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영과 육 논쟁 끼어들기

정낙원 2008. 7. 25. 17:40

성령을 쫓는 삶과, 육신을 쫓는 삶

 

 

이 글을 정영균이라는 분과 양무리라는 사람이 주고받은 내용을 보고서 이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기에 이렇게 끼어 들어 제 의견을 개진하는 바입니다.

 

(참고로 양무리 라고 하는 가명을 쓰는 사람은 스스로가 밝히기를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목사인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양무리 마을의 촌장과 같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정영균님과의 질의와 답변 과정에서 양무리를 대표하는 사상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이 글은 양무리님이 정영균님이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과 육체를 좇아 행하는 것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라고 질문을 하자,,,,,

양무리님께서 대답한 내용입니다.

 

 

1. 질문 ; [정영균님의 질문입니다.]

 

그럼 자유의지가 어떨 때 죄가 되고, 어떨 때 의가 되지요?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는데

스스로 죄가 되는 의지는 통제하고 의가 되는 의지로만 나아갈 수 있는가요?

 

1. 답변 ; [양무리님의 답변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할 때는 의이고,

육체를 좇아 행할 때는 죄가 되지요.

바울 사도님이 그렇게 권면 한 줄 압니다.

 

갈 5:16에서 바울 사도가 그런 권면을 할 때,

어느 것이 성령의 소욕을 행하는 것이고 어느 것이 육체의 소욕을 행하는 것인지를 갈라디아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을까요?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통제'하는 것인가요?

물론, 통제가 가능한 것이지요.

 

바울사도의 성령의 열매를 보면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절제'인데,

그것을 영어로 말하면, 'self-control'입니다.

 

구분하시고 통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서 행할 수 있기를^^

그래야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지요,

그죠?

 

2. 질문 ; [정영균님의 질문입니다. ]

 

글쎄 그러니까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하고

육체를 좇아 행하는 것을 어떻게 구분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아침에 식사를 할 때 이것이 성령을 좇아 하는 것인지

육체를 좇아 하는 것인지 어떻게 구분하죠?

 

2. 답변 ; [양무리님의 답변입니다.]

 

아침에 식사할 때는 그냥 맛있게 먹는데 만 집중하면 됩니다.

그런 것까지 성령을 좇아 행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거룩한 것 같아도 미신입니다.

물론, 식사하면서 뒷집 아내와 놀아날 생각을 하면서 식사한다면 그것은 육체를 좇는 것이지요.

식사하면서 이웃집 어려운 형편에 쌀 한되 퍼줄 생각을 하면서 먹으면 성령을 좇아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구분이 안되는 모양이군요.

목사님이라고 하셨나요?

 

ps. 더 이상의 답변을 듣기 원하시면 제가 님의 글에 답글 달아둔 대로 개인쪽지로 보내십시오.

      오늘 중으로 다시 이곳에 들어올 시간이 없어서요.

 

3. 질문 ; [정영균님의 질문입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성령과 육체가 왔다 갔다 하네요.

귀하께서는 귀하에게서 나오는 행위에서

하나님이 의롭게 보시는 행위와 의롭게 보시지 않는

행위를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3. 답변 ; [양무리님의 답변입니다.]

 

바울 사도의 그 권면을 음미해 보면 구분하는 것이 전제됩니다.

바울 사도가 어떻게 님의 질문에 답변했을까요?

바울 사도님, 이 질문하신 분에게 좀 가르쳐 주세요.

바울 사도님의 글로 답변했거든요.

 

4. 질문 ; [정영균님이 질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답변을 귀하가 아신다면,

그 답변을 전하라고 성령께서 알게 하신 것인데, 왜 바울 사도에게 넘기십니까?

귀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알지 못해서 질문한 것인데 바울 사도에게 들으라고 하시면 난 어떡하죠?

 

4. 답변 ; [양무리님의 답변입니다.]

 

진정으로 진심이라면 가르쳐 드리지요.

바울 사도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일러드리리다.

그런데, 들을 마음과 들을 귀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과 귀가 있으시다면

 

제가 오늘 바빠서 오늘 중으로는 다시 못 들어오게 될 터이고,

그렇게 되면 올라오는 글들 때문에 님의 가부에 대한 답변을 올려두어도 뒤로 밀려서 제가 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저에게 개인 쪽지를 보내주십시오.

 

제가 답을 적어서 공개적으로 올리겠습니다.

님에게 진실된 마음과 열린 귀가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약속드린 대로 공개적으로 답 글 올려놓았습니다.

