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구더기의 방자함

정낙원 2008. 7. 25. 17:42

구더기의 방자함

 

사람은 다 자기사랑으로 제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항상 자기편을 만들고자 한다.

자기편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는 많음이 곧 힘이고 진리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리는 죄 아래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힘을 바탕으로 다스려지는 나라,

즉 약육강식의 나라를 일컬어 짐승의 세계라고 한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이 세상의 본질을 짐승으로 말씀해 주셨다.

인간이 살아가는 어느 곳에서도 이 법칙은 유효하게 통용되어지고 있다.

그것이 교회라 할지라도 예외일수 없다.

 

이 시대 교회됨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확보하였느냐로 결정이 된다.

아무리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한국교회에서는 이단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 식으로 목회를 하다간 굶어 죽기 닦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와 하나 되기를 싫어한다.

예수는 외쳐지는데 예수가 없는 교회가 지금의 한국 교회이다.

무엇이 예수를 교회에서 몰아내고 있는가?

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진리관은 꽁 잡는게 매 라는 원칙이다.

즉 어떻게 하든지 교인만 많이 모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 정통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운운하지만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분주하다.

한마디로 나 좀 알아 달라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자기라는 존재의 의미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들이다.

즉 남이 알아주면 좋아라 하고 부정하면 신경질을 내고 죽이려고 달려든다.

행함 신앙을 부정하니 반발하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전혀 십자가의 취지와 맞지 않은 모습이라 하겠다.

 

성도의 존재 목적은 첫째도 예수, 둘째도 예수, 셋째도 예수이다.

예수님이 다 하셨고,

예수님이 다 하시고 계시고,

예수님이 다 하실 것이다 가 성도가 일관되게 주장해야 할 사상이다.

 

성도는 모든 것이 주께로 나왔으니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정하신 이치니이다 가 중심사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수님도 귀하지만 성도도 귀하다,

예수님도 하시지만 성도도 할 수 있다 라는 사조가 틈을 비집고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예수만 이라는 사상이 예수도 라는 사상에 쫓겨나고 말 지경이 되었다.

왜? 예수만을 주장하면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보일까?

이는 자기 소외감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교만함 때문이다.

 

예수 당신만 있는게 아니고 나도 있어 이다.

나도 있어 라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말씀에 순종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으로 교묘하게 포장을 하여 진심 어린 충성심으로 읍소하고 있다.

하나님 나의 이런 갸륵한 정신을 잊지 마소서 라고,,,

 

마치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불을 달라고 자기 몸을 학대하고 자해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 같이 지금도 열심과 충성이라는 자해로 하나님 날 좀 알아주세요 라고 한다.

이들이 알아달라고 내 세우는 것은 자기 열심과 충성심이다.

이렇게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충성하는데 왜? 몰라줍니까?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도 바알을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가 너희가 섬기는 바알이 참 하나님인지 내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내기를 한 것이다.

바알이란? 절이 부처라고 생각지 말라.

자기 욕망을 위하여 찾는 하나님이 곧 바알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 한국교회에서 부르짖는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이 섬기던 바알과 같다.

그래서 교회마다 온통 복을 달라는 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전혀 자기 몸을 학대하지도 않았다.

정성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서인가?

아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은 언약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약에 의지하여 기도하니 아주 자연스럽게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내렸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렇게 새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님 중심으로 일을 하신다.

 

그 많은 백성과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엘리야만 알고 있었다.

이는 엘리야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자들은 언약을 붙잡지 자기 열심과 충성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왜? 그리도 행함에 집착을 할까?

거기에는 자기 의가 있고 자기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라고 하면서도 정작 내어놓는 행함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행함(은혜)이 아니라 인간의 열심과 충성이다.

 

믿음에 행함이라면 당연히 믿는 것에 대한 행함 즉 믿는 분의 행함이 나와야 함에도, 이들이 내어놓는 행함이란 믿는 분에 대한 행함이 아니라 자기 것을 내어놓는다.

이들에게 당신은 누구를 믿습니까? 라고 물으면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한다.

 

그럼 당신은 예수의 무엇을 믿습니까? 라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요 라고 한다.

그런데 행함을 내어놓으십시오! 라고 하면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새 언약에서의 행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께요 라는 옛 언약의 행함을 내어놓는다.

