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동상이몽

정낙원 2008. 7. 25. 17:51

동상이몽


동일한 것을 보고서 각기 다른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동일하게 예수라는 말을 하고, 십자가를 말하는데도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인간만이 겉과 속이 다르다.

즉 속에도 없는 것을 겉으로 있는 척 한다.

믿음이 없으면서 믿는 척 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척 하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인간이란? 속이는데 있어서 천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아니면서도 성도인 척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서도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나님께선 포도나무에선 포도열매가 맺히고, 무화과나무에선 무화과열매가 맺히게 하셨다.

즉 본질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본질을 십자가로 가려내신다.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 세우면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즉 십자가를 들이대면 하나님께로 난자와 나지 않은 자를 가려진다는 말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기계와 같다.

그 어떤 인간도 십자가를 들이대면 두더지처럼 숨어 있던 것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마치 구정물 통 속에는 고기 대가리도 들어 있고, 콩나물도 들어 있고, 썩은 두부도 들어 있지만 윗물은 너무도 깨끗하다.

그래서 위에서 보면 그게 돼지가 먹을 구정물이라고 생각 할 수가 없다.

주인은 작대기를 통 속에 넣고 밑바닥에 깔린 것들을 휘 휘 저어서 들추어지게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십자가를 가지고 인간의 숨긴 죄악성을 들추어내신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속에는 각종 더럽고 추악한 죄성을 품고 있지만 겉으로 광명의 천사와 같이 자비로운 모습으로 위장을 하고 살아간다.

예수님은 이런 상태를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겉으로는 잔디를 덮어서 아름답게 치장을 하였지만 그 속엔 해골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가장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킨다고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에게 하셨다.

지금도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 속에는 갖가지 탐욕과 자기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예수를 사랑한다고 한다.

하나님은 이들의 속성을 고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가지고 속을 뒤집어 놓게 하신다.

속을 뒤집어 놓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 인간의 존재를 공격하면 금방 반응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왜? 날 공격하느냐 라고 항의한다.

십자가에서 자기가 죽지 않은 자들은 자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은 참지를 못한다.

성도를 일컬어 예수 안에서 산 자라고 한다.

바울은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면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고 하였다.

성도는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있는 자이다.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자는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어 있다.

우직할 정도로 그리스도만 말하게 된다.

무엇을 해도 그리스도가 다 하셨다고 증거 할 뿐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란? 옆구리를 찌르면 본능적으로 예수가 튀어나온다.

그러나 성도 비슷한 흉내를 내는 자는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고 자기가 살아 있다.

그러니 무엇을 해도 자아 중심으로 자기를 자랑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런 자들의 특징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동상이몽의 현상이 나타난다.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전혀 다른 해석을 낳게되는 것이다.

동일한 언어의 성령을 말하여도 전혀 다른 성령의 활동을 말하게 된다.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은 성령이 지키도록 역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한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마치 인간은 말씀을 지키는데 고장이 나서 스스로는 안 되는데 성령이 오셔서 이제는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직도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또 하나님의 말씀에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히브리서 4:12-16절을 보면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특성을 인간을 해부한다고 한다.

무엇을 찔러 조깨는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해서 하나님 앞에 발가벗김 당하도록 하신다고 한다.

벌거벗겨서 무엇하려고 하는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은혜를 얻기 위하여 나아가도록 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이구 난 죽었구나!' 를 만들어서 예수님 앞에 나가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이실직고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게 말씀의 능력이라고 한다.

성경은 이런 상태의 마음을 상한 심령이라고 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하였다.

갈라디아서 3장 21-25절에서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夢學)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바울의 주장은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야 율법을 바로 지킨 자가 된다는 말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아직도 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왜?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가?

예수님만이 말씀을 온전하게 다 지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온 자들은 이제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는다고 한다.

