는 것은 죽는 것과 같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명과는 먹는 순간 자기라는 존재는 날아가 버린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먹기 싫은 과실이다.

 

자 이제 선악과와 생명과를 성도의 신앙에 접목시켜 보자.

 

선악과는 율법이고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고, 생명과는 은혜이고 예수를 믿을 것을 강조한다.

율법 신앙은 인간의 행함을 기준으로 하여 우열이 가려진다.

많이 성화 된 자와 덜 성화 된 자와 구별이 생긴다.

많이 성화 된 자는 높음에 있고 덜 성화 된 자는 낮음에 있다.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과 같은 식으로 단계적으로 구분하게 된다.

 

그래서 진급이라도 하는냥 행함의 업적에 따라서 평신도에서, 서리 집사로, 안수집사로, 장로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평신도 입장에선 장로란 너무도 높고 존귀해 보이는 선망의 자리가 아닐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장로가 될 수 있을까?

물으면 아무나 되는게 아니라고 거드름을 피운다.

 

장로가 되려면 최소한 주일성수는 기본이고!

새벽기도로 시작하여 교회의 모든 예배를 필수적으로 참여하여야 하고,

가정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십일조를 비롯하여 교회건축을 위해서 수천 수억을 헌금하여야 하고,

모든 경조사에는 반드시 참여하여야 하고,

직장에서나 사회에선 반듯한 품행을 유지하여야 하며,

술 담배를 물론이거니와 사사로이 오락을 해서도 안 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는 고결한 삶을 살아야 된다고 한다.

 

이 말에 평신도 당연히 기가 죽게 마련이다.

야! 대단하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거룩할 수가 있단 말인가?

존경합니다.

경외합니다.

앞으로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러니 이 최고의 도인의 자리를 누가 탐내지 않겠는가?

거기에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하면 어찌 탐하지 않겠는가?

아! 멋있다.

나도 빨리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서 저렇게 되어야지!

누가 이 선악과의 마력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잇단 말인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런 모습이었다.

거룩한 제사장 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해 봐라!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선악과라는 인간의 행함을 바탕으로 하는 율법신앙엔 반드시 이러한 구분이 생기게 되어 있다.

목사는 많이 성화 된 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성도들의 신앙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권세를 갖는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고 싶어서 신학교에 학생들이 넘쳐나는 이유가 바로 이 목사라는 아름다운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성경대로 목사가 되면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하고 사도들처럼 매맞고 헐벗고 무시당하고 멸시와 조롱을 당하는 길이라고 하면 누가 목사가 되려고 하겠는가?

 

당연히 신학교에 찾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더불어 학교 운영이 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아비 목사가 자식에게 이런 목사의 길을 세습시키고 물려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 목사라는 직책은 너무도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이라 버리기엔 너무도 아까운 것이어서 어떻게 하든지 죽을 때까지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들이 그토록 행함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그 행함은 곧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남에게 알리움을 받게 하는 능력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선악과는 보는 순간 뱀의 독과 같아서 이성을 마비시키고 마는 마력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음 믿음하면서도 행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행함을 고집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생명과는 날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아픔이 있다.

그래서 누구든지 피하고 싶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죽는 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 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일이다.

재미도 없다.

화려함도 없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니고, 명예가 따르는 일도 아니다.

날마다 울어야 하는 일이고,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탐심과 자기 사랑을 찍어내고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일이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남을 살리는 일에 뛰어드는 삶이 기다리고 있다.

제 정신으론 도무지 따라 갈 수가 없는 길이다.

 

바울의 고백을 빌린다면 매 맞고 주리고 헐벗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주변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고 꺼꾸러뜨림을 당하는 길이다.

참으로 피하고 싶은 길이다.

아니 이런 길을 걸으라고 할까봐서 두렵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나 따라 오려고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예수를 본받으라고 하지 않고 믿으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은 주님처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길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같이 날마다 자폭하지 않는 자는 이 길을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은 좁은 문이고 좁은 길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예수하면서도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길은 싫어하고 자기 의를 챙기는 행함을 좋아라 하는 것이다.

목사가 행함을 가르치는 이유도 다 이런 연유에서다.

상석에 앉아서 누구는 옳고 누구는 틀렸고 하는 심판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목사직을 고수하고자 하는 것도 목사직에 대한 맛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정치인들이 정치의 맛을 잊지 못하여 패가망신을 해도 끝까지 도전하는 이유이다.

 

TV에 나오는 CF가 생각난다.

구아바~ 구아바~

구아바가 나를 유혹하네!

딱 걸렸네!

 

한 번 맛 보면 다시 찾게 되는 구아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이 나를 유혹하네!

선악과 그대의 이름은 성화이고 행함이니라!

 

 

'신앙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판사판 이야기  (0) 2008.07.25
싸움거는 하나님  (0) 2008.07.25
구더기의 방자함  (0) 2008.07.25
자기 주제 알기  (0) 2008.07.25
영과 육 논쟁 끼어들기  (1) 2008.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