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 칼럼

그 노정(路程)대로 인도하심

정낙원 2016. 5. 7. 19:25

◆ 그 노정(路程)대로 인도하심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으로 대하십니다.

광야 길로 인도 하신 것도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신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 40년 동안 통행케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는 일들을 벌리십니다.

이는 은혜를 아는 자만이 은혜의 땅인 가나안에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서의 삶은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광야를 빨리 벗어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을 토해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살 수 있는 은혜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은혜는 역설적으로 죄를 통해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토설이 되는 광야로 인도 하신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 노정대로”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그 노정”이란? 이미 정해진 코스란 뜻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옛 언약과 새 언약 두 언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 언약은  죄를 고발하고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은혜로 덮어주는 살리는 언약입니다.

먼저 죄를 고발하고 죽이는 언약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가기 전에 먼저 광야라는 죄가 고발되어지고 죽임을 당하는 코스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이는 은혜를 드러내기 위하여 죄를 고발하는 코스입니다.

광야 자체가 인간의 죄가 토설 되어지는 곳입니다.

왜? 하나님은 원망 할 수밖에 없는 코스로 인도하시는가요?


이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성도를 구원한 목적을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엡 1:3-7절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는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 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창조(구원)의 목적이 그 은혜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을 광야로 빼내서 너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막에서 희생 제물의 제사로 죄를 용서해 주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정의하기를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을 열 번 거역한 것처럼 이스라엘도 열 번을 하나님께 거역하였다고 합니다.


바로처럼 거역을 하였으면 당연히 바로처럼 저주를 받아 멸망당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창세전 언약대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하여 은혜와 긍휼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노정대로 인도하신 결과 이스라엘의 원망으로 인하여 반석이 깨어지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광야에서 깨어진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고전 10:4절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하나님은 원망한 이스라엘의 죄값을 그리스도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전 언약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반석에서 나온 물을 먹고 살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그들과 동행하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은혜와 긍휼로 감싸고 다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반석의 깨어짐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성도의 전 인생을 함축합니다.

성도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죄가 토설 당해지는 삶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의 끝에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광야 길과 같이 늘 하나님의 뜻과 충돌하여 죄가 고발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가 고발당한 자리에 예수의 피를 보시고 은혜로 감싸 안으십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법으로 대하는 자와 은혜로 대하심을 입는 자들이 있습니다.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이 있습니다.

긍휼의 그릇은 이스라엘처럼 은혜로 대하시고 진노의 그릇은 바로처럼 진노로 대하십니다.

 

신앙생활이란? 유구무언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실수하고 넘어지는 일들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된 다윗을 끝까지 은혜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말 년에 자기 힘을 과시하는 인구조사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삼하 24:1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대상 21:1절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것은 자기 치적을 자랑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죄입니다.

왕의 자격이 없는 자를 하나님께서 왕으로 삼은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럼 다윗은 그 어떤 큰 업적을 쌓았다 할지라도 그건 다윗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마귀에게 미혹당하여 자기 의를 자랑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다윗을 범죄케 한 후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서 용서 해 주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폭 감싸인 채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다윗처럼 간섭하십니다.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 질까 조심하라고 경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이스라엘의 광야 길처럼 늘 시험 당하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사십년 동안 반석이 두 번 깨어짐을 당하는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출애굽하고 난 후 곧 바로 당하였고,

두 번째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또 다시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우리 인생의 전부를 말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 때 구약 교회가 타락한 것처럼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의 종말의 교회들도 타락 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였습니다.


슥 12:10-14=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그 찌른바 그를 보리라는 것은 초림과 재림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에도 교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들을 합니다.

교회가 떡에 가치로 가득찬 강도의 굴혈이 되어 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을 자기 배를 위하고 땅에 일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인간들은 자기 배를 불리게 해 주시는 신을 원합니다.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의식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죄를 먹고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재림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영적 상황은 초림이나 재림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느 시대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지나오면서도 똑 같은 일을 반복하여서 저지른다는 것은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 죄를 이길 수가 없고 또한 인간의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도 자기 백성들을 창세전 언약대로 은혜와 긍휼과 용서하심으로 끝까지 인도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노정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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