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글

니들이 게 맛을 알어

정낙원 2008. 7. 25. 17:52

니들이 게 맛을 알어! 


맛에 대하여!

당신은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이야기로 들었습니까?
당신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니들이 게 맛을 알어! 라는 광고방송 문구가 잇다.
이는 게를 먹어보지 못한 자는 게 맛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먹어 보고 말을 하라는 뜻이렷다.


맛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맛은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약간 쌉싸름하다 라고 하면 그 맛을 어떻게 설명을 하겠는가?
비록 설명을 한다고 하여도 그 설명이 그 맛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맛은 먹어 본 사람에게만 설명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 이거 약간 쌉싸름한데 라고 하면 그 맛을 아는 자는 척 알아먹지만, 모르는 자는 자신의 온 이성을 동원하여 그 맛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해한다고 해서 그 맛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야! 이거 약간 쌉싸름 한데 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맛을 아는 사람을 겨냥해서 하는 말임을 알게 된다.

믿음 역시도 이와 같다.

믿음도 믿음을 가진 자에게만 설명이 되어지는 것이다.


성경이 믿음을 말하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가진 자를 찾아내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다.

즉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자를 찾아내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는 이미 예수를 믿을 자들이 정해져 잇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 시작한다.
그런데 그 세상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뒤죽박죽 섞여서 혼돈 되어지고 만다.
그 혼돈된 세상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을 하신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진다.

비로서 하늘에 것과, 땅에 것으로,,,,,,,갈라지기 시작한다.
이는 마치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늘백성과 땅 백성을 갈라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우주만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구속사 이야기임을 쉽게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온 것은 예수를 믿는 자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이들을 이름하여 창세로부터 어린양의 생명 책에 녹명된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들이다.
즉 예수! 자기백성들이다.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를 찾아내기 위하여 오셨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영생 받지 못할 자에겐 예수님은 철저히 가려져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사람에게 동일한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알아듣고 어떤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록 창세로부터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라 할지라도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 잇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혈과 육으로는 알아보지 못하도록 인간들의 눈과 귀를 막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보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알아보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여기서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책망을 하신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우리가 제 부모를 아는데 어째서 하늘로서 내려 왔다고 하느냐? 라고 하면서 미친놈이라고 수군거린다.

육적으로는 유대인들의 말이 백 번이고 맞는 말이다.

유대인들의 논리대로라면 분명히 예수님의 부모와 형제들을 아는데 하늘로서 왔다고 하니 예수님이 미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맞다.

오히려 예수님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듣는 자가 미친놈이다!

그러자 43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고 하신다.

그러면서 이어 44절에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라고 하신다.


아버지께서 믿게 해 주는 자들은 다 알아먹는다고 하셨다.

결국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고,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은 아버지께서 알게 해 주셔야만 알 수가 잇는 비밀인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알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지 않고 네가 "복 되도다" 라고 하였다.
즉 네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이구나!

그러니 나를 알아보는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이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잘 때 함은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놀렸지만 셈은 수치를 가려 주었다.
그런데 노아가 잠이 깨고 난 후 자신의 하체를 덮어 준 것을 보고 아들들에게 묻는다.
그러자 셈이 덮어 주었다고 하니, 노아는 셈의 하나님을 찬양해 버린다.

창세기 10장 26절을 보면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라고 한다.
왜? 노아는 셈을 칭찬하지 않고 셈의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이는 셈으로 하여금 아비의 수치를 가려주게 해 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버지께서 믿게 해 주셔서 믿는 것이므로 믿는 자신을 자랑해서는 안되고 믿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한다.

인간이란? 자기에게 경험되어진 것을 믿고자 한다.
경험되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온전하게 이해되어지지를 않는다.
하나님이니, 예수님이니, 천국은 믿을 일이지 이성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이성을 떠나 있는 말이다.

예수 안에서 살았다 라는 것은 예수 안에서 산 자는 이해한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살지 못한 자는 자기 이성으로 접근하여 이성적으로 살았다는 것을 이해하고자 한다.
믿음으로 이해되어져서 알게된 살았다는 것과,

이성적으로 이해하여 알게되어 살았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믿음으로 알게 된 것은 알게 된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이성으로 알게된 것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난 믿는데, 넌 왜? 못 믿느냐 라고 타박하게 된다.
난! 이렇게 성화 되었는데, 넌 왜? 아직 그 모양이니! 라고 행세하게 된다.
이런 자들은 상석에 앉아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게 된다.

잘난 자 와 못난 자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로 난 믿음이 아니고 인간들이 만들어 낸 믿음을 소유하고 잇다는 증거이다.