 

(양무리가 정영균님에게 답변합니다)

 

정영균님은, 저에게 답 글을 남기시기를,

"결국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성령과 육체가 왔다 갔다 하네요"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마음으로 또한 저에게 쪽지를 보내시길,

"마음을 열고 들을 귀를 준비했으니 가르쳐 주시지요.

고견을 기다리겠습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성령과 육체가 왔다 갔다 한다는 답을 미리 내리면서 무엇이 아쉬워서 '마음을 열고 들을 귀를 준비했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위선적인 자세라고 보여지는군요.

이스라엘백성들이 예레미야에게 부탁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면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 청종하려 함이라"(롐42:6)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가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전하였더니,

이스라엘백성들이 한다는 말이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렘43:2)면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조언을 거부하였습니다.

 

제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미 듣지 않을 자세로 '들을 귀와 마음을 준비했노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정직하지 못한 자세입니다.

하지만, 듣던지 듣지 아니하든지 말씀드릴께요.

 

이렇게 말해 둬도 듣지 않는다면,

최소한 님의 영혼이 저주가운데 떨어지는 것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지금 님과 저 사이에 놓여져 있는 문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하고 육체를 좇아 행하는 것을 어떻게 구분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제가 "아침에 식사할 때는 그냥 맛있게 먹는데만 집중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식사하는 중에 어떤 생각 혹은 의도를 갖고 식사를 하느냐에 따라서 육체를 좇거나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님은 말씀하시기를,

"결국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성령과 육체가 왔다 갔다 하네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속에 이미 님께서 의도 혹은 어떤 생각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틀린 말일 수도 있고,

옳은 말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려놓고 싶습니다.

 

'생각'이란 말속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느냐,

아니면 하찮은 생각을 갖고 '생각'이란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달라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과, 악한 영이 역사하는 방법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사람에게 역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을 통하지 않고 역사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그렇다면 '생각'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영균님, 이 구절을 생각해 보셨나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뒤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을 일을"

어떻게 한다고 하고 계십니까?


로마서 8장 5절에 의하면,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8장 6절에서는 나아가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정영균님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읽습니까?

비판하기 위해서, 흠을 잡기 위해서,

그리고 어떻게 반박할까 고려하면서 읽는 것을 일러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저의 마음속에 님의 영혼을 위한 염려가 있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생명과 평안"입니다.

 

어떻게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과 육체를 좇아 행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천사가 와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해 주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그것을 일러 신비주의라 환상주의라 합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뜻의 전달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천사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단이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은 모든 영을 믿지 말라고 하였더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천사가 전해준 복음이라고 하더라도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시험할 수 있겠나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식사하면서 뒷집여인과 간통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따라서 "사망"에 속한 것임을 "시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뒷집 여인의 힘든 상황에 쌀 한되 퍼줄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생명과 평안"에 속한 것임을 "시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님께서는 할 수 없습니까?

 

"생각" 좀 하십시오.

 

000 목사의 주장이 굉장히 경건한 것 같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위 '십자가 신학'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 신학이란 말은 루터가 한 말입니다.


그런데 000 목사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란 말을 사용하면서도 루터와는 신학적으로는 인식론적 단절을 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루터의 신학은 루터라는 사람의 '욕망의 표출'이라고 합니다.

 

000 목사 자신의 깨달음 이외의 모든 신학적 통찰은,

그 통찰자의 "욕망의 표출"이라고 자신의 "십자가의 신학"으로 다른 이들의 "십자가의 신학"을 깨뜨리기 위해서 전념하고 있습니다.


저의 글에 마음을 연다고 약속하셨고,

귀를 연다고 언급하셨으니,

솔직히 마음을 열어 보십시오.

귀를 열고 들어보십시오.

반박하기 위해서 저의 글을 읽는 것을 일단 스톱해 보십시오.

 

000 목사의 신학을 '시험'해 보셨습니까?  

혹시라도 000 목사의 신학이 님에게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해 보셨습니까?

물론, 000 목사의 주장하는 바가 모두 다 그르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거짓의 영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하되,

그 말씀의 어느 부분을 왜곡시키는 것을 님께서도 잘 알지 않습니까?

 

거짓의 아비가 인류의 조상 아담을 속일 때에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고 변질시켰더랬습니다.

 

죽는다는 개념에 한 두 가지 다른 개념을 섞었던 것입니다.

옳은 말에 그릇된 것을 뒤섞어 놓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보일 수 있게 합니다.

