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싸움거는 하나님

정낙원 2008. 7. 25. 17:44

 

죄란 무엇인가?

천국엔 죄가 없는 자들이 간다.

반대로 지옥에는 죄가 있는 자들이 간다.
죄가 있으면 지옥이고, 죄가 없으면 천국이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죄이다.
그렇다면 성도라면 당연히 하나님이 정의하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에덴동산을 천국의 모형으로 본다면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생명과를 먹는 것이다.

반대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는 것이다.

창세기 3장 22-23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고 난 후의 사람이 생명과를 따먹고 영생할까봐서 부랴부랴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되짚어 보면 처음 창조된 인간은 아직까지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면서 하시는 말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라고 하심을 보면 알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처음 창조된 인간은 영생 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즉 그 속에 죽음을 담을 수도 있고 영생을 담을 수도 있는 빈 그릇과 같은 존재이다.
생명과를 먹으면(담으면) 영생하는 자가 되고,
선악과를 먹으면(담으면) 죽은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죄는 선악과를 먹는 것이고, 의는 생명과를 먹는 것임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자 이 원리를 신약에 적용하여 보자.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느냐를 보면 쉽사리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을 간단하게 증거해 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였다.

주를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가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이제 천국과 지옥에 가는 기준이 명확하게 정해졌다.

그렇다면 신약에서의 죄가 무엇인지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죄란?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의란? 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를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의 기준으로 세상을 심판하겠다고 최종적으로 공포하셨다.


이제 인간들이 변개 시킬 수 없는 하나님이 정의한 죄와, 의에 기준이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성도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기준에 아멘! 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이제 주를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사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들은 범죄하고 난 후 모든 것을 자기 사랑하는 쪽에서 이해를 하는 틀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죄란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죄인들이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굴 사랑하는가?

이는 자기를 사랑한다.
죄란?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 아래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사랑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도 자기를 사랑하는 차원에서 믿게 되어 있다.

성경을 보아도 자기를 사랑하는 차원으로 해석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죄인들은 본능적으로 모든 성경의 말씀을 자기를 사랑하는 차원으로 끌어 당겨서 해석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난 교회 20년을 다녔습니다,

30년을 다녔습니다,
나는 모태 신앙입니다, 라는 것으로 주를 사랑하는 것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또한 나는 목사입니다,
나는 장로입니다,
나는 권사 집사입니다 라는 것으로도 주를 사랑한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마음에도 없는 것을 얼마든지 겉으로 있는 척 표현해 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마음속에는 주를 사랑함이 없음에도 복을 따내기 위해서 얼마든지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 인간이다.

죄인의 특징은 주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오로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본능으로 된다.


주를 사랑하는 것도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받아야만 주를 사랑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받게되면 본능적으로 주를 사랑하게 된다.

사랑이란? 관심이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자연히 사랑하는 대상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무엇을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사랑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쏟고 싶어진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음성을 듣고 싶고, 온통 그대 생각뿐이다.
이게 사랑이다.

그렇다면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주님에게 관심을 갖고 산다는 것이다.
주님이 하신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주님이 기뻐하는 일에 함께 기뻐하고 주님이 슬퍼하는 일에 함께 슬퍼하게 된다.
이런 사랑을 성경에선 다른 말로 믿음이라고 한다.

흔히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 장이라고 한다.
사랑이 없으면 자기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지라도 소용이 없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용이 없고,

아무로 좋은 구제와 봉사를 하여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맞다. 주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사이고 꽝 이라는 말이다.
이를 역설적으로 말하면 인간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얼마든지 할수 있다.

 

순교도 할 수가 있고,

구제와 봉사도 할 수가 있고,

천사와 같은 말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일갈한다.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 자기 열심히 사랑을 증명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과 하나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과 희노애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와서 주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하며 사는 것이지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할까 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라는 복음송은 마귀적인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불의를 싫어한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라는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날려 버린다는 말이다.
뉘라서 이런 사랑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강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주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자는 저주를 받게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곧 하나님께선 천국엔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은 절대로 들어 올 수 없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천국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만이 들어가는 곳이다.
즉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만 들어가는 곳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천국에선 구원을 받은 24장로들과 만물들이 어린양을 찬송하고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다.
이러한 것은 나중에 천국에 가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땅에서도 이런 자세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찬송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성도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연인처럼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을 버리는 자들이다.