즉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님이 지켜주신 것을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갈라디아 지역에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이상한 무리들이 나타나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를 가리는 다른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그러자 바울은 너희 앞에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께서 밝히 보이거늘 왜?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왜? 다시 종에 멍에를 매려고 하느냐 라고 책망하였다.

왜냐하면! 너희가 말씀을 지킬 수 있으면 예수는 헛 죽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자기를 보지 말고 믿어야 할 분을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자는 자기가 말씀을 지켜 내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지켜야 할 모든 말씀을 예수님께서 대신 다 이루었다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새 언약 안에서의 신앙이다.
새 언약 속에는 인간이 끼어 들 틈이 없다.

 

오직 아버지와 아들간에 맞은 언약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사실을 알리는 증거자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새 언약 하에 있는 성도들에게 갖가지 명령법들을 주었다.

 

성령께서 성도에게 너희가 한번 지켜보라고 한다.

그런데 해 보면 안 되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 성령께서 왜? 안 되는지 아느냐 라고 한다.

우리는 왜? 안됩니까? 라고 하면 네 몸이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말씀을 지키라고 합니까? 라고 물으면 그건 네가 항복을 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결국 새 언약 하에서 명령법들을 주신 목적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가 다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삶을 일컬어 성령 안에서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성령의 열매라고 한다.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성령은 말씀을 지키게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성령의 오심은 오직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히기 위함이다.

왜? 예수여만 하는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왜? 예수여만 되는지를 알리기 위해 말씀을 가지고 일을 하신다.

해 봐라?

왜? 안 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당신만이 유일한 해답입니다' 라고 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말씀을 수술하는 칼이라고 하기 전에 안식 이야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히 4장 7-11절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안식이란? 무엇을 하는 상태가 아니고 모든 일을 마치고 쉬는 상태를 말한다.

말씀을 지켜야 하는 자들은 아직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 자이다.

예수를 만난 자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안식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자기가 지켜야 할 말씀을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아직도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자는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 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이 지킬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만 지켜 낼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란? 내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지켰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만이 말씀에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아들이라고 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쉰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든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하신다.

모든 말씀들이 명령법으로 주어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들과 종을 구분하기 위함이다.

믿는 자와, 믿고자 하는 자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믿는 자는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고,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말씀을 지켜서 영광을 돌린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디서 어디까지가 아니고 온 말씀을 다 지키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말씀을 지키고자 한다면 모든 말씀을 다 지켜야 한다고 한다.

야고보서 2장 8-11절을 보면 "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만약에 단 하나라도 못 지키면 몽땅 못 지킨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한다.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안 지켜도 되는 예외 조항이 없다.

하나님의 명령은 몇 개는 지키고 몇 개는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다. 어느 정도 거룩하면 됩니까?

하나님 같이 거룩하라고 한다.

아니!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같이 거룩할 수 있습니까? 하지 말라.

안 된다면 죽어야 할 도리 밖에 없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에게 주었다는 것은 너희는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자기 한계를 아는 자는 '주여 나는 죽을 죄인이군요' 라고 해야한다.

그럼 대충 신약에서 명령하는 말씀들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말씀은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다.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오른 쪽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한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동행하라고 한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윗옷까지 벗어 주라고 하신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라고 하신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오직 그에 나라와 그에 의만 구하라고 하신다.

서로 사랑해라,

온유해라,

자비로워라,

죽도록 충성해라,

네 있는 것을 팔아 구제해라,
분내지 말라,

탐내지 말라,

쾌락을 좇지 말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이 모두를 한마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범주에 속한 것이다.

죄인이란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유전자가 들어가 있는 존재이다.

즉 본질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종자란 말이다.

그런 인간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

 

왜일까?

자 누구든지 하나라도 조금도 빠지지 말고 완전하게 지켜보라고 하신다.

죄인에게 이런 말씀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지키라는 것인가?

자기 꼬라지를 알게 하기 위함인가?

