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다른 복음과 괴물

정낙원 2008. 7. 25. 17:38

다른 복음과 괴물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게 되면 마치 예수를 믿는 것이 내가 결정하는 것으로 이해하세 된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네 실력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영생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에겐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하는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이다.

 

신자가 예수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야지 만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니 또는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주체를 하나님께서 갖고 행사하시겠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천국은 인간이 원해서 가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이 불러주셔야지만 들어갈 수가 있는 곳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들 스스로에 의해서 예수를 믿을 수 없도록 조치해 놓으신 것일까?

이는 인간들이 믿겠다고 하는 예수는 육신에 복(떡)을 주는 예수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예수를 “다른 예수”라고 하였다.

다른 예수란? 곧 마귀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하나님께서 믿게 해주셔야지 만 믿을 수 있도록 해 놓으신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정면으로 거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는 인간에게 복을 주는 예수가 아니고 도리어 죄인을 십자가로 끌고 가 죽이시는 예수이시다.

이런 예수를 뉘라서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들 스스로 자신이 알아서 믿는 예수는 다 가짜 예수이다.

인간의 본성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동적으로 자기사랑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작동을 한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믿음은 인간의 본성과 충돌을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14장에서 스스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좇아오는 수많은 무리들을 보고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이다.

 

눅 14:25-3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위 말씀에서 예수를 따르는 길이란?

한마디로 망하는 길이라고 한다.

부모 자식과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고 하신다.

 

그러니 섣불리 예수를 믿겠다고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작금의 한국교회가 전도하는 것과는 전혀 다름을 알 수가 있다.

이 시대 교회들은 예수를 믿기 싫다는 사람까지 꼬드겨서 교회로 불러들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찾는 예수는 결국 우상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우상,,,,

 

억지로 꼬임에 넘어가 예수를 믿겠다고 나온 사람들은 자기 사랑을 챙기기 위한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이들이 말하는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는 전혀 다른 믿음이다.

나는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을 일컬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쫓는 괴물이라고 한다.

 

예수는 결국 이런 자들의 손에 의해 지금도 타살 당하게 되는 것이다.

전도하라는 말은 사람을 포섭해서 예수를 믿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전도하라는 말은 예수가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는 것을 증거 하라는 말이다.

 

구원이란 갈라지는 심판을 말한다.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한다고 하니 세상에 속한 자들이 반발하여 예수님을 처참하게 십자가에 죽인 것이다.

이름하여 십자가 사건이다.

 

결국 전도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전도하면 죄인들만 남는다.

십자가를 전하면 “맞아! 난 죽어야 할 자야! 와,

내가 왜? 죽어야 할 죄인이야!” 라고 반발하는 두 부류로 갈라진다.

 

이렇게 십자가로 갈라지는 일을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을 포섭하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좇아내려고 하니 어찌 미련하다 하지 않겠는가?

 

누가 죽고자 하는 자들인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다.

어떻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이는 성령께서 알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초대교회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니 일어났다.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가 너희가 예수를 죽인 장본인이라 하자 그 말에 찔림을 받고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탄식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 주신 것이다.

 

결국 진짜 신자는 십자가 앞에서 살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죽고자 하는 자이다.

날 “천국에 보내 주세요”가 아니라 “난 마땅히 지옥에 가야할 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이다.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자는 살고자 하지를 않고 죽고자 한다.

즉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는 자는 절대로 예수 앞에 나와서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지를 않는다.

 

요한복음 1:9-13절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참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주인이라고 한다.

주인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는데도 피조물들인 인간들이 몰라본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르더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 만이 영접하게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을 어떻게 찾아내시느냐 하면 육신의 본성과 거스르는 십자가의 도로 찾아내시는 것이다.

 

세상에서 십자가 도를 전하면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다 알아먹고 예수를 믿게 된다.

예수님은 이런 상태를 가지고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 라고 말씀 하셨다.

하나님께선 언제나 십자가의 도로 택한 자를 찾아내고 계신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를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 하면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의 믿음이 예수를 알아보고 영접하는 믿음으로 인도한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믿을 주체인 예수를 알아보게 하는 믿음이고, 뒤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를 믿게 해 주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예수를 알아보고 주로 영접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은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이 전혀 어렵지가 않다.

