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개혁이라는 뱀의 독

정낙원 2008. 7. 25. 17:54

개혁이라는 이름의 뱀에 독

 

우연히 옆 동네 큰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을 만났다.

집사님 오랬만이네요.

평안하시지요.

그래 요즘 신앙생활 잘 하시지요.

 

예! 목사님.

 

참 그 교회 목사님 새로 부임 하셨다면서요.

예! 아주 능력 있고 젊은 개혁적인 목사님이 오셨어요.

그 목사님 오시고 나서 우리교회 참 좋아졌어요.

새로운 목사님이 오시고 난 후 교회 분위기가 너무 좋아졌다고 자랑을 한다.

 

아! 그래요!

그 소릴 듣고 넌져시 염장을 지르려고 한마디 해본다.

집사님!

집사님은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교회가 개혁되었다고 하는데 무엇이 개혁되었는가요?

 

예! 한마디로 교회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옛날 목사님은 너무 권위적이어서 혼자 모든 것을 다 하셨는데 새로 오신 목사님은 개방적이라서 성도들을 동참 시켜서 참 좋다고 한다.

교육관도 카페처럼 화려하게 확장을 하고, 강단도 낮추고, 강대상도 크리스탈로 바꾸고, 바자회도 하고, 농산물 직거래 장터도 열고 하여튼 바쁩니다.

 

옛날에는 예배 드리는게 고리타분했는데 이제는 예배 분위기도 달라져서인지 교인들이 재미있어 하고 활기가 넘친다고 한다.

이번엔 학생들이 필리핀으로 단기 선교도 떠났습니다.

 

아! 그래요.

듣다 못해서 한마디 거든다.

 

그런데 집사님! 세상엔 좋은 교회 나쁜 교회가 없습니다.

교회냐! 아니냐! 만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면 교회이고 십자가 복음이 증거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복음으로만 판단이 되지 무슨 일이나 분위기로 판단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개혁이란 말과 좋은 교회라는 말에 현혹당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교회는 개혁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잔소리처럼 들리는지 못 마땅한 눈치다.

아! 예~ 에~???????

대화는 여기서 갈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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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개혁은 무엇이며, 좋은 교회란 또 어떤 것인가?

 

이 시대 정치권이나. 사회나, 모든 곳에 개혁이라는 말이 난무한다.

마치 개혁만이 진리인 것처럼 회자된다.

교회도 여기에 편승하여 마치 개혁하는 교회가 주님이 바라시는 올바른 교회인 것처럼 인정받고 있다.

 

국어사전에서 개혁이라는 말을 "<명사> 새롭게 뜯어고침" 이라고 정의해 주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새롭게 뜯어고친다는 것은 기존의 것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개혁이라고 하면 이렇게 저렇게 바꾸고 좋게 뜯어고치는 것으로 생각한다.

개혁은 사전적 의미로 보면 한마디로 실용주의에서 기인된다고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선 개혁이라는 말이 통용되지만 교회에선 사용되어질 수 없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교회란 고쳐질 것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들에 의하여 뜯어 고쳐질 교회라면 애당초 주님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운 교회는 인간이 뜯어고치고 말고 할 것이 없는 완전한 교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비 성경적이다.

신앙고백이란? 온전하고 온전치 못한 것이 없다.

다만 신앙고백이 맞느냐 아니냐만 있을 뿐이지 어정쩡한 것은 없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마 16장 15-18=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즉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자가 교회란 말이다.

 

한마디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아는 자가 교회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것엔 좋고 나쁨이 없다.

다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만 있을 뿐이다.

당연히 좋은 교회, 나쁜 교회도 없다.

오직 교회냐! 아니냐! 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고백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은 오직 하나님께서 고백케 해 주실 때만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해 주셨다.

 

예수님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를 칭찬하지 않고 베드로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감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다.

이는 곧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 진다는 말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신앙이 고백되어지는 베드로와 같은 성도를 교회로 세우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와 성도가 모여서 성전이 지어진다고 하였다.