 

000 목사의 비판들이 모두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옳은 비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옳은 비판들과 함께 님께서 보시기에는,

그의 비판이 지나친 것이 없습니까?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 버린 것이 없습니까?


솔직히 생각해 보십시오.

지나쳐 버린 것은, 모자란 것과 똑같이 죄라고,

양무리 마을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님이 싫어하는 양무리 마을에서의 주장을 언급하니까 마음을 닫고 무조건 비판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하시되, 육의 일을 생각하지 마시고, 영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여, '사망'에 이르지 마시고, "생명과 평안"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육체를 따라 행하는 것과 성령을 따라서 행하는 것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모르겠노라고 말한다면, 이제는 님의 책임입니다.

 

님께서 저주 가운데 떨어지든지, 저로서는 제가 할 말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머리를 그냥 장식용으로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생각하라"고 두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에 따라서 성령과 육체가 왔다 갔다 하네요"라고 님은 답변하셨습니다.

무슨 내용을 담아서 그 말을 하셨습니까?

저의 설명을 듣고 나서 님의 그 답변 글을 다시 음미해 볼 수 있습니까?

 

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 그것에 따라서 님께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기도 하고,

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그것에 따라서 님께서는 육체를 좇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정영균님,

 

육체를 좇아 행하겠습니까?

성령을 좇아 행하겠습니까?

이제는 님의 책임입니다.

주님께 핑계대지 마십시오.

 

그래서 저주에 떨어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양무리/쌀쌀쌀

 

* 여기까지가 양무리 마을과 정영균 씨가 대담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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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정낙원 목사의 반박글입니다.

 

저는 이 글이 정녕 양무리님이 성경을 해석하는 안목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져 모른 척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 사료되어 무례를 무릅쓰고 끼어 들었습니다.

 

위의 양무리님이 주장하는 내용이 얼마나 엉터리이고,

육적(문자적)인 해석인가를 이제부터 제가 반박합니다.

 

 

지금 이 글을 보면 그대는 영과 육을 전혀 분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대의 주장을 빌리면 밥을 먹으면서 거룩한 생각을 하면 성령을 좇는 영의 생각이고,

음탕한 생각을 하면 육신을 좇는 육의 생각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깨끗한 마음으로 살면 성령을 좇는 생활이고,

나쁜 마음으로 살면 육신을 좇는 생활이 된다고 하시면서, 

그러면서 로마서 8장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대가 말하는 것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팔정도(八正道)입니다.

 

그대가 주장하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근본 교리인 팔정도(八正道)와 무엇이 다른지 한번 비교해 보시오.

 

팔정도(八正道) 란?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 탐(貪)․진(瞋)․치(痴)를 없애고 해탈(解脫)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실천 수행해야 하는 8가지 길 또는 그 방법.

이것은 원시불교의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의 법으로,

석가의 근본 교설에 해당하는 불교에서는 중요한 교리이다.

 

고통을 소멸하는 참된 진리인 8가지 덕목은

 

①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 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⑥ 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팔정도는 한마디로 반듯한 생각과(그대의 논리대로라면 밥을 먹으면서 착한 생각을 하는 것) 반듯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에서 있어 최고의 가치인 가장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이지요


그대의 말대로라면 이웃집 여인 내와 통간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쌀 됫박이라도 도와줄꼬 하는 생각이지요.

스님들은 늘 이런 교리를 배우고 터득하기 때문에 항상 마음으로 산다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성령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란

이러한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을까 를 말하고 있는 것임을 왜? 모르시오.

 

자 그러면 로마서 8장의 내용이 어떤 근거에서 나온 고백인지를 설명하리다.

잘 음미해 보고 그대가 정영균 님에게 답변이라고 한 것이 얼마나 불교 교리와 같은 육신적인 생각인가를 숙지하기 바라오.

 

자 그러면 그대가 말한 내용을 바울의 입장에서 풀어 봅시다.

 

먼저 성경을 해석하려면 고등어 중간을 뚝 잘라먹듯이 하지말고 앞, 뒤를 잘 살펴서 지금 이 말씀을 어떤 취지에서 한 것인지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게 성경해석의 근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비유를 하실 때에도 그 비유를 하신 이유가 있음을 놓치게 되면 전혀 엉뚱한 해석을 낳게 된다는 것쯤은 해외 유학까지 가신 분이니 이건 동의하시겠지요.