 

이들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믿는다 라고 말을 할 때는 믿는 대상이 있다.

그러면 믿음에 행함이라면 당연히 믿는 대상의 것이 나와야 함에도 자기 것을 내어놓는다.

 

이건 전혀 성경이 말하는 행함이 아니다.

왜? 이런 일이 나타날까?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 속에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있으면 예수의 것을 내어놓을 터인데 예수는 없고, 자기가 잇기 때문에 자기 것을 내어놓는 것이다.

이건 목에 핏대를 세우고 큰소리치며 싸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누가복음 6:43-49절에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나무와 열매는 속일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열매를 정의하시길 사람은 속에 있는 것으로 말하는데 쌓은 선에서 선이 나오고 쌓은 악에서 악이 나온다고 하셨다.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게 된다고 하셨다.

즉 그 속에 예수가 있으면 예수가 나오고, 그 속에 자기가 있으면 자기가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째서 내 말을 듣지 않느냐 라고 하신다.

즉 이 말씀을 행함 차원으로 말씀하시면서 집 짓는 비유로 답을 제시하셨다.

 

집 지은 것을 시험하는데 큰 물로 시험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집' 지었느냐를 시험하는게 아니고 어디다가 지었느냐를 시험하시겠다고 한다.

즉 어떤 집을 짓느냐를 묻는 게 아니고 어디다가 지었느냐를 묻고 계신 것이다.

 

집이 무너지고 안하고는 주초 문제이지 건물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심판의 기준은 반석 위에 지었느냐! 흙 위에 지었느냐! 이다.

반석은 당연히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고, 흙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답은 쉽게 알 수가 잇다.

이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 겠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믿을래 를 묻는 것이다.

누구를 의지하고 살 것이냐를 묻는 것이다.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하면서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집 짓는 비유로 하고 계신다는 것을 놓쳐선 안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초지일관 자신을 믿을 것을 강조하셨다.

즉 너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킨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너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룬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받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의 행함만 받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만약에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셨다면 바리새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행함 차원이라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보다 한 수 위라고 자부하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려 술을 먹는 모습을 보고 술을 탐하는 자라고 힐난하였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신앙 사조를 놓치지 말라.

즉 유대교 신앙은 한마디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겠는가?

 

예수님도 바리새인의 행함을 인간으로서 최고의 행함이라고 인정하셨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는 그들의 행함 보다 더 나아야 된다고 하셨다.

바리새인의 의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곧 인간은 천국에 들어갈 행함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인간의 행함으로는 의를 만들 수 없는 악이라고 규정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비록 행함이라는 말씀을 하셨을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행함을 믿는 차원에서의 행함 즉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행하라는 명령법들은 누가 주안에 있는 자이고, 누가 주 밖에 있는 자인가를 가려내기 위하여 주어진 말씀인 것이다.

즉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법을 던지면 그것을 지키려고 덤벼드는 자와 주여 나는 안 되는데요 라고 두손드는 사람으로 반응이 갈라져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 예수가 계신 자는 주여 저는 안 되는데요 라고 주님을 바라보게 되지만 자기 안에 예수가 없는 자는 제가 지켜볼게요 라고 덤벼든다는 말이다.

그러니 명령법들은 요렇게 자기가 지켜보겠다는 자들은 골라내려고 주신 말씀이다.

 

바닷가에 가서 게를 잡으려고 하면 멸치를 묶어서 그 앞에 놓으면 숨어 있던 게가 나와서 덥석 물듯이 예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면 그 속에 예수가 없고 자아가 십자가에 죽지 않은 놈은 내가 지킬게요 라고 덥석 물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기한 일인가?

육에 속한 자는 명령법을 받으면 자기가 지키겠다고 설쳐대지만, 영에 속한 자는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알고 항복을 하게 된다.

 

이미 자신의 한계를 알고 항복한 자는 설령 그 말씀을 지켰다 할지라도 자기가 지켰다고 말하지 않는다.

즉 믿음에 결과로 나타난 모든 행위의 끝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증거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실제 예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자를 고친 사건에서 잘 나타난다.

분명히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서 앉은뱅이가 고쳐지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베드로와 요한에게 쏠리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베드로와 요한을 칭송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사람들에게 이 병자는 우리가 일으킨 것이 아니고 주 예수께서 일으킨 것이다 라고 한다.