믿음으로 알아진 예수는 그리스도이지만, 이성으로 알아진 예수는 적그리스도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믿음이라는 말을 비록 인간의 언어로 말은 하지만, 그 언어로 담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 할 수가 없는 불가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을 받은 자는 믿음으로 살지만, 믿음을 받지 못한 자는 믿고자 한다.

그러나 믿는 것과, 믿고자 하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이는 니들이 게 맛을 알어! 와 같이 먹어 본 자와, 먹어보지 못한 자의 차이이다.
믿는 자는 믿어지는 것으로 살지만, 믿고자 하는 자는 끊임없이 믿고자 하는 것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믿고자 하는 것엔 반드시 방법론이 따르게 된다.

경남 양산에 가면 감람산이라는 큰 기도원이 있다.

거기에 가면 뒷산에 기도처가 많이 있다.
산에 한참 올라가다 보면 과장해서 전봇대만한 나무로 된 십자가가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거기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잇다.
이곳은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은 곳입니다 라고 써 있다.
(실명이 써 있는데 여기선 생략한다. 벌써 이십년 전 일이라 지금도 잇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기거서 기도하려면 순번을 정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왜? 그런 곳에 사람이 순번을 정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가?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치 이스라엘에 가면 특별한 은혜가 내리는 줄 알고 성지 순례를 가는 것과 같다.

이런 사상이 은혜 받는 비결이니, 축복 받는 비결이니 라는 방법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결국엔 어느 목사를 추종하게 되고 어느 교회를 찾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게 되고 마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곳을 제공하는 자이나 그곳을 찾는 자들은 모두가 믿음은 없고 믿고자 하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없는 장사꾼들이 그런 장소를 만들어 놓고 믿음 없는 자들을 모아서 지옥으로 데리고 가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도 거짓 것을 믿게 하여서 가라지를 걸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친 사건을 본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누구든지 물이 동하는 것을 먼저 본 사람이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지 다 낳았다.

이 때는 누가 누가 먼저 들어 갈 것인가? 경쟁이다.

만약에 새벽 3시에 물이 동한다면 잠이 든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고 당연히 잠이 깬 사람만이 들어 갈 수가 있다.
그러면 새벽 3시에 들어가서 나은 사람은 베데스다 못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서 나음을 입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된다.

누가 묻기를 당신 어떻게 해서 병을 고침 받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야! 그 날은 어떻게 하든지 내가 먼저 들어가야겠다고 각오를 하고 있었지!
그런데 12시가 되어도 1시 2시가 되어도 아무런 기척이 없는거야!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지쳐서 오늘도 물이 동하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하여 잠을 자는 거야!

그러나 난 독한 마음을 먹고 안 지고 있는데 갑자기 못에서 물보라가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 보이지 않겠어!
그래서 잽싸게 뛰어 들어갔지! 그래서 내가 나은 거야!
그러니 너희들도 병을 고침 받으려면 나 같이 밤에 잠자지 말고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돼!

그러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꺼야!

이렇게 되면 병고침 받는 비결이라는 방법론이 하나 생기게 된다.
결국 나는 이러 이렇게 해서 나음을 입었노라고 자기 영웅담을 간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병을 고치신다.
그 사람의 노력은 일절 허용하지 않는 차원에서 고치신다.
병자의 필요에 의해서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가신다.

그래서 하는 말씀이 그냥! 야! 일어나 걸어가라! 이다.
인간의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걸어가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낫게 해준 38년 된 병자는 자기 자랑할 것이 없다.


누가 와서,,,,,

야! 너 어떻게 해서 병을 고쳤는데 라고 물으면!
몰라! 예수라는 양반이 가라고 했어!!
난 가만히 있는데 예수님이 찾아와서 가라고 했어!

믿음이란? 이와 같다.
나의 의지와 노력과 상관없이 어느 날 주어진 것이다.
어느 날 어느 순간부터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한다.
막연하던 말씀들이 이젠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만물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기 시작한다.
십자가의 도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예전엔 몰랐는데 이젠 십자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이고, 묘한 흥분감이 돈다.
마치 연애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설레임과 같은 것이 든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믿음과 사랑도 이와 같다.

그러나 믿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잇지! 라는 방법론을 찾게 된다.
안 믿어지면 안 믿으면 되는데,

굳이 믿고자 하는 것은 믿음을 만들어내서 자기를 포장하고 싶어서이다.
결국 믿고자 하는 자는 자기 행위를 버리지 못하고 붙잡게 된다.

이런 자들은 믿게 해 준 분이 없으므로, 자기가 믿게 된 것을 증거하게 된다.
믿는 것은 주체가 믿게 해 주시는 분이지만,

믿고자 하는 것은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된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믿음에 대한 오해가 발생되어진다.
동일한 믿음이라는 언어를 가지고서도 믿음을 가진 자와,

믿고자 하는 자 간에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믿음은 믿어지는 것이지, 믿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믿어지는 것으로 믿지,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으로 믿는 게 아니다.