 

그럼 바울이 로마서 8장의 성령을 좇는 것과, 육신을 좇는 것을 어떤 근거에서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러니 8장을 말하기 전에 7장이 있으니 7장을 먼저 살펴보아야겠지요.

바울은 7장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한계성을 절감하고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게 7장 14-23절까지 내용이요. 잘 읽어보시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통곡하는 이유는,

바울은 성령을 받고 보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싶은 생각이 너무도 강렬하게 일어나게 되어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을 경주하였소.

 

그런데 막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니 잘 안되더라는 것이오.

그대 말대로라면 성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바울은 순종이 왜? 안 되는지 그 원인을 분석해 보니 자기 육신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기 때문이란 걸 알았소. 즉 몸이 죄를 이기지 못하더라는 것이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육신은 전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쪽으로 흘러가더라는 것이요.

 

왜? 그런가 자세히 보니, 자기 안에 두 법이 자리 잡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한 법은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성령의 법이고,

다른 한 쪽은 말씀을 거역하고자 하는 육신에 법이었소.

 

그런데 이 둘이 싸우면 성령의 법이 이기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법이 즉 죄가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성령의 법을 이기더라고 것이요.

마음으로는 말씀에 순종하여야지 하는데도,

육체는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아니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데,

몸뚱아리는 자기 생각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움직여지니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 아니겠소.

이는 정답을 뻔히 알고도 쓰지 못하는 심정이랄 수 있겠지요.

 

(쉽게 말해서 그대의 말대로 양무리님께서 밥을 먹다가 이웃에 사는 과부 집에 쌀 됫박이라도 퍼주어야겠다 하고 진짜 순수하고 착한 생각을 하고 막상 쌀을 가지고 갔다가 그만 과부의 미색에 홀라당 빠져 통간을 하고 말았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 그 일을 하고 만 것이지요.

 

아니 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이겠소.

 

예수님께서 오른 쪽 눈이 범죄 하면 빼 내고 오른 손이 범죄 하면 찍어내고 오른 발이 범죄 하면 찍어내라는 말은 눈을 빼 내고 팔과 다리를 자르라는 말이 아니잖소.

오른 쪽 눈을 빼 내면 왼쪽 눈으로 범죄하는게 인간이요.

두 눈 다 빼내서 범죄 안 한다면 앞 못 보는 소경들은 죄를 안 짓겠네요.

소경이나, 눈 뜬 놈이나 그 속에 각양 탐심과 자기사랑이라는 죄성은 동일합니다.

그러니 눈을 빼 내려고 하지 말고 아이구 나는 죄인이라서 못하겠네! 안되네! 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이런 상태를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라고 하는 것이요.

 

결국 바울의 말대로라면,

죄인이란? 정답을 알아도 정답을 쓸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오.

 

로마서 7장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고 바울 자신의 고백임을 잊지 마시오.

바울이 누구요.

성경을 쓴 사람이 아니요.

 

본인이 성경을 통해서 이런 것 해라,

저런 것은 하지 말아라 라고 쓰고 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렇게 못 살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요.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입니까?

아니 자기도 안 된다고, 못 한다고 고백을 하면서 남에게 하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요.

 

물론 바울이 극단적으로 방탕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죄는 윤리적인 범주를 벗어난 더 포괄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을 것이요.

바울 스스로 고린도후서에서 죄를 규정하기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극단적인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바울의 죄관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 것을 감지할 수가 있소.

바울의 고백을 빌리자면 인간이란? 예수 보다 자기를 먼저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임을 알 수가 있소.

그러니 죄인에게 예수를 사랑하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귀에 경 읽기와 같은 것이라서 바울은 괴로워 한거요.

 

그래서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탄식을 하는 것이요.

왜? 탄식이 나오겠소.

자기 마음과 뜻대로 안되니 탄식이 나오는게 아니요.

 

왜? 안될까?

분석하고, 분석하고 또 분석해서 찾아낸 결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육신은 죄를 더 좋아하더라는 것이요.

 

마치 쇳가루가 자석에 자동으로 이끌리듯이 육신은 자동으로 죄에 끌리게 되어 있소.

인간이 가장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죄 짓는 것입니다.

지금 벌어지는 논쟁도 남을 비판하는 것도 다 죄 짓는 일이니 밤이 새도록 마다 않고 정력을 쏟으면서 싸우는 것이요.

 

그래서 너무 괴로워 “아!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좀 건져 줄 수 없나” 라고 통곡을 하니까 성령께서 야! 이놈아 왜? 니 꼬라지를 보고 탄식을 하느냐?

