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 칼럼

모세, 하나님의 산에서 이드로를 만나다

정낙원 2016. 6. 3. 17:05

◆ 모세, 하나님의 산에서 이드로를 만나다 ◆


모세는 40년전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던 그 산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구원의 완성 지점과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그 장소인 호렙산은 모세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을 쳤다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산으로 돌아오자,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가 모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찾아옵니다.

이 그림은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예수님이 앞서간 성도들을 데리고 재림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드로는 미디안 제사장으로서 모세를 40년 동안 자신의 양을 치게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지도자로 훈육을 한 사람입니다.

모세에게 있어 이드로는 영적인 스승과 같습니다.


미디안 민족은 아브라함의 후처(後妻)인 그두라의 소생입니다.

창세기 25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고 난 후 그두라와 혼인을 합니다.

그리고 후처 인그두라의 소생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고는 이삭이 살던 곳에서 동쪽으로 가서 살게 하였는데 거기가 바로 미디안 광야입니다.


이들이 바로 광야에서 민족을 이루고 살았는데 미디안 족속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 400년 전부터 아브라함 신앙을 계승하고 광야에서 양떼를 치면서 살아간 민족들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앞서서 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들을 광야로 인도하기 앞서 이미 400년 전부터 미디안 족속들을 먼저 광야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살펴보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사건은 아브람과 언약하신 후 400년이 지난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지 400년이 지난 후에도 미디안 후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브라함 신앙이 그대로 전수되어 왔다는 뜻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하나님과 연관되어진 것으로 자식들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는 세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르우엘과 이드로와 호밥입니다.


“이드로” 라는 말은 “각하”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르우엘”“하나님의 친구” 라는 뜻입니다.

 “호밥”은 “사랑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과 연관된 이름들입니다.

이름 속에 이들의 신앙이 담겨져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18절에 보면 모세가 애굽의 왕자에서 쫓겨나 미디안 광야에 갔을 때 그를 맞아준 사람을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이라고 합니다.

르우엘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하나님의 친구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모세가 40년 동안 양을 치는데 이 때에는 르우엘의 양이라고 하지 않고 이드로의 양을 쳤다고 합니다.

이드로는 “각하” 즉 임금이라는 뜻으로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민수기 10장을 보면 호밥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모세의 장인 르우엘의 아들로 나타나는데 이는 히브리어의 장인과 사위는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보여집니다.

실제 사사시 4장 11절에서 호밥은 모세의 장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민수기 10장에서 모세는 호밥을 일컬어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디에 진을 쳐야 할지를 알려주는 눈과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는 성령과 같다는 뜻입니다.

"호밥"은 "사랑하는 자"라는 뜻인데 이는 보혜사와 같습니다.

 

한 사람에게 세 가지 이름으로 말하는 것은 세 가지 영적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처럼 3 가지 사역적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왕이면서 선지자이면서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선지자이면서,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는 제사장이십니다.


미디안 제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친구인 르우엘이면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임금으로서의 이드로이고,

성도는 인도하는 성령을 상징하는 사랑하는 자인 호밥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동안 하나님의 산이 있는 미디안 광야에 보내서 하나님을 예표하는 이드로의 양 떼를 치면서 여호와의 신앙을 전수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쉬운 말로 모세는 아브라함의 후처의 소생들이 사는 미디안 광야에서 르우엘이라는 하나님의 친구로부터 아브라함 신앙을 전수를 받고서 이드로 라는 임금의 양 떼를 친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전처와 후처를 언약적으로 보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

전처의 소생은 육적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후처의 소생들은 영적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전처의 소생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고,

후처의 소생들은 애굽과 격리된 하나님의 산이 있는 미디안 광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자 전처인 사라의 소생들은 애굽으로 내려가 종살이를 하게 되지만,

후처의 소생인 미디안 족속들은 광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애굽은 세상을 말하고 광야는 천국과 같은 곳입니다.