 

사건을 일으킨 주체가 예수라는 사실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의 주장은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에 사건의 초점을 맞추려고 하는데 있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이 무리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자신들을 우발적으로 사용하신 것을 알았기에 앞으로의 행보에서 자기들이 무엇을 하겠다고 설쳐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집을 짓는 비유에서의 물음은 곧 네 속에 무엇이 있느냐? 를 묻고 계신 것이다.

 

네가 행할래?

내가 행할 것을 믿을래?

즉 네가 행한 것을 붙잡고 있느냐?

아니면 내가 행한 것을 믿을래? 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신앙을 나무와 열매로 비유하시면서 어떤 말(고백)을 하느냐 를 물으신 것이다.

너는 나를 주라고 하면서 어째서 내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느냐 라고 하신다.

즉 너는 나를 주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너는 주라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럼 한번 집 짓는 것으로 설명을 해봐라!

자 봐라! 여기에 반석이 있고, 흙이 있다.

나는 반석이고, 너는 흙이다,

즉 반석은 내가 지을 집이고, 흙은 인간의 힘으로 지을 집이다.

 

자, 그럼 집을 지어 보자,

너는 어디다 지을래!

내가 지을 것을 믿느냐! 아니면 인간이 지을 것을 믿느냐!

 

다시 말한다.

반석에 지으면 안 무너지고, 흙에 지으면 무너진다.

내가 지은 집은 안 무너지고, 인간이 지은 집은 무너진다.

이제 어디다 지을래,,,,

 

집을 짓는다는 것은 행함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즉 너의 행함을 붙잡을래! 내 행함을 붙잡을래! 를 묻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행함을 붙잡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예수의 행함을 붙잡지 않는 자는 예수를 주의 자리에서 밀어내는 자이다.

 

성도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를 믿고 사는 자이고,

제가 말씀을 지켜볼께요 라고 사는 자가 아니다.

그리고 성도라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도대체 왜? 오셨는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담겨져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 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와 죄는 떨어져서는 안 되는 한 셋트인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없으면 예수가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죄가 있는 곳엔 예수가 있고, 죄가 없는 곳엔 예수가 없다.

즉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는 예수가 있고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자는 예수가 없다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그 속에 예수가 있는 자는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그 속에 예수가 없는 자는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자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만 성령을 보내셔서 왜? 예수여야만 하는지를 알게 하셨다.

성령은 왜? 예수님이어야만 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성도 안에서 끊임없이 죄를 폭로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입술로 주라고 시인하게 하신다.

 

나의 존재성을 긍정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처참할 정도로 박살을 내신다.

성령에 의하여 죄가 폭로 된 자는 자연히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된다.

일찍이 스가랴 선지자는 이런 현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언 하셨다.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장차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에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신다고 한다.

은총과 간구의 심령을 받게 되면 예수를 죽인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애통하게 된다고 하신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애통이 각각의 족속들에게 따로 따로 하게 된다고 한다.

 

11-14=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따로 따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모두 다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선별적으로 각 사람에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안 일어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란 말이다.

 

이는 마치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설교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십자가 도를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간섭한 사람은 상한심령이 일어나고 간섭하지 않은 사람은 상한심령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일은 실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일어났다.

성령이 임하니 베드로가 너희들이 예수를 죽인 놈들이다 라고 하니 어찌할꼬 하고 통곡하게 되었다.

이 원리는 어느 시대나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그러므로 지금도 동일한 말씀인 십자가의 복음을 들어도 어떤 이는 자기 죄를 발견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때 상한 심령이 일어나지 않은 자들이 일어난 자들을 핍박하였듯이 지금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 때 성령이나 지금 성령은 동일하고 동일하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상한 심령이 일어나는 자는 하나님께서 일어나게 하셨고 구원받은 자이고,

일어나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않은 자이다.

이런 현상은 단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늘 반복하여 성도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게 하신다.

 

일어나게 하시는 이유는 예수를 항상 주의 자리에 앉히기 위함이다.

그러니 성령 충만할수록 자기가 죄인의 괴수임을 더 절감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대속하심에 더 고맙고 감사하게 된다.

이런 깨달음이 깊을수록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자랑하고 증거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런 깨달음이 온 세계의 오고 오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타나기를 소원하였다.