너를 보지말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하더라는 것이요.

 

성령께서 바울에게 말해주기를

야! 바울아! 괴롭제!

예! 너무 괴롭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이래봬도 사도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가 하나님 말씀 하나 순종 못해 가지고 되겠습니까?

미치겠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위로하기를 바울아! 너무 괴로워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니가 안 될 줄 다 알고 다른 길을 마련해 놓았다!  

그러면서 바울아!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선 절대로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왜인줄 아느냐? 하나님께선 인간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예수를 믿게 하셔서 살리는 방법을 마련해 놓았다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이제 성령께서 8장을 통해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제 8장 내용을 살펴봅시다.


먼저 성령은 바울에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바울이 어째서 그렇습니까? 성령께 물으니 “

이는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시켜 주었기 때문이라” 고 합니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자유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지키든 안 지키든 그것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왜? 심판하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께선 이제 인간을 상대하지 않고 예수님하고만 상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만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은 여전히 말씀을 지켜야 하는 법이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래서 바울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되어서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하나님께서 죄를 이길 수 없는 인간의 육신으로는 할 수 없는 그것을 아들을 보내서 하게 하셨다는 것이요.

여기서 그것이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그것을 인간의 힘으로 안되니 아들을 보내서 해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3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그리고는 이제부턴 내가 말씀을 지켜야겠다고 하는 육신의 법을 좇지 않고,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말씀을 다 지켰다는 것을 믿게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명령한 말씀에 순종하라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도록 하였다는 것이요.

그러니 자기 대신 예수님이 지켜주셨다고 믿는 자는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룬 것으로 간주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4절=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을 좇는 것과, 육을 좇는다는 것을 구별하겠소.

 

영을 좇는다는 것은? 그대가 말하는 착하게 살아야지 하는 팔정도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고,

육을 좇는다는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말씀을 지켜보겠다고 하는 행함 신앙을 말하오.

차차 읽어 내려가면 분명하게 잘 알게 될 거요.

 

이렇게 말하면 그대들과 같이 성화를 말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어디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까?

구원이야 당연히 예수를 믿음으로 받지요.

그러나 이제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것이지요 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은 구원받기 전에 지켜야 할 말씀이 따로 있고,

구원받고 난 후에 지켜야 할 말씀이 따로 있는 것으로 분리시켜 놓지 않으시고,

모든 말씀을 다 지켜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소.

 

예수님께서 천지가 없어질지라도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소.

그러면서 내가 율법을 헤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러 왔다고 하셨소.

즉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이든 신약의 말씀이든 모든 말씀을 성취하신다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은 십계명(율법)만 이룬 것이 아니고 모든 말씀들이요.

 

이 사실을 안 믿고 아직도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그대 같은 사람들에게, 십계명이든, 산상보훈이든, 바울의 명령법들이든 다 지켜야 하는 말씀들이요. 라고 하면

에이! 사람이 어찌 말씀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 라고 하진 마시오.

다만 최선을 다해서 지키는 데까지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요. 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최선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완전을 요구합니다.

‘아버지가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고 합니다.

에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같이 온전해 질 수가 있습니까 라고 말하진 마시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인간을 원하는게 아니고 온전한 인간을 원하시오.

하나님은 50%, 60%, 70%, 80%, 90%를 원하는게 아니고 100% 온전한 인간을 원하신다 말이요.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와 같이 온전해 질 수가 있겠소.

온전하라는 명령도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말씀도 분명히 지켜야 할 말씀이 아니겠소.

 

그럼 알다시피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들에겐 온전 할 수가 없으니 인간의 육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온전하신 예수님께서 다 지키도록 하셔서 예수가 다 지킨 이것을 성령을 보내서 성도에게 믿어지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성령께서 믿어지게 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킨 것을 자기가 지킨 것을 간주하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같이 온전하신 분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온전하신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심으로 예수 안에서 즉 예수를 믿음으로서 온전하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는 것이 인간의 이성으론 불가능하니 성령이 오셔서 믿게 해 주셔서 믿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진정 그 안에 성령이 계신 분이라면 성령이 어떻게 하겠소.

말씀을 지키는 쪽으로 성도를 끌고 가겠소.

예수님이 자기 대신에 다 지켰다는 것을 믿게 하는 쪽으로 끌고 가겠소.

그야 당연히 예수를 믿게 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 않겠소.

왜냐하면! 바울처럼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았어도 그 속에 두 법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요.