성도는 이미 심령에 천국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않고 죽고자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열심과 충성으로 신앙을 확인하지 않고, 주를 사랑하는 것으로 확인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를 사랑하는 사랑은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하였다.
왜?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케 하셨는가?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다.

성령에 감동이 없으면 본질적으로 성경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케 하셨는가?
그 이유를 살펴보자.

고린도전서 2장 9절 말씀을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 하였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선 원천적으로 인간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도록 해 놓으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죄인이 하나님을 알아보아야 자기를 사랑하는 쪽으로 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사랑으로 섬기는 것을 성격은 우상숭배라고 증거해 주고 있다.
그래서 죄인들이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차단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한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앞서서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2장 9절에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인가?
바울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차단해 놓았다고 하면서 성령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

성령이 누구인가?
바울의 정의를 빌리면 하나님의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분이라고 한다.

고린도전서 2장 10-11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성령만이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케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7절에선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 고 하면서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들을 오리고 하신다.

이사야의 고백을 들어보면 하나님께선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선 그 무슨 일을 하셔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방식으로 일을 해 나가신다는 것을 감지 할 수가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밖에 모르는 지독한 이기주의다.

다시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을 들어보자.

이사야 43장 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선 인간의 죄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도말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도말하기 위함이다.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까지도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은 가짜임이 판명난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아들을 죽여서라도 하나님 자신이 사랑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고백을 빌린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왔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뜻이란? 인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죄에 팔려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예수더러 "니가 피를 흘려서 저 놈들 죄를 없애 주라"고 하신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왜? 저놈들 죄를 없애 주어야 합니까? 라고 하자!

내가 안식하지를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묻기를 왜? 아버지가 안식하지 못하십니까? 라고 하니, 저 놈들이 내가 원래 만든 인간들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선 마지막날 인간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다고 한다.

아! 이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완성했으니 이제부터 방에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밖에서 인간들이 마귀가 주는 독극물을 마시고 반신불수가 되고 만 것이다.
마귀가 하나님 모습대로 만들어 놓은 인간을 두들겨 패서 병신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이 방안에서 쉬다 말고 나와보니 마귀가 인간을 묵사발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완전히 묵사발된 자식의 얼굴을 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방에 들어가 잔다고 해도 잠이 오겠는가?

이런 와중에 잠을 잔다고 하면 참 아버지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안식을 못하시고 원래의 인간으로 되 돌리는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보셨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요한복음 5장에서 증거해 주시고 있다.

요한복음 5장 1-21절을 보면 "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일을 안식일 날 행하셨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오늘이 안식일인데 왜? 일을 하느냐 라고 따진다.

이에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고 대꾸하셨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말씀하시는데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는 일을 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에수님 자신도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신 것이라고 한다.

자!~ 여기서 유대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하나님은 지금도 안식을 못하시고 일하고 계심을 볼 수가 있다.
왜? 하나님이 안식을 못하는가? 죄인들 때문이다.

예수님은 병고침 받은 30년 된 병자를 성전에서 만나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심으로 병고침을 죄 문제로 결부시키셨다.

죄가 병을 몰고 온 것이다.

아버지께서 마귀가 멀쩡한 놈을 죄로 병신을 만들어 놓았으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죄를 도말시키는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

죄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을 위해서 죄인을 고치시는 것이다.
마치 방안에서 자려고 하는데 똥 무더기 있지 않은가?
그것을 두고 쉴 수 없으니 치운 것과 같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안식하시려고 하다 보니 덤으로 주어진 것이다.