 

예수를 믿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억지로 각오를 다져서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 난 믿음은 인간의 노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기 노력으로 예수를 믿으면 자기를 자랑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그 속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마치 옥합을 깨트린 막달라 마리아 같이,,,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을 받았다는 감사가 그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강요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 억지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금지 할 수 없는 성령의 열매라고 한 것이다.

이런 성령의 열매는 내 안에서 십자가 사건이 폭발할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많이 깨달아질 때, 주님의 사랑에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그 길이를 알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란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은 사람은 자연적으로 예수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본능적으로 예수를 사랑하며 사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가 않다.

 

그러나 믿음을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사랑 할 수 있을까 라며 방법론을 찾게 된다.

그 방법이 인간 특유의 종교성에서 발생되어지는 이름하여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땅에서 지극정성으로 빌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행함 신앙이다.

즉 인간의 노력으로 신을 감복시켜 보겠다는 것이다.

 

엘리야 시대의 바알 종교가 부활한 것이다.

신이시여! 나의 정성을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신을 협박한다.

 

이런 사상이 이 시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은혜 받는 비결이니, 축복 받는 비결이니, 성령 받는 비결이니, 은사와 능력 받는 비결이니,,,,등등 갖가지 명목을 붙여서 하나님의 은사마저도 인간 쪽에서 따낼 수 있는 것처럼 방법론을 가르치고 있다.

 

이상한 믿음의 변종이 나타난 것이다.

은혜니 축복이니 은사라는 말이 노력과 상관없는 말이다.

이들이 내어놓는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는 전혀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열심을 강조하지 않는다. 다만 주의 열심이 주어질 뿐이다.

하라, 하지 말라 할 필요가 없다.

그 안에 계신 성령께서 순간 순간 간섭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이상한 괴물 같은 변종 신앙이 나타나서 열심이라는 이름으로 영혼들을 사냥하고 있다.

 

신앙의 방법론을 제시한다는 것은 교회가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란 반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니 자연히 성경과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이상한 믿음을 가진 괴물들이 등장하여 신앙을 무당들의 굿판으로 만들고 있다.

이 괴물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지도 않았는데도 예수를 사랑하겠다고 쫓아다닌다. 지독하리 만치 찰거머리 같이 떨어질 줄 모르는 스토커들이다.

이 괴물들은 자기가 예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증명해 보이겠다고 열심과 충성으로 경쟁한다.

 

지금도 사랑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산이나 기도원이나 교회에서 금식하며 밤잠을 자지 않고 철야를 하며 목이 터져라 소리치면서 내가 얼마나 주를 사랑하는지 왜? 몰라주느냐? 라고 떼를 쓰고 있다.

 

길거리에 어깨에 띠를 두르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죽을상을 해 가면서 전도한다고 한다.

마치 갈멜산에서 여호와의 불을 내려 달라고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악다구니를 쓰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같이 하나님에게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괴물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괴물들은 인간도 얼마든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지키지도 못할 말씀을 주실 리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에는 못 지켰지만 이제는 성령이 오셔서 지키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자기 믿음 있음을 증명해 보이라고 한다.

 

이들은 성령 안에서 새 생명의 삶이란?

성경이 말하는 명령법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 괴물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면 자신들이 말씀을 지킨 것을 내어놓는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믿을 것은 없고 온통 지킬 것만 있다.

이 괴물들은 사랑하는 연인처럼 주님과의 사랑 나눔은 없고 온통 종처럼 주인님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다 지켜 내겠습니다! 라고 충성을 경쟁한다.

 

이들은 성령이 마치 자기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더 강한 능력을 받기 위해 밤낮으로 산으로 들로 금식하며 더 큰 능력을 달라고 기도를 한다.

 

그래서 자신이 멋지게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한다.

온 세계를 달라고 하고, 이 국가와 민족을 달라고 한다.

울산을, 대구를, 부산을, 서울을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다.