 

그래서 신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지금도 인간을 고발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를 만들어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를 따라 올 수 없다는 말은 부모 자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정에 매일 수가 없고 그 어떤 것 보다 더 예수만을 사랑하여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 아니겠소.


그런데 이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를 하여 초대교회 당시에도 부모를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단행하고 가정을 등한시하는 인간들이 일어나니 바울이 누구든지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리고 한 것이 아니겠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한 것이 어찌 인정적으로 접근 할 수 있단 말이요.

바울이 대 선배인 베드로에게 당신이 어떻게 복음과 합당치 않는 행동을 하시오, 라고 탄핵 한 것을 어찌 인정머리 없고 싸가지 없다고 하겠소.

오로지 하나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의미가 훼손 될까봐 그런 것이지,,,,,,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책망이나 바울의 책망을 들어도 삐치지 않았습니다.

왜인 줄 아시오 베드로 마음속에 바울과 동일한 성령이 계셨기 때문이요.

성령은 내 기분 나쁜 것 보다 진리를 더 사랑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성령 받은 사람은 말씀을 더 중요시 여기지 자기 자존심을 더 중하게 여기지 않소.

어찌 20년을 배워도 이 속을 모르는고,,,,,,,

 

그대들은 계속하여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육신의 법을 좇고 있기 때문이요.

단언코 말하지만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은 그 속에 성령이 없는 자들이오.

악령이 성령으로 가장하여 구원받지 못할 자들은 끝까지 예수가 다 이루신 것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서 육신에 머물도록 하기 때문이요.


예수의 영인 성령은 오로지 예수를 붙잡게 하지 인간들더러 말씀을 지키라고 하지 않소.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들은 즉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는 사람들은 내가 말씀을 지켜야겠다고 하는 육신의 법으로 살지 않고, 내 대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다 지키셨구나 하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요.

 

그런데도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거듭나지 못한 자는 즉 그 속에 성령이 없는 자는 자꾸만 자신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이요.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고,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말씀을 다 지켜주셨지 라는 믿음 즉 영의 일을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5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그런데 내가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예수님께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합니다.

 

그대가 정영균님에게 말한 사망과 평안을 정의 한 것과,

바울이 말하는 사망과 평안이 얼마나 다른가요.

 

그대가 말한 내용이요,,,,,,비판하기 위해서, 흠을 잡기 위해서,

그리고 어떻게 반박할까 고려하면서 읽는 것을 일러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저의 마음속에 님의 영혼을 위한 염려가 있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생명과 평안"입니다.)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럼에도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고 하는 육에 속한 자들의 생각은 하나님은 원수로 취급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육신이 연약하여 (즉 죄인들이 지킬 수가 없어서),

예수님에게 대신 지키라고 한 것을 믿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오.

 

“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러니 자신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육신에 속한 자들은 그 무슨 짓거리를 하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설령 말씀을 지켰다고 할지라도,,,,,

왜? 인줄 아시오. 죄인은 아무리 하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요.

 

“8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래서 이젠 내가 지켜야 할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 지켰다는 것을 믿게 해주는 성령이 그 안에 계신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렇지 않고 아직도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귀새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예수를 믿고 나서도 동일하다는 것을 잊어선 안되오.

끝까지 예수가 다 하셨다는 것을 붙잡는 게 새 언약 안에서의 신앙이란 말이요.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말씀을 지켜 주셨다는 것을 믿게 해주는 성령이 그 속에 있는 자는 비록 육신의 몸이라는 사망을 갖고 있지만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어도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라는 것이요.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잘 들으시오.

성도는 어떤 존재인가 하면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육신의 법에 속한 옛 사람은 날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죽이게 하고,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말씀을 지켜 주셨다고 믿게 하는 생명의 법에 속한 새 사람은 성령께서 날마다 살아나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성령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말씀을 지켜보고자 하는 아담의 속성은 날마다 때려잡고,

예수님께서 대신 말씀을 다 지켜주셨다는 것을 믿는 새사람으로 살려낸다는 말이요.