 

에베소서 2장 20-22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성도 하나가 있어도 교회이고 둘이 모여도 교회이다.

열 명이 모여도, 백 명 또는 천 명이 모여도 한 교회이다.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한다.

마치 세포 하나 하나가 독립적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신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하나이든 둘이든 백이든 천이든 만이든 한 뜻만을 말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인 성도는 모두가 동일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성질과 동일한 사상을 말하게 되어 있다.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이질적 사상을 용납 할 수가 없으므로 개혁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의 교회들은 한 주(主)를 모시고,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오로지 한가지 일에만 관심을 갖는다.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만 증거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는 새 언약만을 증거 한다.

만약 다른 신앙고백을 하는 자가 있다면 쫓아 낼 일이지 뜯어고칠 대상이 아니다.

 

신앙이란?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끝까지 잘 지켜내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변개치 말라고 한다.

복음을 변개치 말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는 것을 지키란 말이다.

 

신앙생활이란?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와,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에 인간의 것이 썩이지 않게 하는 싸움이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신 것에 인간의 것을 섞으려고 한다.

 

이 시대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즉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이라고 한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입만 열면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외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 안에 오직 예수님의 피만 남기도록 개혁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의 피는 감추고 인간의 흔적들을 남기기 위한 개혁을 한다.

인간의 것을 버리는 쪽으로 개혁하지 않고 인간의 것을 남기는 쪽으로 개혁하고자 한다.

 

바울처럼 예수를 위해서 자기 것은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의 것만 붙잡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것은 귀하게 여기고, 예수님의 것은 배설물처럼 버리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자랑스럽지 않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뜯어고쳐 놓은 제도가 자랑스럽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피가 증거 되어지지 않고, 자기가 행한 일들이 자랑되어진다.

 

실상이 그렇다 보니 개혁을 외치는 교회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밀려나고, 인간의 종교적 테크닉과 열심과 충성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개혁이라고 외치는 그 내면을 들어가 보면 고작하여 신앙생활 하는 폼(분위기)을 좀 바꿔보자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금 좋다고 개혁한 것도 나중엔 또 개혁되어져야 할 고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은 폼(형식)을 바꾸고 예배 분위기를 바꾼다고 해서 기뻐하지 않는다. (속된 말로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해서 수박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목사가 가운을 입는 것이 과거 권위적 산물이라고 하여 가운을 버리고 양복을 입는다고 해서 개혁이라 말할 수가 없다.

본질은 목사가 가운을 입느냐 안 입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전하느냐가 중요하다.

 

예배 중에 헌금 바구니를 돌리지 않고 들어오면서 헌금함에 넣는다고 개혁이 아니다.

찬송을 앉아서 부르지 않고 일어서서 부른다고 개혁이 아니다.

과거엔 찬송가만 불렀는데 이제는 기타 치며 복음성가를 부른다고 개혁된 것도 아니다.

 

교회의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헌금의 50%-80%는 구제와 전도에 사용한다고 해서 개혁이 되어진 것도 아니다.

헌금의 사용처를 공개하고 투명하게 한다고 개혁이 아니다.

교회의 제도를 민주화한다고 해서 개혁이 아니다.

 

목사가 전념하던 일을 장로나 집사에게 이양한다고 해서 개혁이 아니다.

교회의 일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증거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가운을 입은들 양복을 입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목사가 설교를 하든 장로가 설교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서든지 복음만 증거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복음 이외엔 관심이 없다.

 

그런데 개혁을 외치는 자들은 복음엔 관심이 없고 오직 멋진 교회를 원한다. 왜? 목사들이 멋진 교회를 집착하는가?

그것은 일평생 생계를 보장해 주는 안전한 직장이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물려줄 기업이기 때문에 교회를 목사의 뜻에 맞도록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교회라면 목사가 성도를 이래라 저래야 간섭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여전히 성도의 주인이며 머리가 되셔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거듭난 성도는 말씀에 간섭 당하고 살지 목사에게 간섭 당하지 않는다.