 

이 괴물들은 사랑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도가 예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다 정성이 부족해서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괴물 같은 목사들은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시간 시간마다 닦달을 한다.

 

그러자 교인들은 없는 사랑이지만 있는 척 연기를 하게 된다.

그래야 교회 안에서 믿음이 좋은 자로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진 건 열심과 충성뿐이니, 충성심으로 나는 예수를 이만큼 사랑한다고 표를 내고자 한다.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재물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한다.

결국 돈이다.

돈만 많이 내면 좋은 믿음이고,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교인들이 주일마다 갖가지 명목의 헌금 봉투에 일 수 도장 찍기에 바쁘다.

애시당초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척해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있는 것으로 하면 전혀 힘이 들지 않는데 없는 것으로 하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원래 없는 것을 하려면 힘이 더 들고 오버 액션을 하게 되어 있다.

 

가짜일수록 더 진짜같이 치장하게 된다.

믿음이 없을수록 믿는다는 말을 많이 하고, 사랑하지 않을수록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없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더 있는 것처럼 과잉 표현을 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기교도 아니고, 폼 잡는 것도 아니고,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 운동선수들 같이 머리 박박 깎고 어금니를 깨무는 것도 아니다.

신앙이란? 그냥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사랑 안 하면 되는데 굳이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은 딴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가 가진 능력을 받아서 세상에서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이다.

요한계시록 18장의 음녀와 같이 세상의 화려함으로 치장하고 싶은 것이다.

괴물 목사들은 인간의 열심을 부추겨서 큰 교회를 만들어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루살이 같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수에 치지도 않고 걸러내고, 오직 약대와 같이 세상에서 알아주는 돈 많고 권세 있는 자들은 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괴물들은 열심히 충성해서 더 큰 복을 따내라고 한다.

 

복이란? 글자 그대로 주어지는 것임에도 이 어리석은 괴물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자기 열심과 충성으로 복을 따내고자 한다.

자기 노력으로 따내면 그게 어디 복인가?

댓가이고, 삯이지,,,,,

그러나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이 괴물들이 진짜 믿는 성도들을 잡아먹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믿음도 없는 것들이 진짜 믿는 자들을 교회에서 왕따 시키고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마치 바로가 꾼 꿈처럼 파리한 소가 살찐 소를 잡아먹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살찐 소가 파리한 소를 잡아먹어야 하는데도 실제로는 파리한 소가 살찐 소를 잡아먹는다.

 

이러한 것을 역리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 손에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

이러한 역리 현상이 지금 이 시대 복음이 증거 되는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일찍 죽임을 당한 성도들의 영혼들이 하나님께 빨리 원수를 갚아 달라고 데모를 하니 하나님께서 아직도 세상엔 이런 괴물들에게 잡아 먹혀야 할 동무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 동무들의 수가 차기까지 잠깐 기다리라고 하신다.

부디 이 울산목양교회에 괴물에게 잡아먹힐 동무들이 많이 일어나길 소원해 본다.

 

그렇다면 이 시대 교회 안에 괴물들이 나타나서 진짜 성도들을 잡아먹는 것도 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고 섭리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 괴물들을 지옥으로 데려가도 찍소리 못할 근거를 마련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루살렘 성이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므로 멸망을 당하여야 한다고 하신 것과 같다. 성도는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을 하는 것이지 인간들더러 결정하라고 하지를 않는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여 뉘라서 이것을 알리요,,,”

 

그러나 지금 교회들은 죽지 말고 영웅이 되어 살라고 가르친다.

그러니 교회마다 신자도 아닌 교인들만 넘쳐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른가?

 

참 성도들은 괴물들에게 잡혀 먹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라고 생각하여 도리어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 옵션으로 포함이 되어져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이 땅에서의 천국은 고난과 함께 옵션으로 주어져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나와 복음을 인하여 욕을 먹고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옛날에 참 선지자들도 가짜 괴물들에게 그런 고난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 괴물들에게 잡혀 먹힌 믿음에 선배들이 우리를 향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성도란? 예수님이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가게 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창세로부터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을 찾아가서 아브라함처럼 선택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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