 

엡 1: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이 소망한 것은 어떻게 하든지 성령께서 성도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십자가의 능력이 어떤 것인 줄을 깨닫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진정한 성령 충만이란? 내가 말씀을 잘 지켜서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점점 더 깊이 깨닫고 상대적으로 예수님을 주의 자리에 굳게 앉히는 것임을 알 수가 잇다.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느냐 라는 식으로 말을 한다.

거룩이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자 안에 들어가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거룩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인간에게 거룩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거룩을 만들어 내라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너는 부정한 놈이야! 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적극적으로 내 거룩 안에 들어오라는 말이다.

 

내 거룩을 붙잡으라는 것이다.

내가 거룩하게 해 줄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거룩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인간에게 거룩하라고 하는 것은 고발하는 것이지 거룩을 만들어 내기를 바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성경에서 사랑하라, 용서하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무엇 무엇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 라는 모든 명령법들은 모두가 이런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다.

즉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과 같이 새로운 율법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자기가 완벽하게 다 지킬 수 없는 부정한 놈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처럼 거룩해 집니까? 라고 물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거룩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성령의 능력이 그렇게 한다.

어떻게 들어가게 하는가?

성령께서 예수의 거룩을 내 것으로 믿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적에 속한 일이 된다.

 

성령께서는 성도를 예수에게로 끌고 간다.

그리고 거룩한 자 안으로 밀어 넣으신다. 즉 믿게 하신다.

그래서 예수 안에 들어간 자는 자기가 거룩해 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거룩한 자 안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상태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독단적으로 열매를 맺고자 함이 교만임을 왜 모르는가?

요한계시록 3장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보면 스스로의 신앙에 도취되어 있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나온다.

 

그들은 이르기를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고 있다고 하신다.

이는 열심과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행함의 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상을 말하는 것이다.

즉 네 주제가 어떤지를 좀 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처방전을 내려 준 것이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는 것이다.

 

안약이란? 네 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를 무엇으로 찾아내고 고발 할 수가 있는가?

이는 오직 십자가뿐이다.

 

인간의 실상을 고발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다.

십자가 이외는 인간의 죄를 고발하지를 못한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예수님이 피가 뿌려진 곳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법궤를 중심으로 살도록 하셨다.

즉 법궤를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왜? 법궤를 떠나지 말라고 하시는가?

 

법궤 속에는 돌판과,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 라는 세 가지 증거물이 들어가 잇다.

이 세 가지 증거물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반역한 증거물들이다.

곧 범죄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궤 속에 담긴 물건이 하나님에게 보이지 않도록 뚜껑이 덮고 잇다.

그 궤를 덮고 있는 뚜껑을 시은좌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오는 자리라는 뜻이다.

 

그 위에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뿌림으로서 그 속에 담긴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신다.

그런데 신약에 보니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 이스라엘 속에 나타나셨다.

예수님이다.

 

왜? 예수님께서 은혜로 오셨는가?

이스라엘(성도)을 덮어주려고 오신 것이다.

왜? 이스라엘(성도)을 덮어주려는가?

하나님께 반역한 범죄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들을 덮어 주시는가?

자신의 피를 뿌려서 덮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가 덮어주지 않으면 진노의 불길이 들이닥친다.

 

요한일서에 보면 이렇게 은혜로 오신 예수님을 대언자라고 하신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대언자란? 변호사란 말이다.

성도에게 대언자가 왜? 필요한가?

이는 성도라 할지라도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왜? 성도가 범조하는가? 죄의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육신은 죄를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이 대언자는 시편에서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이스라엘을 항상 지키신다고 한다.

왜? 성도들을 지키는 대언자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지켜야만 하는가?

 

여기서 눈 여겨 볼 것은 이스라엘을 지킨다고 한다는 것이다.

왜? 이스라엘을 지키는가? 항상 죄를 짓기 때문이다.

성도가 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만을 지키고 고집해야 하는 이유를 알겠는가?

 

예수님의 피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님은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서 서로 영광을 나누고 계신 것이다.

 

요 12:27-28=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이 얼마나 눈물 나도록 감사할 일이 아닌가!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러한 것이 복음으로 남지 않고 무엇을 복음으로 남기고자 하는가?

 

그런데 왜? 정신을 다른 데로 파는가?