복음을 아는 목사는 복음만 증거하지 성도를 관리하려고 하지를 않는다.

목사들이 성도를 간섭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뜻에 맞는 기업에 종업원을 만들고자 함이다.

성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이 예수님이거늘 왜? 목사가 주인 노릇 하고자 하는가?

 

왜? 성도가 목사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가?

만약에 성도를 관리하고자 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목사가 아니다.

반면에 목사에게 관리를 받고자 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도 역시 성도가 아니다.

 

성도를 목사의 입맛에 맞추려고 하는 것은 목사의 탐욕이다.

목사의 탐욕을 이루기 위하여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의 제도나 성도의 신앙 칼라를 자기 입맛에 맞추려는 것이다.

 

결국 목사가 교회라는 기업의 사장이 되어 주인이 되고 왕 노릇하고 싶은 것이다.

목사들이 교회를 무엇인가 자꾸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것은 속셈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 외적인 것들로 "복음 모름, 복음 없음" 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

복음 외에 것으로 교회 됨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곧 교회 아님을 스스로 자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늘 변화하기를 소망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얼마가지 않아서 식상해 하고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한다.

인간들은 어떤 고정된 규범과 틀에 가두려고 하면 일탈하고자 반발을 한다. 이런 만족치 못하는 마음이 분위기를 바꾸고 뜯어고치는 것을 좋아한다.

 

교회의 제도를 변화하고자 한다는 것은 복음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생활의 식상함을 덜어보고자 끊임없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제도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교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교인들에게 신명난 굿판을 벌려주어서 기분전환을 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종교놀음에 빠지게 하여 교회라는 단체에 붙잡아 두고자 하는 것이다.

예배를 굿판으로 만들어 주어서 세상에서 억눌린 한(恨, 스트레스)을 풀어 보라고 한다.

 

그런데 복음을 모르는 교인들은 이런 한 풀이성 예배를 드리고는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마음이 울컥하고 감격하여 눈물이 나는 은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신앙의 끝에는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신 것이 있지만, 종교의 끝에는 인간의 행함이 들어가 있다. 인간들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시험)하신다.

 

잠언 27:21=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시험)하느니라"

 

복음은 인간을 책망하지만, 종교는 인간을 칭찬한다.

복음엔 자기 부인이 들어가 있지만, 종교엔 인간의 긍정과 칭찬이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어떻게 하면 인간을 기쁘고 행복하게 할꼬! 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래서 거짓 목사들은 늘 군중들이 기뻐하는 것으로 채우고자 뜯어고치는 것이다.

종교는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한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마음은 조석지변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늘 변하는 인간을 붙잡아두기 위해서 종교로서의 교회는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종교단체로서의 교회가 생존하려면 교인이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교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미리 알아차리고 대형마트의 상품처럼 구미에 맞는 종교상품들을 진열해 놓아야 한다.

 

이 시대를 일컬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한다.

즉 지금까지 지켜오던 격식이나 상식을 띄어 넘자는 것이다.

교회들이 새로운 시대적 패러다임이라고 하며 이에 편승하여 개혁적이라며 예배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열린 예배니, 찬양 예배니, 연극예배니,,,, 라는 갖가지 이름의 예배들이다.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식상하니 산 기도니, 철야 기도니, 백일 기도니, 통성 기도니, 골방 기도니, 릴레이 기도니, 40일 특별 기도니,,,라는 갖가지 이름의 기도 형태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마치 뷔페 음식점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음식을 골라 먹듯이 교회는 갖가지 종교 상품들을 진열해 놓고 취향에 따라서 골라잡으라고 한다.

서예 반이니, 꽃꽂이 반이니, 바이올린 반이니, 첼로 반이니, 국악 반이니, 영화 감상 반이니, 등산 반이니, 사진 반이니, 무용 반이니,,,,,

가급적이면 서양 냄새와 엘리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동호회를 진열해 놓고 마음대로 가입하여 즐기라고 한다.