모세는 엄밀히 말하면 사라가 낳은 이삭의 후손으로서 아브라함의 전처의 소생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12 아들로 낳아진 전처의 소생들입니다. 


이들을 누가 구원을 해 내는가 하면 미디안 광야 하나님의 산에서 양을 치던 모세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애굽의 왕자 모세가 아니라,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던 모세입니다.

애굽의 왕자로서의 모세와 미디안 광야에서의 모세는 다릅니다.


애굽의 왕자로서의 모세는 육에 속하였다고 한다면 미디안 광야에 모세는 영에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산이 있는 미디안 광야에서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라고 보내심을 입은 모세는 곧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서 아브라함의 전처의 소생들을 구원해 내라고 보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대로 애굽에 있던 아브라함의 전처의 소생들을 아브라함의 후처의 소생들이 사는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 그림을 잘 그려보면 아브라함의 전처의 소생들을 후처의 소생들이 맞이하는 형국이 됩니다.

이것은 언약적으로 보면 옛 언약이 새 언약 안에서 완성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육으로 난 이스라엘이 성령으로 난 이스라엘에 합류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전처의 소생인 육적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통해서 후처의 소생들이 사는 곳으로 인도됨으로서 영적 이스라엘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태어난 모세를 미디안 광야에 있는 하나님의 산으로 보내서 하나님의 친구인 르우엘에게 맡기셔서 40년 동안 하나님을 예표하는 임금이신 이드로의 양을 치게 하시면서 장차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와 40년간 살아갈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훈련을 이드로의 양 떼를 가지고 미리 시키게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모세는 출애굽 후 진짜 하나님의 양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 있는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실 때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산으로 인도하여서 경배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출애굽 한 후 사명을 받았던 그 산으로 돌아 온 것은 모세의 구원의 완성 지점과도 같은 것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이드로는 하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릴 재판관을 선임하는 일을 알려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직분자들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드로가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세를 이드로가 모세의 두 아들을 데리고 맞이합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앞서 간 성도들을 데리고 이 세상을 떠나온 성도들을 마중 오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모세의 두 아들은 십보라와 함께 일찍이 모세가 사명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애굽으로 갈 때 함께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중에 하나님이 아들에게 할례치 않은 죄로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십보라가 두 아들에게 할례를 행함으로서 살아났습니다.


할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두 아들은 죽음을 맛본 자가 됩니다.

할례는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에게는 홍해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라고 하였습니다.

세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러면 모세의 두 아들은 할례를 받음으로서 장차 홍해를 건너 하나님의 산이 있는 곳으로 인도 될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미리 경험하게 된 것과 같아집니다.


그래서 모세는 두 아들들의 할례 후에 애굽으로 데려가지 않고 그 아내와 두 아들을 이드로가 있는 미디안 광야로 돌아가게 한 것입니다.


모세의 두 아들의 구원은 이름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게르솜”인데 이는 “내 백성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엘리에셀”인데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바로의 칼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두 아들의 이름을 조합하여 보면 아브라함 언약을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의 손에서 건짐을 받고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을 반갑게 맞이하는 이드로의 방문은 장차 성도들이 이 세상을 떠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갈 때 예수님이 반가이 맞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후로 이드로는 자취를 감추고 모세는 이드로가 제정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라는 감독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산에서 가나안으로 40년 동안 행진하게 됩니다.


이는 새로운 시작을 말합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것은 모세의 1기 사역이었다고 한다면,

시내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고 내려와서 40년간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은 모세의 2기 사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1기 사역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는 육체적 사역이었다고 한다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난 후의 2기 사역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는 2기 사역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이 해처럼 빛이나 수건으로 가린 것은 곧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가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 속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얼굴에 광채가 나는 모세가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성령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출애굽하고 율법으로부터 출애굽 한 성도들을 여호와의 안식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한 모세를 이드로가 찾아온 여기까지의 사건은 영적인 의미로 보면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는 구속사적인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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