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칼럼

형벌 속에 담긴 복음

정낙원 2018. 2. 11. 13:09

여자의 길과 남자의 길 (창 3:14-19)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형벌은 죽임에 목적이 있지 않고 교화(회개)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벌은 정한 기간 동안 징계를 당하다가 때가 차면 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형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므로 저주가 아니라 복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고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렘 29:11-14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실제로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종살이 하면서 그동안 자신들이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포로 생활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도리어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성도는 형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이 세상이라는 지옥으로 내려 보내서 에덴동산을 소망하도록 하였습니다.

천국은 역설적이게도 지옥에서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내면서 장차 여자의 후손이 가서 뱀을 머리를 깨트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때 너희들이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각각의 형벌을 내립니다.

여자의 형벌과 남자의 형벌이 다릅니다.

 

형벌 속에는 복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벌이 아니라 복인 것입니다.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형벌 속에 세 가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남편(메시야)을 사모하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줄 남자를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생명과를 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는 여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남자라고 하고 자기 백성들을 여자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은 모두가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는, 남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남편의 그늘을 벗어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와 상대하지 않고 그의 남편과 상대를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가 서원하는 것을 허락지 않고 설령 서원을 하였다고 하여도 그 서원을 남편이 대신 갚도록 하였습니다.

 

그 남편이란?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남편에게 종속되도록 하셨습니다.

여자로 하여금 남편의 것으로 살도록 하였습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죄는 남편(예수그리스도)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악이고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을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해산의 고통을 당하도록 하셨습니다.

 

해산의 고통이란 옛 사람의 죽음을 뜻합니다.

여자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옛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딤전 2:15절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는 남자로부터 씨를 받으면 여자로서의 삶은 후패해집니다.

모든 몸의 시스템이 아이를 위한 삶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아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여자로서의 죽음인 것입니다.

 

잉태하는 고통이라는 말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대신 죽은 희생 제물의 흔적을 몸에 새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씨를 받으면 자신이 죽어지는 잉태하는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잉태하는 고통을 일컬어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이룬다고 합니다.  

 

여자는 아이를 해산함으로서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편에게는 여자이지만 아이에게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입니다.

성도는 여자이면서 남자입니다.

 

남자란 여자를 위하여 희생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해산한 여자는 남자처럼 아이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게 됩니다.

남자로서의 삶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남자에게 내려진 형벌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17-19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여자는 예수그리스도라는 남편을 통해서 남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예수의 생명을 가진 남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주는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이 수반이 됩니다.   

바울은 이를 십자가의 흔적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몸에 그 아들의 형상을 새기는 일을 하십니다.

아담의 속성을 제하시고 예수님의 속성을 채우시는 일을 하십니다.

 

구원 속에는 두 가지 싸움이 있습니다.

 

땅을 차지하는 싸움과 그 땅의 신과 싸우는 전쟁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옛 사람과의 전쟁인 것입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몸을 찾아오는 전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전쟁입니다.

이제 가나안의 신들을 때려부수는 전쟁을 하여야 합니다.

이 전쟁은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행하십니다.

우리 안에 가나안 신인 우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싸움은 마치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전투와도 같습니다.

여리고 성은 죄와 사망의 싸움이고,

아이 성 전쟁은 육신의 소욕과의 싸움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철옹성과도 같은 죄와 사망이라는 사단의 권세인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전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하신 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 안에 시날 산 외투와 은과 금을 탐하는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아이 성 전쟁을 하십니다.

 

범죄 한 아담의 몸에는 죄의 소욕들이 있습니다.

이름 하여 가시와 엉겅퀴들입니다.

아담은 종신토록 자기 안에 죄의 소욕이라는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는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두 싸움 중 첫째는 의(義)의 싸움입니다.

 

율법의 의냐!

예수그리스도의 의냐!

믿음이냐! 행위이냐! 의 싸움입니다.

 

율법의 의는 법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은혜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신앙을 선악의 법아래 두고자 합니다.

선악의 법이 작동을 하면 복음 아는 것이 힘이 되어서 정죄와 심판을 행사하게 됩니다.   

 

마귀는 법으로 살게 하여서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도 안에서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아가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법으로 살면 지옥이고, 은혜로 살면 천국입니다.   

 

두 싸움 중 둘째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입니다.

 

마귀는 세상 것으로 하늘에 것을 가리는 일을 합니다.

아간처럼 시날 산 외투와 은과 금을 탐하도록 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세상에 대하여 살고자 하는 옛 사람인 아간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세상 것이 제거 당하는 전쟁은 우리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육신이 좋아하는 소욕을 죽이는 일은 곧 해산의 고통과 같습니다.   

성도는 일평생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는 날마다 땅의 지체를 죽이는 싸움을 하게 됩니다.

이름하여 가나안 전쟁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땅을 빼앗는 전쟁이지만,

신약에서는 성도의 몸을 빼앗는 전쟁인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소욕을 제거하는 싸움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전쟁을 하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됩니다.

성령의 소욕이 이기면 우리 몸은 예수그리스도의 병기로 드려지고,

육신의 소욕이 이기면 우리 몸은 마귀의 병기로 사용이 되어집니다.

 

성도는 자기 안에 법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법을 죽이는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법은 은혜로서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성도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자기 안에 법이 작동하면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서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

법이 작동하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악한 생각들이 나를 사로잡게 됩니다.

그럼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성도는 은혜로서 마음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

 

남자는 예수님처럼 은혜를 주는 사람입니다.

남자답게 강건하게 사는 것은 법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여서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자와 남자에게 내려진 형벌의 길은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을 이루는 창조의 일과도 같습니다.

천지창조가 갈라내고 채우는 것으로 되어 있듯이,

우리의 구원도 갈라지고 채움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길은 천지로 나누어지는 일이고,

남자의 길은 천지 속에 만물을 채우는 일입니다.

이 일이 다 끝이 나면 일곱째 날 안식의 세계로 나아가서 영원한 안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자와 남자에게 내려진 형벌은 벌이 아니라 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