행함을 주장하는 자들은 성도가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아들에게서만 영광을 받지 아들 이외는 그 어떤 것으로도 영광 받지 않는다.

왜? 성도의 행함에 영광을 받지 않느냐 하면 온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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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행함 신학의 대변자처럼 행세하는 어떤 목사가 글을 올려놓은 것을 발췌하여 상고하고자 한다.

얼마나 자가당착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를 보라.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주의 백성들은

더 이상 사단이 지배하는 죄의 종의 노예로서 살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에게서는 죄 밖에 나올 것이 없지만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자취를 따라 가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따라 이루어 가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주의 백성들에게 완벽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완벽한 것을 요구를 한다면

구원 받을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미 사단의 굴레에서 벗어난 주님의 자녀들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되겠기에

자신의 사명에 관련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임을 아셔야 합니다.

사단의 미혹에 지속적으로 넘어질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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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주장을 보면 스스로도 말씀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고 시인하고 있다.

자신에게는 죄 밖에 나올 것이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서 지켜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하나님은 완벽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 어디서 이런 말을 인용하는지 모르겠다.

참으로 할 말을 잊게 하는 글이 아니 할 수가 없다.

 

성경 어디에 하나님은 완벽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어디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하였는가?

성경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고 한다.

 

이 말씀은 어느 정도 거룩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처럼 거룩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변개 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어느 인간이 하나님처럼 거룩할 수 잇단 말인가?

 

하나님처럼 거룩할 수 잇는 분은 예수님뿐이다.

더 가관인 것은 하나님께서 완벽을 요구한다면 구원받을 자가 없기 때문에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넘어질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말씀에 순종하고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신 단다.

참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가장 합당한 말은 필자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럼 니가 하나님 해라 이다.

 

아니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규율을 정하고 말할 수가 잇는가?

하나님은 완전을 요구하지 최선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떻게 인간이 완전할 수 있습니까? 하지 말라

완전하지 못하면 다 죽으라 이다.

 

하나님은 그래도 좀 봐 주이소 가 안 통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인정머리가 파리 똥 만큼도 없는 분이다.

아들을 죽이게 하시는 것을 보고도 이런 소리를 할 수 있겟는가?

최선 좋아하네!

 

신앙엔 최선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나 성화주의자들에겐 최선이 잇다.

점점 더 갈고 닦아서 50% 인간에서 60%로 더 열심히 해서 90% 100%를 향하여 나가자고 한다.

 

성도는 점점 더 나아지는 성화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니 생각하니 갑자기 생각이 난다.

 

옛날 시골집 화장실에 가면 구더기가 기를 쓰고 위로 올라오는 것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발판에 구더기가 올라오기 전에 오줌을 누어서 확 씻어 똥통으로 내려 보낸다.

내려 보내면서 하는 말 건방지게 구더기가 있을 자리가 잇지 어디 감히 올라오려고 하느냐!

 

네 이놈 네 주제를 알렸다!

구더기 입장에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고 하겠지만 발만 한번 쾅 구르면 똥통으로 떨어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 구더기들은 틈만 나면 다시 기어 올라 온다.

밀어내면 또 올라오고, 밀어내면 또 올라오고 참으로 집요하다.

구더기의 이런 성질머리를 보면 인간이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것을 보면 딱 구더기와 같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인간을 구더기이고 벌레라고 한다.

그런데 무슨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성화 주의자들은 구더기에게 립스틱 짙게 발라서 주인과 겸상을 하게 하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성화주의자들이야말로 가장 십자가를 가리는 자들이다.

성화신앙은 종교가들이 성도들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만들 상술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성화 된 자를 바라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자를 원하신다.

 

병원에 가면 병원 바깥에 잇는 사람들을 잠재적 환자들이라고 한다.

즉 언젠가는 병원에 올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지금 내가 방종하지 않았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안 한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은 다만 환경이 주어지지 않아서 안 할 뿐이지 환경만 주어지만 하게 될 인간이 우리들이다.

그러니 지금 안 한다고 잘난 척해선 안 된다.

지금 내 눈에 방종한다고 보이는 사람을 쯔, 쯔, 쯔 할 것이 아니라

나도 저런 종자이지 라고 보라.