 

그러니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놈이 살아나면,

수가 말씀을 내 대신 다 지켜주셨습니다 라고 믿는 새 사람이 죽게 되고,

반대로 예수님이 말씀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믿는 놈이 살아나면,

내가 말씀을 지켜야한다고 하는 옛 사람은 죽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생명의 성령의 법에 빚을 진자들이므로 육신의 법대로 살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요.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그러니 이제부턴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되었으니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옛날 방식으로 살지 말고,

예수님께서 내 대신 말씀을 다 지켜주셨구나, 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고집을 피우고 그래도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면 그 놈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때려 죽여버리겠다고 합니다.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왜냐하면!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놈은 하나님께서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하도록 해 놓으신 새 언약을 믿지 아니하는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이지요.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러니 성도는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겠다고 하는 종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대신 다 지켜주셨다고 믿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구조는 자기가 한 것이 아니면 믿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 해 주셨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 믿어지는 것을 성령께서 믿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성령께서 믿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런데 세상에서 성령께서 가르쳐 주는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법칙과 충돌하기 때문이지요.

 

마귀는 항상 인간의 행위로 예수님의 행위를 가리고자 하기 때문이요.

즉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가죽옷을 벗겨내고,

죄인이 만든 무화과나무 치마를 입도록 하기 때문이오.

무화과나무 옷과 가죽옷에 의미는 알겠지요,,,

이것도 가르쳐 줘야 합니까?

바울은 성도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가죽옷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겠지요.

 

“17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왜? 믿음으로 살면 고난을 받습니까?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겠다는 육에 속한 종놈들이 가만 두지 않기 때문이지요.

왜? 육에 속한 종놈들이 가만 두지 않습니까?

그건 자신들 속에 있는 육신의 법칙과 다르기 때문이지요.

 

육신에 속한 종놈들 속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없으니까 자꾸만 자기들이 말씀을 지켜야 된다는 법이 그들 속에서 충동을 하는데,

그런데 생명의 성령의 법에 속한 자들이 그게 아니라 말씀은 너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지켰으니 이제는 행함을 포기하고 예수를 믿으라 고 하니,

육신에 속한 종놈들은 그 속에 믿음이 없으므로 믿는 것이 어떤 것인 줄 모르니,

너희들 자꾸만 엉뚱한 소리할래 하면서 핍박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걸 일 못하는 놈이 연장 나무란다고 하는 것이요.

무식한 놈이 깨닫지 못하는 자신을 나무라지 않고 가르치는 스승을 나무란다고 하지요.

 

이러한 사상은 신약시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항상 이어져 온 일들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속에도 생명의 성령의 법에 속한 자가 있었고,

육신의 사망의 법에 속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광야 이스라엘에서 찾는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속한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12지파 족장들을 가나안 땅에 정탐하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 땅에 가보니 장대 같은 아낙 자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 정탐하러 갔던 족장들이 기겁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하는 말이 자기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너희들 왜? 그러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메뚜기 같이 작은데 저런 거인들하고 싸우느냐?

그러니 맞아 죽느니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이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면서 하는 말이,,

야! 이 사람들아!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데 어디 우리 방식으로 왔느냐?

하나님이 다 인도해 오시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으니 주신다고 믿고 들어가야지

여기 와서 거인들이 있다고 돌아가자 하면 되겠느냐 라고 하니,,,,

 

백성들이 그래 옳소 한 것이 아니고,,,

저 놈! 때려 죽여라! 했습니다.

왜?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때려죽이라고 했겠소.

말 같지 않는 소리를 하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자기 주먹을 믿지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그러니 여호수아와 갈렙은 신약식으로 말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고, 나머지 열 지파 족장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해 보겠다고 하는 육신의 사망의 법에 속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은 항상 약속을 받지 못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육에 속한 가인이, 믿음으로 산 아벨을 핍박하였고, (히 11장에서 아벨의 제사를 믿음으로)

육에 속한 이스마엘이, 약속으로 난 이삭을 핍박하였고,

육에 속한 11형제들이, 약속(꿈)을 받은 요셉을 핍박하였고,

육에 속한 에서가, 약속을 받은 야곱을 핍박하였고,

육에 속한 사울이, 약속을 받은 다윗을 핍박하였고,

 

아가서에 보면 왕의 약속을 받은 술람미 여자를 약속을 받지 않은 예루살렘 여자들이 핍박하였던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성경 전체가 다 육과 영의 싸움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요.

예수를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이 핍박하였듯이 지금도 믿는 자들을 불신자들이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과 같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육신의 법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것이요.

 

이 사실을 성령에 의해 알게 된 베드로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산 자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모두가 성령에 의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선취적으로 살았던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및 선지자들과, 시편과,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요.

 

쉽게 말해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그들의 모든 삶을 몽땅 한데 묶으면 예수님의 삶이 나타난다는 말이요. 그러니 구약의 선지자들은 자기를 들어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된 것이지요.