믿음을 받은 자는 믿음을 언어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져 믿어지는 것으로 믿을 뿐이다.
이미 믿음을 가지고 믿는 자는 자기를 보지 않고 믿게 해 주신 분을 바라보지만,
믿고자 하는 자는 믿고자 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므로 끝까지 자기를 의지하게 된다.

믿음은 믿는 자기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주신 분을 증거하는 것이다.
즉 성도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믿는 자기를 바라보지 말고 믿음을 주신 분을 바라보라는 의미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믿는 자라고 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변화된 것을 볼 것이 아니라 믿게 해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믿음을 받지 못한 자들이 자기 이성으로 믿음을 표현해 내려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진다.

그러니 무슨 무슨 일을 하였다는 것은 자랑이 되어지는데 예수는 자랑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성화 신앙이 비 성경적인 것은 끊임없이 변화된 자기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희비가 복음으로 주어지지 않고 자신의 변화된 것과 비례하여 나타나게 된다.

복음 자체가 기쁨이고 행복이어야 하는데, 성화신앙은 열심히 행한 자기의 업적에 따라서 기쁨과 행복이 교차하게 된다.

오늘도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하고, 착하게 살았으면 기쁜데, 반대로 도적질하고, 술을 먹고, 게으름을 피웠으면 마음이 천근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에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기쁜데, 몸이 피곤하여 새벽기도를 빠지면 마음이 하루 종일 찜찜하다.

조금 거룩하게 살았다 싶으면 발걸음이 가벼운데, 속되게 살았다 싶으면 발걸음이 무겁다.

자기 자신의 행함의 여부로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진다.
결국 무엇을 기쁨의 근거로 삼느냐이다.

하나님이 묻는다.
너는 무엇으로 기뻐하느냐? 라고!
하나님의 은혜냐! 변화된 네 모습이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쁨이 되면 예수를 사랑하게 되고, 변화된 자기 모습을 보게 되면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자기 자랑을 하게 된다.

성경은 믿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이미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언어구조학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성령을 받은 자라면 성경의 뜻이 이해되어지게 되어 있다.
혹자들은 성경을 원어로 분석하여 믿고자 한다.


베드로는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라고 하였다.
억지로 풀다가 망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은 원어를 분석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성경을 기록한 그 성령의 감동이 이입되면 자연히 믿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원어를 몰라도 성령을 받은 성도는 성경이 이해되고 믿어지는 것이다.
성경을 이해하고 믿는 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학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무식해서 성경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믿어진다.

많이 배우지 못해 예수를 못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지 않아서 못 믿는 것이다.
어느 시대이고 꼭 믿음이 없는 것들이 믿는 척하여 진짜 믿는 자들을 믿음 없는 자로 매도하여 핍박을 하였다.

지금도 괜히 자기가 믿음이 없는 것을 가지고 남을 탓한다.
믿어지면 믿어지는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라!
믿어지면 범사가 감사거리로 보인다.
믿어지면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대 안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으로 구제 할 것인가?

복음인가?

행함인가?
자기 열심과 충성인가?

하나님의 은혜인가?

그래서 지금도 묻는다,,,,,니 들이 게 맛을 알어! 라고,,,
게를 먹어본 사람은 알어! 라고 말할 것이고,,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게 맛이 어떻지? 라고 할 것이다.

설명하려고 하지 말라.
단지 먹어 보면 안다고 하라.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시면 자연히 알게 된다고 하라.

그대는 예수님을 만났느냐! 이야기로 들었느냐!
남이 만난 예수를 말하지 말고 당신이 만난 예수를 증거하라.
그대가 만난 복음을 증거하라!

복음을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당신이 깨달은 그대로를 증거하라!
당신이 만난 예수가 진정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맞는지 확인해 보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말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예수뿐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성도를 십자가에 끌고가 함께 죽인다.

그러나 인간들이 만든 가짜 예수는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복을 주겠다고 한다.
성경은 이런 예수를 적 그리스도라고 하고, 마귀라고 한다.

그러니 내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기적인 것이다.
성경이 믿어진다는 것이 기적인 것이다.

이런 젠장! 성경이 믿어지다니,,,

난 돌아이 인가봐!

오! 놀라워라!


돌발 퀴즈 하나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구구인가?

정답은 미친 사람

미친 사람은 기름값이 올라도 걱정이 없고,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들고 식량이 부족해도 걱정이 없고,
걱정할 것이 아무도 없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당신이 고생하는 것은 미치지 않아서이다.
제발 예수에게 미친 돌아이가 되라!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예수에게 미친 돌아이가 되는 축복이 임하시길,,,,
우리 모두 예수에게 미친 돌아이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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