그 사람이 곧 나의 자화상이고 거울임을 보라.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구약 이스라엘의 넘어짐을 거울로 주셨다고 한 것이다.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누구 손에 죽었는가.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

하나님께 열심이라고 자처하던 바리새인들이 아닌가?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하는 자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셨다.

 

바리새인이 누구인가?

최고의 성화주의 자들이 아닌가?

가장 거룩한 자들이라고 스스로를 평하던 자들이 아닌가.

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는가?

 

거룩하지도 않은 놈이 거룩하다고 까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방종 그 자체이다.

어찌 개 같은 세리와 창기들과 술을 먹을 수 잇단 말인가?

 

한국교회에 행함을 주장하는 성화주의자들 눈에는 세리와 창기들과 술 마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거지 발싸게 같은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아이고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저런 사람들과 어울릴 수가 있단 말인가? 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십자가만 전하는 사람들은 온통 개판으로 사는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복음을 핑계 삼아 자신의 방종을 면죄부로 활용하는 악당들도 있을 것이다.

 

밭에 곡식을 뿌렸는데 밤에 마귀가 가리지를 덧 뿌려 놓고 갔는데 어찌하랴!

뽑아 버릴까요?

쫓아낼까요? 하면 예수님께서 가만 두라고 한다.

괜히 그것을 뽑다가 멀쩡한 곡식까지 뽑힐까 염려하신다.

 

교회 안에서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눈에 띄어도 모른 척 그대로 둔 이유를 알겠는가?

그건 우리가 뽑을 문제가 아니고 때가 되면 주님께서 다 정리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다.

예수님 계명 중에 어떤 계명이 제일 큽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되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니라!

즉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 수가 잇다.

죄가 무엇이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를 사랑하는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다.

너 라고!

너는 너를 사랑하는 존재라고!

바로 네가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신다.

 

인간이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느냐?

자기사랑으로 똘똘 뭉쳐 잇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할 틈새가 없다.

 

죄인이란? 이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이다.

반대로 의인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죄인은 무엇을 해도 자기를 사랑하는 쪽으로 행하게 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건 본능이다.

이 본성은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죄의 몸을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인에겐 본질적으로 성화가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살면 살수록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짓게 되어 있다.

몸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잇다.

그래서 오래 산 세월만큼이나 죄도 많이 지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성전에서 심판을 시작하는데 늙은 놈부터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다.

성도가 성도다움은 오래 믿을수록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더 깊이 알아 가는데 있는 것이지 점점 괜찮아 지는 인간으로 변해 가는 것이 아니다.

번데기의 가장 아름다움은 주름살 있는 것이지 주름살을 성형 수술해서 피려고 하면 번데기의 가치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상실하는 것이다.

 

제발 구더기이면 아! 나는 구더기이지! 라는 것을 알고 살으라.

괜히 성형 수술해 가지고 속이려고 하지 말고,,,,,

이 글 역시 귀가 잇는 사람만 이해되지 귀 없는 놈은 또 단 소리를 하게 된다.

 

그래도 거룩하게 살면 좋잖아요.

누가 착하게 사는 것을 나무라는가.

다만 그것이 신앙이라고 할 땐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뿐이다.

착하게 살고 싶으면 착하게 살으라.

그러나 알 것은 그렇게 착하게 살았다고 하나님이 신앙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2+2=4이다.

이건 정답이다.

그런데 2+2= 3 이라거나, 혹은 5 라고 하면 따져야 한다.

왜냐하면! 정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600원짜리 물건을 사러가서 천원을 주었는데 주인이 거스름돈을 300원을 주면 왜? 400원을 주지 않느냐 라고 따져야 한다.

주인이 왜? 그런 걸 쩨쩨하게 따지냐 라고 하면 셈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냐 라고 해야 한다.

 

이건 더 받고 덜 받는 문제가 아니고 정답의 문제이다.

100원들 더 받고 덜 받고는 그 사람의 관용에 문제이다.

에에 까짓 것 300원만 받지요 하는 것하고, 300원이 맞잖아요 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성화하고 싶으면 해라 나무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 영광 받을 신앙이라곤 말하지 말라.

지가 착하게 살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느냐?

그런 사람에겐 열심히 착하세요 라고 말할 밖에,,,,,

그러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해라.

 

조성모의 가시나무새 라는 노랫말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맞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서 예수님이 쉴 곳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는가 보다.

아! 이 교만함을 어이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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