이는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라는 팥쥐 엄마의 말과 같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것인가?

포기하라는 것인가?

에이 어떻게 인간이 이런 걸 다 지킵니까? 라고 하지 말라.

하나님이 지금 농담 따먹기 하자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모든 말씀을 지키다가도 그 중에 한가지라도 못 지키면 모두 못 지킨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추상같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최선을 다하라는 신앙은 없다.
좋은 신앙 나쁜 신앙도 없다.
신앙은 오직 있느냐 없느냐 일 뿐이다.

믿느냐! 안 믿느냐 이지 넌 몇 퍼센트 믿느냐? 라고 묻지 않는다.
너 얼마큼 말씀을 지켰느냐를 묻지 않는다.
하나님은 완전을 요구하지 최선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자들은 성도라면 성도다운 삶이 나와야 안 되느냐 라고 한다.

도대체 그대들은 성도다운 삶을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최고로 아름다운 성도다운 삶이란? 날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꺾으신 뼈를 기쁨과 즐거움으로 믿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원하신다는 다윗의 고백을 음미해 보라.

다윗이 말씀을 못 지켜서 안타까워하는가?

아니면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악 중에 출생자라는 것을 알고 안타까워하는가?

다윗은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라고 한다.

즉 자기는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라는 고백이다.

왜? 안 되는가?

죄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선 왜? 성도를 구원하지 말자 곧장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세상에 두는가?

그리고 구원받았으면 죄를 이기는 몸을 주시던가 하지 않고, 죄를 이길 수 없는 몸인 줄 뻔히 알면서 말씀을 지키라고 하는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가? 멋지게 살아서 하나님을 기절시켜 보려고 하는가?

탕자는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탕자였지 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자신이 탕자였다는 것을 아는 자는 자기 행위로 온전함을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져 아버지의 은혜에 감복하며 스스로 아들이라 하지 않고 종처럼 살아간다.

왜? 그리 말씀을 지키겠다고 설쳐대는가?

왜? 그리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가?

믿음 없으면 믿음 없는데로 살고, 믿어지면 믿어지는 것으로 살으라.

그렇기 때문에 동일하게 믿으라고 하여도 한 사람은 자기가 믿는 믿음을 내어놓고, 또 다른 사람은 믿어지게 하는 믿음을 내어놓게 된다.

전자는 자기가 믿었다는 것을 자랑하게 되고, 후자는 주께서 믿게 해 주셔서 믿습니다 라고 하여 주를 찬양한다.

"주께서 믿게 해 주심으로 믿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설쳐대지를 않는다.

그 때 그 때 자기 안에 계신 분이 지키게 해주는 것으로 지키며 살아갈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말씀 지켰습니다" 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가 지킨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계신 분이 지키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한다.

갈 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것은 자신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인간이 죽었다는 것이다.

율법을 향하여 죽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함이다.

즉 내가 말씀을 지켜야 된다는 것이 죽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 지켰습니다" 라는 것으로 살기 위함이다.

그래서 성도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이런 말씀을 주었어도 육에 속한 사람은 항상 자기가 지켜야 하는 쪽으로 끌어 당겨서 말씀을 지켜야 할 주체를 자기가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

인간은 절대로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다.

자기가 믿는 것으로 살아가야지 편하다.

종을 아들로 살라고 하면 불편해서 못산다 종처럼 살아야 편하다.

 

반대로 아들에게 종처럼 살으라고 하여도 못산다.

아들은 하루종일 빈둥거리며 놀아도 밥 달라고 큰소리친다.

그러나 종은 한 일이 없으면 밥 먹는 것도 미안해한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안 된다.

왜냐하면! 본성이 행동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들로 살고, 종은 어디서든지 종으로 살고자 한다.

그 속에 본질이 그 행세머리를 못 버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각자가 아는 것으로 믿고 사는 길 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나 알 것은 성도는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이지 자기 노력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란 고백을 토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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