본래의 목적이 인간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안식을 위해서 한 일인데 성도가 혜택을 입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예수님이 천국에서 보고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참 성도라면 하나님은 나를 위해 죄를 사해 주셨다 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분이 되고 만다.
구원을 자신의 문제로 끌고 들어가면 그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죄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한바 있기 때문이다.
진정 구원받은 자라고 한다면 내가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기꺼이 죽어주는 길을 아멘! 하고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서 기꺼이 죽어 가는 길을 가셨던 것 같이,,
누구를 위해서? 아버지 자신을 위해서,,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쪽으로 일을 하신다.
아버지! 제가 죽어서 아버지가 행복하다면 기꺼이 죽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요한복음 12장 23-28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 27절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28절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온 것은 한 알의 밀 알처럼 죽기 위해서 라고 한다.
그러니 마음 같아선 죽기 싫은데 그렇지만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자신이 죽어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함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젠 때가 되어서 죽겠다고 하자,,,,

그러자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들의 말을 듣고! ~
그럼 아들아!

잘 죽어라! ~

그래 고맙다! 라고 하셨다.

"아들아 네가 죽는다고 하니 내가 억수로 기분이 좋다" 고 하신다.
아니 어찌 아비가 자식을 위해 죽어야지 아들이 아비를 위해 죽는단 말인가?

이게 과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맞는가?
그렇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들의 지혜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란? 자비롭고, 사랑이 철철 흘러 넘치는 하나님이 아니던가!
그런데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하나님이란 너무도 무자비하신 하나님이시다.

오로지 자기 밖에 모르는 하나님이시다.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아들도 서슴없이 죽이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성령이 아니면 참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성령께서 성도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어주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성도를 죽이는 쪽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신 것이다.

살고자 예수를 믿는 자는 성도가 아니다.
살고자 예수를 믿는 자는 악령을 받은 자들이다.
죽고자 하는 자가 참 성령을 받은 자이다.

왜냐! 구원 속엔 내 행복이 들어가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행복에 관심이 있는 자는 가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라고 하는 자도 가짜로 구원받은 자이다.

참 성도에겐 이런 고백이 나와야 한다.

"죽으라면 죽겠어요!

당신이 죽으라시면",,,,

진짜 하나님은 지금도 성도를 공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마치 얍복강가에서 야곱을 기다리다가 허리를 분질러 버리는 하나님이시다.
야곱은 얍복강 이전에는 하나님이 자기 편 인줄 알았다.

그런데 얍복강에서 만난 하나님은 자기를 죽이는 하나님인걸 알았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비로서 참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그 곳을 내가 참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는 의미에서 브니엘이라고 하였다.

이제 야곱은 옛날의 야곱이 아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여기고 살던 야곱이 이젠 하나님은 자신을 공격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스라엘로 바뀐 것이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싸우고 나서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얍복강에서 알게 된 것이다.
오로지 자신만 살겠다고 온갖 술수와 사기로 삼촌을 속이고, 형을 속이고자 하던 야곱이 아니다.

자기 힘을 믿고 살아가던 자가 이젠 지팡이 하나만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야곱인 것이다.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박살내는 하나님인걸 알았다.

이렇게 오직 하나님의 지팡이만 의지하게 하는 것을 신약에선 하늘에 신령한 복이라고 한다.
신약에서 사울이라는 자가 다메섹에서 참 하나님을 만나고서 바울로 바뀐 것과 같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도를 얍복강에서 기다린다, 허리를 분지르려고,,,,,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신과 싸우는 자라는 뜻이다.
누가 신인가?
내가 하나님 같이 사랑 받고자 하는 내가 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누구와 싸우나? 하나님이 자기사랑으로 가득한 인간과 싸우신다.
성도만이 자기가 자기사랑으로 가득찬 하나님의 원수라는 인간인 것을 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불신자가 아니라 성도를 말한다.
왜? 성도와 싸우시는가?