 

남 선교회니, 여 전도회니 하는 이름의 동호회를 만들어서 회원을 가입케 하고 부서 모임이라는 핑계로 교회에서 합법적으로 재정을 타내서 백두산 기도회니, 금강산 기도회니, 해외 단기 선교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관광에 나선다.

 

이젠 교회를 멀티미디어 공간으로 만들어서 교인들을 붙잡아 두려고 한다. 교육관을 짓고,

주차장을 넓히고,

도서관도 만들고,

당구장도 만들어 놓고,

음악 감상실도 만들고,

 

영화관도 만들고 갖가지 이름의 문화 공간을 만들어서 취향에 따라서 교회에서 놀라고 한다.

인간이란 끊임없이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종교전문가들인 목사들이 놓칠리가 없다.

 

목사들은 군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민감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래서 종교 전문가들인 목사들은 날마다 새로운 종교 제품들을 개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는 다양한 종교 제품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좋은 교회로 인정받는다.

 

교회들이 이벤트성 행사를 연중행사로 한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 아님을 스스로가 자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조금 지나면 싫증이 나고 또 새로운 것을 찾게 된다.

 

성경은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는 곧 과거의 인간이나 지금의 인간이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복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듯이 인간 또한 변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지금 새로운 것이란 것도 과거에 이미 있었던 것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그러니 개혁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교회 분위기를 바꾸고, 예배분위기를 바꾼다고 개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분위기도, 그 어떤 예배 분위기도 복음일 수 없다.

 

복음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뿐이다.

복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다.

복음을 아는 목사는 개혁을 외치지 않는다.

 

복음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죽였다 다시 살리는 창조의 능력이다.

복음은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지 고장난 것 고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변화된 인간을 원치 않고 새로운 인간을 원하신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변화(개혁)를 꾀한다는 것은 술수이지 복음은 아니다.

 

교회란? 복음만 증거되면 이벤트가 없어도 교회가 되지만, 복음이 빠진 상태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행한다 하여도 그것은 종교집단이지 교회가 아니다. 복음은 식상하지도 않고 고리타분하지도 않다.

복음은 늘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어 있다.

 

복음을 알면 알수록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농도가 깊어지고 맛도 짙어지게 되어 있다.

진정으로 복음을 아는 목사라고 한다면 오히려 복음에 맛이 변할까 두려워한다.

포도주엔 물이 섞이면 맛을 잃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의 복음에 인간의 행함이 섞이면 맛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과 교회는 개혁되어져야 할 것이 아니고 도리어 지켜져야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믿는 신앙은 개혁되지도, 개혁되어져서도 안 된다.

복음이 개혁되면 망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진정한 신앙은 개혁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끝까지 잘 보존하고 지키는 자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개혁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원래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그대로 잘 보존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다듬은 돌로 제단을 쌓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인간들이 각색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니 개혁을 외칠 것이 아니라 복음이 변개되지 않도록 보수를 외쳐야 할 것이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받는 것이지 교회를 반듯하게 개혁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서만 구원받는다는 것만 증거되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셨으니 우리는 그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면 된다.

죄를 사할 수도 없는 교회를 뜯어고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면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개혁은 복음이 변질되어 가는 시대에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자고 외쳐야 한다.

성화 되어야 좋은 신앙이고 좋은 교회가 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성화 되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

자기를 갈고 닦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의 피로서만 구원받습니다 라고 외쳐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끝까지 잘 보존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좋은 신앙이다. 인간이란 묘해서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한다.

꼭 손으로 만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고치려고 한다.

이름하여 죄이다.

이런 죄성이 복음조차도 자기 입맛에 맞도록 고치고자 한다.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만 증거하라.

진정한 개혁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만 증거하는 것이다. "교회를 개혁합시다" 라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합시다" 라고 하여야 한다.

 

제발 교회 안에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는 십자가만이 증거 되도록 하라!

예수님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십자가 밑에서 성도들이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하여야 한다.

 

내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한다고 속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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