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칼럼

흙으로 돌아가라는 기쁜 소식 (창 3:17-19)

정낙원 2018. 2. 18. 13:14

흙으로 돌아가라는 기쁜 소식 (창 3:17-19)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생명과는 영생하는 것이고 선악과는 영벌 받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아담은 두려움이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고 두려워하는 아담을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자 죄인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죽음이라는 저주의 기운을 뿜어내는 땅으로 쫓아냈습니다.

 

아담은 종신토록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가시와 엉겅퀴를 뽑아내는 수고를 하여야 채소를 먹고 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저주의 기운으로 생산 되는 땅에서 나오는 산물을 먹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기운을 뿜어내는 땅에서 사는 한 저주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저주의 땅을 벗어나는 길을 오직 하나 선악과의 독을 품은 몸의 죽음뿐입니다.

죽음은 저주의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은 저주가 아니라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에 쫓기는 아담을 죽게 함으로서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자는 죽음을 저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 죽음에서 살아나는 부활 프로그램을 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부활 프로그램에 의하여 부활하였습니다.

 

고전 15:13-22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은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프로그램(약속)이 없었으면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언약(프로그램)이 없었으면 예수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모두가 부활 프로그램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프로그램에 의하여 살아난 첫 번째 열매입니다.

이제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자들이 살아날 차례입니다.

 

바울은 만약에 성도의 부활이 없었다고 한다면 우린 완전히 망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었으면 우린 실패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이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 후 내생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증명이 된 것이므로 성도의 인생은 망한 인생이 아니라 성공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성도에게 심겨진 부활 프로그램이란 다른 아닌 언약입니다.

그 언약은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깨트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언약을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 심어 놓았습니다.

 

언약이 심겨진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부활 프로그램이 내장이 되어 있으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계 20:11-14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첫째 사망은 육신의 죽음이고,

둘째 사망은 영벌의 죽음입니다.

 

첫째 사망은 성도들의 죽음을 말합니다.

둘째 사망은 천년 왕국 후에 불신자들의 영벌의 죽음을 말합니다.

 

성도들이 첫째 사망은 마귀로부터의 죽음입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에게 성도는 남의 나라 백성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죽이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 18-19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성도가 미움을 받는 것은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속한 자들은 이 땅에서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안에서 죽는 자는 복되다고 합니다.

 

계 14:13절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왜 주 안에 있는 자에게 죽음은 복되다고 합니까?

이는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산다는 것은 곧 수고와 슬픔이란 말입니다.

 

두 가지 부활이 있습니다.

 

첫째 부활은 성도의 부활이고,

둘째 부활은 불신자의 부활입니다.

 

계 20:4-6절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 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은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성도들이 부활 하는 것입니다.

이는 천년 왕국에서 살아가기 위한 부활입니다.

그래서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둘째 사망이 다스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마귀로부터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부활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이것은 천년 후에 일어나는 것으로서 불신자들의 부활을 말합니다.

 

성경은 첫째 사망이나 둘째 부활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황상으로 두 가지 사망과 두 가지 부활이 있습니다.

 

첫째 사망은 성도들이 마귀로부터 죽임 당하는 죽임이고,

둘째 사망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영벌당하는 심판을 말합니다.

 

첫째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로서 이는 천년 왕국에서 영생하는 부활이고,

둘째 부활은 불신자들의 부활로서 이는 천년 왕국 후에 영벌의 심판을 위한 부활입니다.

 

그래서 첫째 부활이 참예하는 자는 복된 자인 것입니다.

이는 둘째 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언약의 후손과 비언약의 후손입니다.

언약의 후손에게는 예수의 생명이 심겨져 있고,

비언약의 후손에게는 마귀의 생명이 심겨져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언약의 후손은 죽으면 예수의 나라로 가고,

비언약의 후손은 죽으면 마귀의 나라로 갑니다.

 

히 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이란?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는 천국에서 영생하고,

녹명되지 않은 자는 지옥에서 영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에게는 이 땅에 분깃을 주지 않고 하늘에 분깃을 주었습니다.

이를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고 나그네요 행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에서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땅에 속한 사람들은 오래 사는 것을 복이라고 하고 일찍 죽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죽음을 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성도들에게는 죽음은 안식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복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생과 내생이라는 두 인생이 있습니다.

 

고전 15:35-49절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이생이라는 1 라운드 인생은 이 땅에서 씨를 뿌리는 인생이고,

내생이라는 2 라운드 인생은 열매로서 곡간에 들어가서 안식하는 인생입니다.

2 라운드 인생이 진짜 인생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태어남은 곧 형벌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인생을 수고와 슬픔의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은 그만큼 수고와 슬픔을 많이 겪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수고하고 슬픈 인생사를 쉬게 하시려고 죽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은 위로와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아담의 죽음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범죄 한 인간으로서 저주의 죽음이고,

둘째는, 예수 안에서 영생을 위한 축복의 죽음입니다.

 

아담 속에는 구원 받을 인간과 저주 받을 인간 두 부류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 아담 안에서 구원을 받는 아벨과 저주를 받는 가인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은 복입니다.

중병에 걸려서 스스로 호흡하기도 어려운 사람을 산소호흡기로 연명시키는 것은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이야 하루라도 연명하는 것이 복일 수는 있어도 하늘에 속한 성도는 억지로 연명케 하는 것은 복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 처럼 생명을 연장 시켜 달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주여 종을 이제 평안히 놓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를 만나고 죽게 된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안이 안식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죽는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입니다.

 

사 57:1-2절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나사로가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무덤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죽음이라는 형벌에서 평안히 놓아주기 위한 사랑이고 축복인 것입니다.

마치 암에 걸려 죽어가는 몸을 죽여서 암과 상관없는 몸으로 바꿔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다시는 암에 걸리지 않는 몸으로 바꿔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를 바울은 알고 성도의 구원의 완성을 몸의 구속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몸이 의와 거룩의 몸으로 바꿔치기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두려움으로 떠는 아담에게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어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습니다.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이 역설의 의미를 아는 혜안이 있기를 기도합니다.