마귀에게 넘어가 몸과 마음이 타락한 반신불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증거대로라면 온 몸이 성한 곳이 상하고 터진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1장 1-6절을 보면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 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꼬라지를 보고 탄식을 하고 계신다.
지금 이 말을 유다와 예루살렘을 보고 하신 말이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를 보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소나 당나귀만도 못한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탄식하신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구원을 시켜 놓았는데 마음속엔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온갖 탐심과 위선과 더러운 생각들이 가득차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인간이 무슨 성화를 해!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매일 시비를 거시는 것이다.
무엇으로 시비를 거는가?

아들이 죽은 십자가로 걸고 계신 것이다.

십자가로 들 쑤셔 대는 것이다.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다고,,,
넌! 내 아들을 죽인 놈이라고,,,,,,

넌! 너 살기 위해 하나님을 죽인 놈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발을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피가 묻어 있는 십자가로 마귀에게 넘어가 몸과 마음이 다 타락하여 만신창이가 되어 하나님같이 되려고 자기사랑으로 가득찬 인간을 죽이시는 것이다.
하나님만을 사랑해야할 정상인이었던 자가 마귀에게 넘어가서 자기만을 사랑하려고 살아가는 불구자가 된 자식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으셔서 십자가로 죽이시고 다시 살려내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반신불수가 되어서 고통 당하는 자식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안락사 시키는 부모의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자식 입장에선 살려주는 것이 사랑이지만 부모 입장에선 죽이는 것이 사랑인 것을 누가 알겠는가?

이 깊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뉘라서 알겠는고!,,,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는가?
하나님 자신이 안식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 안식의 세계로 불러들여서 함께 안식하자고,,,,,,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으로 몸과 마음을 해부하고 난도질해서 예수 앞으로 끌 고가서 죽여서 안식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였다.

히브리서 2장 8-14절을 보라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자 하는 자는 안식의 세계로 들어가지만, 반대로 살고자 하는 자는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게 된다.
살고자 하는 자는 일평생 수고와 슬픔으로 지옥으로 살아가게 된다.

자 그러면 어떤 예수가 참 예수인가?
나를 살려주는 예수인가?
나를 죽이려는 예수인가?

그대는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는가?
그대가 정녕 성령을 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그 성령이 어떻게 살라고 인도하시는가?
어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고 계신가?

하나님의 원수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아는 자가 바로 성령을 받은 자이다.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참 이스라엘 곧 구원받은 성도인 것이다.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공격 대상임을 아는 자이다.
성도에게 있어 예수님의 피 흘린 십자가는 자신을 공격하는 십자가인 것이다.

끊임없이 살고자 하는 죄성이 자기 안에서 폭발하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야말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놈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참 구원받은 성도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비록 저주 가운데 떨어진다 할지라도 감사 할 줄 아는 자가 참 성도이다.

그래서 지금도 성령은 성도들 안에서 이런 사실을 깨닫도록 일을 하신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선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하나님께서 왜? 성도를 구원해 주셨는가를 알게 해 주신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사람은 성경을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하게 될까?

그야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으로 이해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자기 사랑을 챙기시는가?
나를 십자가에 끌고 가서 죽이시는 식으로 사랑을 챙기신다.
십자가의 죽음 속에 안식이 있다는 것을 성령 받은 성도 이외엔 알 수가 없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자신은 오직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다메섹에서 비로서 참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용사시라고 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고 하신다.
이스라엘 속에 용사이시고 태우는 불이신 하나님이 동행하신다.

누구를 태우려는 불이시고,

누구와 싸우는 용사이신가?

이는 이스라엘과 싸우고 이스라엘을 태우려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비 언약적으로 살면 바벨론으로 쫓아내시고 박살을 내시는 일을 하셨다.
지금도 성도와 싸우시는 용사로 동행을 하신다.
바라옵기는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야곱이 얍복강에서 만난 그 하나님을 만나시는 축복이 임하시길 기도해 본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내 동족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지옥에도 가겠노라고 하는 고백들이 쏟아져 나오길 바라마지 않는다.
아버지의 안식을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동무들이 많이 찾김바 되기를 수원해 본다.

우리 울산목양교회엔 모두가 야곱처럼 허리가 분질러지고, 분질러진 그 허리가 하나님의 참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동무들의 놀이터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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