성령이 그렇게 끌고 간 것이지요.

그러나 보니 백성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사람들이 너희들을 핍박하고 욕을 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면서 너희 앞에 선지자들도 다 이런 핍박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으니 오직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라고 하면,

아니야! 성도라면 당연히 말씀을 지켜야 돼! 라고 하는 육신의 법에 속한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육신의 법에 속한 자로부터 쫓겨나고 만 것이요.

이렇게 진리에 속한 자들이 비 진리에 속한 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현상을 일컬어 역리현상이라고 하고 곧 예수님의 고난이라고 합니다.

즉 생명이 사망에 삼키운 바 된다고 말하는 것이요.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을 마감하면서 생명의 성령의 법에 속한 자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어떤 말을 하고 핍박을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성도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오직 약속 하나 믿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핍박으로도 믿음은 빼앗을 수가 없고, 가난으로도 믿음은 빼앗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만약 가난이나 핍박이나 그 어떤 이유에서 믿음을 버린다고 한다면 그는 애초부터 선택된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뽑아 내시려고 갖가지 어려운 일들을 발생시켜 좇아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붙잡아 주는 성도는 죽더라도 믿음을 버릴 수가 없지요.

그가 바로 스데반 집사님입니다.

 

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지켜 주어서 끊어지지 않는 자들을 일컬어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밭이라고 합니다.

좋은 밭이란? 농부가 관리를 하는 밭이란 말입니다.

농부는 자기가 씨앗을 뿌린 밭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가꾸지요.

왜냐하면! 자기 흔적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오..

 

농부가 때를 따라 김도 매고 물도 주고 하기 때문에 끝까지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밭들은 농부가 믿음을 지켜주지 않고 자기가 믿으려고 하다 보니 어려움이 닥치면 중도에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충 로마서 8장이 말하고자 하는 성령을 좇는 삶과, 육신을 좇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았소.

 

여기까지 훑어 오면서 무엇을 느꼈소.

 

그대와 내가 무엇이 다른지,,,

 

그대의 설교는 여러분 우리는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 자녀답게 거룩해 지고, 착하고 깨끗하게 살고,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광 돌립시다.. 이고

 

제 설교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면 잘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는 우리 몸이 하나님의 듯대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에게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가 지켜야 할 그 말씀들을 다 지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잊지마십시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깨닫도록 하시고 믿게 하십니다.

내가 죽을 그 자리에 예수가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이 사실을 늘 기억하라고 역사하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 자기 자신을 보지말고 예수님을 보시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끝까지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있고, 난 나라는 존재가 없소.

왠 줄 아시오.

내 속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살아 계셔서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어 가시고, 앞으로도 이루어 가실 것을 믿기 때문이오.

 

이런 찬송가를 들어 보셨소!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요”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만 찬송하리로다”

 

이 얼마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이요.

이 찬송가 가사를 적은 분은 오직 구주만 찬송하고 살겠다고 합니다.

왜? 구주만 찬송하고 살겠다고 합니까?

모든 것을 주께서 다 하셨기 때문인 걸 알았기 때문 아니겠소.

 

어째! 이 찬송가 많이 안 불러 보았소.

부르면서도 뭔 내용인지 모르고 불렀소,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내린 결론은 그대는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이라고 하는 것이요.

스스로 선생의 자리에 앉아서 천국 문을 가로막고 자신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육신에 속한 자란 말이요.

 

세상에 난 살다가 살다가 로마서 8장을 그대 같이 푸는 사람은 만나 보지 못하였소.  

그대가 정영균님을 그렇게 저주와 같은 독설로 타박하고도 부끄럽지가 않소.

그리고 무엇이 숨길게 많아서 가명을 쓰시오.

원래 가명을 쓰는 자들은 속이 어둡기 때문에 자기를 밝히길 꺼려하는 것이지요.

 

난 그대의 뻔뻔스러움이 참으로 놀랍소.  

성경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하여 그져 놀랍기만 하오.

이런 수준으로 어떻게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여기엔 감을 놓아라,

저기엔 대추를 놓아라 할 수가 있는지 참으로 의아할 따름이요.

 

제가 왜? 이런 극한 표현을 써 가면서 그대를 책망하는지 아시오.

이 글은 그대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도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이기에 너무도 황당한 해석을 하는 것이 너무 화가 나서 하는 말이요.

 

앞으로 로마서 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을 해석할 때는 “율법 외에 한 의”에 모든 포카스를 맞추시고 설교를 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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